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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다, 찬란했다, 찬란했었다, 피렌체

현지인들의 자부심

피렌체의 자부심

찬란하다, 찬란했다, 찬란했었다, 피

피렌체의 자부심은 저 거대한 두오모 천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유럽 여행을 시작하는 도시로 어디가 좋을까? 이름만 들어도 유럽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프랑스 파리, 유럽 최고의 허브공항이 있는 영국 런던 아니면 극동아시아와 가장 가까운 유럽 도시 러시아의 모스크바? 이유를 들자면 수많은 도시가 리스트에 오르겠지만, 현대 유럽의 근원부터 찾는다면 단 하나, 르네상스의 발상지 이탈리아 피렌체이다.

 

독립문 쪽에만 가도 그 동네 터줏대감들이 자기네는 ‘도성 안에서 살던 양반들’이라고 굉장한 자부심을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지 이 땅의 중심에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럴진대 현대 유럽의 초석에서 살고 있는 피렌체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실제로 현지인들의 자부심은 다른 도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중세의 종말을 눈치채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간 피렌체의 기민함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피렌체공국은 새로운 문화, 르네상스를 발현시켰다. 한 시대에 천재 하나가 나타나는 것만도 놀라운 일인데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단테와 같은 천재들이 길거리에서 옷깃을 스치며 마주한 곳이 여기, 피렌체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책이라 하면 지식인의 언어, 라틴어로 쓰였다. 하지만 단테는 그 규칙을 깨버리고 자신의 책을 피렌체 지방의 이탈리아어로 적었다. 지방마다 방언 형태의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단테의 『신곡』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읽히며 자연스레 피렌체 말이 이탈리아 표준어가 되었으니 언어를 비롯해 문화, 예술의 수도는 피렌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어쩌면 ‘운명의 여신’이 피렌체를 향해 격한 애정을 쏟아부은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우주의 기운’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토록 많은 천재와 때마침 그들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주었던 메디치 가문이 한꺼번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한담! 천재들의 역량, 귀족의 재력 그리고 운명의 여신까지 모두가 피렌체를 새 시대의 중심에 세워둘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과거의 영광이 피렌체 역사지구를 걷는 동안 내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두 손 가득 명품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관광객이 거리를 아무리 점령해도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에 흠집을 낼 수 없으며 ‘메이드 인 차이나’의 제품이 골목을 가득 채워도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든 가죽 수공예품은 빛이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피렌체를 떠나며 선언하듯 말했다.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노라며.’ 우리가 겪은 일들이 다른 나라에서 마음 다쳤던 일들과 크게 다른 건 아니었다. 자신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무시하기, 여행객에게 바가지 씌우기, 얼굴색이 다르다고 이상하게 쳐다보기 등등. 여행 초반, 이런 것에 내성이 생기기 전에 이탈리아 그중에서 콧대 높기로 유명한 피렌체를 방문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토록 아름답고 기품 넘치는 피렌체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찬란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박제해 놓은 피렌체 역사지구를 걷고 두오모 성당 종소리의 깊은 울림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건만 남자의 마음이 좀체 바뀌지 않는다. 피렌체여, 당신은 그 이유를 아는가?

과거를 사는 피렌체

찬란하다, 찬란했다, 찬란했었다, 피

언제쯤 찬란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담아두고 있는 피렌체 역사지구를 다시 걸어볼 수 있을까.

근원을 살피는 일은 늘 흥미롭다. 피렌체는 중세시대가 끝나며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를 받아들이고 그동안 쌓아왔던 역량, 비르투Virtu을 합쳐 새 시대를 맞이했다. (두 단어는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에서 인용했으며 여기서는 그 의미를 단순화시켜 포르투나를 운명, 비르투는 역량으로 풀이하도록 하자.) 그것이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의 근원인 인본주의의 태동, 즉 르네상스 시대이다.

 

예술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발전도 있었다. 로마가 사라지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군주정이 사회를 지배했으나 단 한 번 공화정이 태동한 적이 있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살던 피렌체에서다. 『군주론』『로마사 논고』를 쓴 마키아벨리는 하나 된 이탈리아를 꿈꾸며 끊임없이 공직을 갈망했다. 이 두 권의 책에 모든 역량을 쏟아 공화정과 군주정 사이에서 서 있던 자신의 운명을 넘어서고자 했지만 결국 무릎 꿇고 말았다.

 

그를 찾아 피렌체로 떠났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흔적을 찾기도 전에 이 도시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았다. 이쪽에서 뭘 물어봐도 눈을 맞춰 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적잖이 당황스러웠으며 관광객들 돈이나 빼앗으려고 혈안이 된 상인들의 손짓을 이겨내야 했다. 사람뿐 아니라 현지인이 아니고서는 이용하기 힘든 철도, 좀처럼 찾기 힘든 공용인터넷과 같은 시스템과도 다투어야 했다. 마치 ‘세상의 근원이 이곳이니 너희들이 여기에 맞추거라’는 듯 이방인을 위한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빗장을 꽁꽁 채운 느낌을 받았는데 ‘여보시오, 심보 참 고약하구먼. 르네상스 시대에는 상황과 변화에 맞게 비르투와 포르투나를 조화롭게 운용하더니만 지금은 어찌 이리 고집불통이오. 이방인마저 마키아벨리처럼 실망하게 만들 참이오?’

 

물론 현지인들이 낯선 여행객에서 친절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니 다른 이들처럼 명품 백이나 사고 맛있는 음식이나 먹고 다녔으면 마주하지 않았을 고민이었을 텐데 나야말로 과거 피렌체의 영광을 현재에서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피렌체의 답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대’하고 ‘요구’했던 건 결국 나의 잘못이란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이 도시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과거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 문화, 경제 모든 분야에서 여유로웠기 때문이고 그 에너지로 근본을 살피고 먼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도시는 과거의 영광에 붙잡혀 여유롭고 대담하게 그 운명을 견뎌낼 수 있는 비르투를 준비하지 못한 듯 보인다. 피렌체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근원을 거슬러 가보는 걸 좋아한다. 어째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며 누가 그 일을 조종하고 아무도 모르게 덮으려 했는지 와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삶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먹고살기 바쁜 이에게는 당장 내 손에 잡히는 것들에 대한 고민으로도 벅찰 것이니 그 근원에 대한 고민은 배부른 치기일지 모른다. 현재의 피렌체는 조상들의 흔적을 보려고 밀려드는 돈을 걷어들이려고만 했지 어떻게 현명하게 써야 하는지, 비르투를 키우려는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었을까?

 

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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