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연 “영어에 무작정 달려드는 건 이제 그만하자”
완벽한 문법보다 물 흐르듯 유창한 언어를
15살 때 미국 유학을 떠났다. 20대 초반에 펴낸 『공부기술』은 50만 부가 팔려나갔다. 미국 뉴욕 대학교 경영학과와 프랑스 미술사 학교 에꼴 드 루브르에서 수학하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을 습득했다. 철학, 미술, 음악 등 인문학으로 ‘썰’을 풀려면 한참을 풀고 또 풀어도 모자라게 박학다식함을 자랑한다. 『그물망 공부법』, 『비즈니스의 탄생』,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등 펴낸 책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조승연 이야기다. 집필한 책 목록만큼이나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 목록도 늘어만 간다. <세계테마기행>, <비정상회담>, <라디오스타>, <말하는대로>, <비밀독서단>까지. 무엇이 그렇게 할 말이 많은 걸까.
이번에 펴낸 『플루언트』는 또 조금 다르다. 책을 펴고 보니 영어뿐 아니라 전반적인 언어와 문화를 아우른다. 어떻게 하면 더 고급스럽게, 원어민처럼 언어를 다룰 수 있나 가르쳐주는 책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21세기 ‘영어 문명기’를 살면서 조금씩 변하는 영어, 98분마다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는 방대한 영어 자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제안하는 언어학 책에 가깝다. 자기 자랑 같지만 계속 배우다 보니 계속 할 말이 생긴다. 공부하다 보니 계속 알리고 싶다. 이것 역시 조승연 이야기다.
필요한 자질은 유창성
조승연, 하면 영어와 공부가 먼저 떠오릅니다.
『공부기술』을 썼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달라요. 예전에는 학습 계획 같은 개념이 없었던 시대예요. 공부는 무식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공부하던 시대에 우리 두뇌가 어떤 건지 고민하고 똑똑하게 공부하자는 의미로 썼던 책인데요. 지금 영어 공부는 오히려 반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너무 기술이 많아요. 단어 외우는 방법, 드라마로 공부하는 법 등 너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문제는 자기 주도적으로 영어 공부를 하면서 그 기술을 적절히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 기술이 내 영어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게 문제거든요.
머리말에 영어 기술을 쓰려는 생각은 없었다고 쓰셨어요. 보통 독자들이라면 영어를 잘하는 방법이나 기술을 얻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텐데요.
우리 모두 알고 있듯, 가장 중요한 건 중도인데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치우치거든요. 작가로서 항상 어느 쪽으로 치우쳤을 때 반대 의견을 얘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만약 문학가들이 영문학 위주로 영어를 공부하는 시대였다면 이 책을 안 썼겠죠. 지금은 오히려 영어를 둘러싸고 너무 많은 기술이 나와서 전체적으로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그림이라든지 어학적인 이해가 점점 잊히고 기술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게 오히려 문제이기 때문에 책의 논조를 언어와 인문학 쪽으로 잡았어요.
『공부기술』, 『그물망 공부법』, 『이야기 인문학』 외에도 책을 많이 내셨어요. 할 말이 많으신 것 같아요.
계속 배워가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어요. 『공부기술』은 미국에 있을 때 쓴, 모든 걸 효율과 허례허식 없애는 데 초점을 맞춘 책이에요. 하지만 『그물망 공부법』은 프랑스에 갔을 때 지은 프랑스적인 책이에요. 미국에서는 모든 게 효율이었는데, 프랑스에 갔더니 다르게 공부하는 거예요. 공부는 즐기면서 해야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더라도 아름다운 조명, 아름다운 냄새가 나는 곳에서 공부해야지 똑같이 앉아서 라면 냄새 맡으면서 공부하면 안 된다는 책이었죠. 프랑스적이잖아요.
이번에 쓴 『플루언트』는, 중국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거예요. 영어로 유명해졌지만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에 어떻게 배웠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한문을 배우면서 다시 언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이 난 거죠. 아마 10년 후에 또 다른 책을 쓰게 된다면, 훨씬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계속 할말이 생기는 이유는 저한텐 좋은 거죠. 아직도 책을 쓰고 싶다는 건 새로운 걸 배우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구글 번역기 등 번역 기계와 프로그램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언어로 감정 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이 주목받을 거라고 하셨어요.
예전에 모든 가죽제품을 손으로 만들어야 했을 때는 동네마다 가죽수공업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기계로 만들 수 있게 되니 명품 만드는 사람 외에는 직업이 없어져 버렸거든요. 영어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든지 기계와 기술이 발전하면 그 기술을 통해서 경쟁력을 쌓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떨어지고 최고만 남죠. 옛날에 영어 자체로도 소통이 힘들었던 세대에는 구글 번역기 정도로만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각광을 받았겠지만 그걸 기계가 다 해낼 수 있다면 국제적으로 분쟁을 조절할 수 있다든지, 사람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만 글로벌한 직업 문이 열릴 거예요.
모든 사람이 그 정도 수준까지는 사실상 어렵지 않을까요?
어려운 게 아니에요. 어떤 언어를 하든지 그 언어로 감정소통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질이 플루언트, 즉 유창성이에요. 유창성은 완벽하다는 게 아닙니다. 잘 흘러나온다는 이야기예요. 콩글리시도 잘 흘러나오는 사람이 있고요, 완벽한 영어 문장을 지어내는 사람이더라도 느릿느릿하고 감정 느낌 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전혀 다른 문제예요. 유창하다는 건 고급스러운 문법과 어휘를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진실하게 이야기했을 때 상대편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어를 한다는 것이거든요.
언어를 막는 걸림돌
한국인과 미국인은 생각이 반대이기 때문에 말을 할 때도 단어가 나오는 순서가 반대라고요.
우리가 잘 아는 루스 베네딕트 교수라든지, 이미 수많은 비교 언어학자가 한 말이에요. 동양인은 포괄적으로 보고 서양인은 미세하게 본다. 우리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이게 영어 공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실제로 서양인은 미세하게 보기 때문에 문장도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큰 걸 만들어요. 우리는 포괄적으로 보기 때문에 문장도 큰 것부터 시작하죠.
영어는 굴절어고 한국어는 교착어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가 휴머러스하기 때문에 ‘개-‘라는 형태소를 좋아하는데, 예전에는 ‘개’라는 형태소가 나쁜 의미였습니다. 강아지는 귀엽지만 개와 새끼를 붙이면 그게 욕이 되어버리거든요. 하지만 젊은 세대로 가면 ‘개’가 멋지다는 의미로 쓰이죠. 개쩐다, 개멋지다 등. 이런 특유의 의미가 있는 형태소를 반죽해서 단어를 만들어 내는데, 그 과정이 익숙하면 어휘를 많이 암기하지 않아도 돼요. 어렸을 때부터 어떤 식으로 형태소를 반죽해서 단어를 조합하는지 은연중에 깊은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코미디언이 신조어를 만들면 사전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웃어버리고요.
한국어는 형태소를 붙이지만 영어는 형태소를 조금씩 휘어서 단어를 만들죠.
한국어도 사실 두 개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한자어는 중국 방식으로 만들고 순우리말은 교착으로 만들죠. ‘이 기간부터 이 기간 사이에는’을 다 말하려니 답답해서 다 붙여 ‘요새’라고 말한다면, 중국어는 고립적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블록쌓기처럼 단어를 붙여요. 중국이라는 대륙의 거대함을 생각하면 왜 이런 식으로 단어를 만드는지 대강 이해가 되잖아요. 우리나라는 ‘빨리빨리’니까 답답해서 다 붙여버리는 거고요. 반면 영어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굴곡이라는 방법이 있어서 이해가 힘들어요. 소리를 구부린다는 말이거든요. Sing을 이리저리 휘어서 sing, sang, song 등으로 바꾸는 거죠. 이 느낌을 모르니까 모든 변한 단어 리스트를 만들어서 외우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우리가 파랗다, 푸르다 하는 것처럼 같은 단어를 살짝살짝 구부릴 뿐인데 말이죠. 그런 관점에서 형태소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예전에 중학교 다닐 때 평서문을 의문문으로 만들라는 시험이 있었어요. 문장 맨 끝에 물음표만 붙여서 냈더니 다 틀렸다고 했었죠.
그게 두 번째로 한국인들이 겪는 문제인데, 우리는 언어학자들이 국지어라고 부르는 언어를 씁니다. 국지어는 한 나라에서 쓰니까 법으로 그 언어를 표준어로 제정해서 쓸 수 있어요. 이게 우리한테는 너무 당연한 개념이지만 사실 당연한 게 아니거든요. 한 국가 안에서 수많은 언어를 쓰는 인도나 중국도 있고,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수많은 나라 사람이 공통으로 쓰는 언어도 있어요.
흔히 학교에서 have와 과거분사를 합치면 완료형이 된다고 배웠잖아요. 하지만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에서는 done이라는 단어를 대신 사용해 ‘나는 이미 갔어’라는 표현을 ‘I done gone.’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럼 그 사람은 영어를 두 살 때부터 했는데 그걸 틀렸다고 할 거냐는 거죠. 이제까지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그걸 틀렸다고 한 거예요. 말하는 감정에 빠져들기보다 문법 요소를 따지고 드니까 사람 사이가 막히죠. 감정이 물처럼 흘러야 플루언트해지고 유창해지는 건데 자꾸 문법이 머릿속의 댐처럼 흐름을 막는 작용을 지적하려는 겁니다.
기술보다 가슴으로
기술에 관해서 쓰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영어를 배우는 팁이 붙어있긴 해요. 간단한 문장 구조를 가지고 단어를 바꿔가면서 많이 써보라든지요. 실제로 영어를 배우면서 하셨던 방법인 거죠?
네, 그리고 항상 기술적인 면은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어요. 조승연이라는 사람이 영어의 굴절감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게 맞는 방법이었어요. 주어와 동사를 계속 연습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방법보다 단어가 휜다는 게 느껴질 때까지 뭔가 해야 한다는 게 중요해요. 그 감을 익히는 게 저한테는 그런 방법이었던 거죠. 가장 완벽한 언어학습자는 자기가 스스로 자기만의 연습 방법을 만들어 내야 해요. 다만 방법을 만들어 본 경험이 대부분 없기 때문에 그냥 참고하시라는 거예요. 펜 잡고 자리에 오래 못 앉아있는다, 그럼 제 방법으로 하시면 안 되죠. 읽어야 잘 배우는 사람, 귀로 더 잘 배우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읽기가 더 좋았던 거고,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배울 필요는 없어요.
단어 계열을 파고 들어가 공부하는 방법도 소개했어요.
맞아요. 우리는 한자를 몰라도 한자어는 알아들어요. ‘효자’의 글자와 ‘효심’에 들어있는 글자가 같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영어는 발음기호를 쓰다 보니까 형태소가 묻히기 때문에 한자어를 모르면 한국어를 배우기 매우 힘들죠. 그리고 유럽어는 공통 구조에서 나왔지만 고대 그리스어 계열, 독일 계열 등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면서 같은 형태소가 발음이 다른 경우가 많아요. 그런 걸 볼 줄 아는 능력이 생겨야 우리가 영어 단어를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거죠.
동양인이 영어를 잘하려면 문화를 현지인보다 훨씬 더 깊이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죠. 멀리 갈 것 없이, 중년 부장님이 신입사원과 밥을 먹으러 나가면 대화가 안 통합니다. 신입사원이 최신 유행하는 드라마와 연예인 이야기를 하면 부장님은 소외감을 느껴요. 어떤 할아버지가 무덤 앞에서 펑펑 울면서 불효자를 용서하라고 하면 우리는 무슨 소린지 알아요. 하지만 외국인이 그 장면을 봤다면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효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는 개념으로, 한없는 빚이기 때문에 그런 절규로 효를 표현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우리가 왜 문화를 공부해야 하는지 이해가 빨리 되거든요.
재밌는 게, 사람이라는 존재는 기계와 달라서 너무나도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존재예요. 언어에는 모호함이 많아요. 운전하면서 불이 켜지면 달리잖아요. 그게 무슨 불이죠?
파란불이죠.
파란불이죠. 근데 그 불 색은 무슨 색이죠?
초록색이죠(웃음).
만약 미국 사람이 사전에서 배운 방식으로 한국어를 하면 아마 초록 불이나 초록 등이라고 부르겠죠. 영어로는 그린 라이트니까. 지금 우리가 배우는 영어는 기계언어처럼 배우잖아요. 트랜지스터라디오 만드는 것처럼 여기에 주어 끼우고 저기에 목적어 끼우면 영어가 되는 것처럼요. 그런 언어를 배우고 싶다면 저는 C언어를 권하고 싶어요. 컴퓨터랑 얘기한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데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영어를 너무 과목으로만, 공부로만 접근하다 보니까 영어가 어떤 사람에게 나 너 좋아해, 싫어해 하고 말할 때 쓰는 거라는 걸 잊어버리는 거죠.
언어를 쓰는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우리가 영어를 쓸 때 반대쪽에 있는 ‘물체’가, 우리가 원어민이라고 부르는 희한한 물체가 우리와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고 숨도 쉬는 인간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공부해요. 그 인간이 왜 생소하게 느껴지냐, 사고방식이 우리랑 다르단 말이에요. 문화적 배경도 다르고 가족을 분류하는 방법도 다르고요, 다 달라요. 그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해를 못 하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옳고 그른 건 뭐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힘들어요. 사람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존재고,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맞고 틀리다고 말할 수 없어요.
바이링규얼은 두 개의 영혼
몇 개 국어 하냐는 질문 많이 받으셨을 테니, 다르게 질문드려 볼게요. ‘두 언어를 안다는 것은 두 개의 영혼을 가지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왔는데, 저자님 생각하실 때 지금 영혼이 몇 개인가요?
그 질문보다 이제까지 살아온 나라 중 어느 나라가 제일 좋냐는 질문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다른 데서도 많이 써먹은 멘트기는 한데, 제가 생각해도 멋있는 말이라 한 번 더 써먹을게요. 한국은 내 어머니고, 미국은 내 선생님이고, 프랑스는 내 애인이었고 이태리는 내 아내였다. 하지만 지금 부인 말고 전부인(웃음).
네 나라 다 사랑하는데 느낌이 달라요. 한국은 말 그대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땅, 조국이죠. 떼려야 뗄 수 없고 여기 와 있으면 괜히 편해요. 별로 좋아하지 않던 길거리 음식도 괜히 한국을 벗어나면 먹고 싶고요. 미국은 제게 수많은 걸 가르쳐 준 나라예요. 세상을 이렇게 넓게 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나라죠. 프랑스는 젊었을 때 사귀었던 무지하게 예쁜 사람 같아요. 정말 화려하고, 낭만적이고, 비실용적이고, 어디 가서 앉아 있어도 항상 데이트하는 기분이지만 돈이 많이 들고 불편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갈 때마다 첫사랑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련해지죠.
중국어도 요새 조금씩 하신다고요.
여러 개 언어를 하다 보니까 항상 자부심이 있었어요. 영어랑 프랑스어를 하면 어디 가서도 관광객처럼 깃발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고 어느 나라에서든 현지인들이 다니는 곳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믿고 있었는데 2014년에 상해를 갔어요. 사람들이 정말 영어를 하나도 못 하더라고요. 부모님은 한자를 하실 줄 아니까 제가 지하철 찾느라 구글맵 보고 있는 동안 부모님은 승강장을 읽고 쑥 들어가시는 거죠. 그때 독이 올랐어요. 우리나라 바로 옆에 13억 엄청난 인구가 쓰는 언어가 있는데 이걸 모르면 창피한 거구나, 도올 선생님 강의 볼 때도 동양 철학자들 이야기 들으면서 나름 제가 인문학 책 쓴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 있나 부끄러움을 느꼈죠.
기존에 유럽어 쪽으로 주로 하셨는데, 중국어는 다른 계열의 언어입니다. 힘들진 않으세요?
제 성질이기도 하지만, 안 통해서 손짓 발짓해봐야 언어를 하는 것 같아요. 어르신들도 해외여행 다니면서 물건도 혼자 못 사고 그럴 때 내가 영어 좀 해둘걸, 하고 후회하시잖아요. 제가 중국 가서 심하게 얻어맞은 거죠.
중국에는 어느 정도나 갔다오셨던 거예요?
3일이요(웃음).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던 ‘언어부심’, 어디 가서도 유창하게 현지인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언어부심이 추락해서 말도 못했어요. 일본 갔을 때도 중국보다 더 심했고요. 이제 한문 좀 하고 다시 일본에 가보니까 이제서야 무슨 뜻인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열다섯 살 이후로는 쭉 서양에 계셨었잖아요. 동양, 서양 인식 차이가 있을텐데, 저자님은 어느 쪽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시는지 궁금해요.
이게 되게 재밌는데요, 홍콩 학생들은 영어를 쓰다가 인식 차이를 조사하면 개별적으로 보는 서양 세계관으로 대답하고, 중국어를 하다 테스트하면 전체적으로 보는 동양적 사상으로 응답해요. 제 친구들이 한국에서 방송 나온 걸 보면 킥킥대고 다른 사람 같다고 많이 이야기해요. 표정이라든지 말투, 제스처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한국에 있고 한국어를 쓸 때는 한국인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거든요. 언어를 잘한다는 건 깊숙이 또 하나의 자신을 만드는 과정인 것 같아요.
롤모델은 제임스 본드
홍정욱 씨 책(『7막 7장』)이 저희 때 굉장한 붐이었잖아요. 시기는 좀 다르지만, 작가님도 온 학교에 동양인이 한두 명밖에 없던 유학 세대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유학세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우리 때 장점은 다른 한국 사람이 없었다는 거였죠. 미국 문화를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한국 사람이 없으니 할 수밖에 없다는 환경이 장점이었어요. 단점도 있어요. 물론 5,60년대 갔다온 분들보다는 덜했겠지만 인종차별이 현재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콤플렉스였던 시기였어요. 유학을 가면 일부러 한국말 안 써야 하고, 일부러 한국 친구들과 상종하지 않아야 소위 말하는 미국의 주류 사회에 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주류 사회라는 게 도대체 뭔지도 모르는 거지만요. 지금은 유학생 숫자가 많다 보니 한국인들끼리 커뮤니티가 굳건히 생기죠. 또 옛날처럼 미국이 무조건 좋은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기왕이면 부모와 친구가 있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걸 최종 목표로 삼고 유학을 나가기도 하죠.
토털 인텔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인가요?
토털 인텔리를 동양식으로 말하면 ‘선비의 도’ 같은 거여서, 아마 평생 하게 될 것 같아요. 토털 인텔리는 어찌 보면 야욕이죠. 이루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되고 싶은 이상형을 가지고 있는 건 중요한 것 같아요. 끊임없이 머릿속에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걸 그려 놓고 그쪽으로 움직이다가, 죽는 거죠 뭐. 그 목표가 손에 잡힌다면 그게 더 불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토털 인텔리 하면 대표적으로 움베르토 에코가 떠오릅니다. 롤모델에 가까우셨을 것 같아요.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었어요. 제가 언어를 가지게 된 주요 계기 중 하나가, 어머니가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를 사다 놓고 제가 읽으려니까 너무 어렵다고 읽지 말라는 거예요. 저 사람 너무 해박해서 라틴어랑 그리스어 써서 안 될 거라고요. 그래서 제가 약간 독이 올랐어요. 누가 어떤 게 어렵다고 하면 저는 얼마나 어려운가 해봐야 돼요. 그게 저를 이제까지 끌고 온 원동력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처럼 사회를 위해 뭘 해야겠다 하는 멋있고 큰 이유가 아니라, 저는 더 작은 사람이었던 거죠. 지금도 누군가 너 이건 안될걸, 하면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하고 덤벼드는 경향이 있어요.
어머니도 많이 언급하셨어요. EBS 다큐멘터리 <어머니 전>에 같이 출연하시기도 했고요. 어머니도 롤모델이었나요?
어머니랑은 친하죠. 오픈 마인드시다 보니 부딪칠 일도 없고, 취향도 비슷해서 어디 밥 먹으러 나가면 다른 아들들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곳 찾아다닐 텐데 전 제가 좋아하는 곳 가면 그게 어머니가 좋아하는 곳이에요. 편하죠. 부모님은 롤모델이라기보다 오히려 다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 롤모델은 대부분 매스 미디어에서 찾아서 많이 유치한 면이 있죠.
제임스 본드가 롤모델이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제임스 본드도 있고, <탑건>의 톰 크루즈 보고 조종사 되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 사실 언어학에 관심을 가진 계기도 제임스 본드와 깊은 관계가 있어요. 제임스 본드가 영화에 언어학과 출신으로 나오거든요. 어느 나라 여성이든 바에 들어오면 그 나라 말로 인사를 하는 거예요. 러시아 여성이 들어오면 멋있게 ‘즈드라스부이쪠’ 하고. 지금 다시 보니까 인사말밖에 안 하더라고요? 인사만 그 나라 말로 하고 그 이후에는 계속 영어로 대화해요(웃음).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멋있는 거예요. 제 롤모델은 좀 낮은 곳에 있습니다(웃음).
연애가 언어를 배우는 데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말도 있어요. 동의하세요?
아, 백 퍼센트요. 왜냐하면요, 연애는 유창성이 없다면 언어로 하기 가장 어려운 두 가지를 해야 돼요. 첫 번째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 보면 언어가 늘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 고백해야겠다, 그러면 문화마다 고백하는 방식, 순서, 장소가 다 달라요. 또 그 나라의 미적 기준도 이해해야 해요. 옷을 어떻게 입어야 그 나라에서는 멋있는지, 웨이터에게 어떻게 대해야 이 나라에서는 있어 보이는 사람인지 등 여러 문화적 포인트를 이해 못 하면 매력이라는 오묘한 성질을 찾아내기 어렵거든요. 그리고 연애를 시작하면 무엇보다 싸워야 하는데, 싸움을 하면 언어가 늘게 되죠. 감정적인 언어 사용을 강제로 해야 하니까요.
명성은 롤러코스터, 곧 내려올 때가 온다
작년부터 예능 프로그램에 좀 나오셨잖아요. 지금은 tvN <비밀독서단>에도 출연하시고요.
글쓰는 사람에게 방송 일은 사실 좀 어려워요. 글을 내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칠 수 있지만 방송은 한 번 뱉고 나면 PD님 마음이에요. 처음에는 녹화 끝나고 집에 가서 이렇게 하지 말걸 하고 후회도 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차피 사람들이 정보를 접하는 방식이 다양해졌잖아요? 인터넷으로, 책으로, TV로 정보를 접하는데 채널을 가리는 것 자체가 우습게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우리나라 영어 공부 방식이 진짜 바뀌도록 영향을 미치려면, 한국인이 영어를 이렇게 힘들어하고 고통받는 걸 해결해 주는 게 제 목적이라면, 좋은 방법이 있다면 어디 가서든 이야기를 해야죠.
방송과 책은 아무래도 다르죠.
지금은 제가 적응하면 된다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만일 제가 강연을 가고 TV에서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 했다, 채널이 돌아갔다, 그럼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자세히 안 읽어서 그렇다고 답답했을 거예요. 지금은 제가 어떤 개념을 설명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그러면 그게 제 직무유기더라고요. 저는 연구자가 아니라 커뮤니케이터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방송이냐, 책이냐 가리기보다 예능적으로 웃기면서도 제가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법을 배우자고 생각해요. 열심히 선배님들 보고 배우면서 인턴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방송 출연으로 인해서 어울리는 사람도 바뀌었나요?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긴 했어요. 예전 책에 추천사를 써 준 <비정상회담>의 타일러 씨는 저랑 굉장히 잘 맞아요. 오후에 예쁜 카페에서 만나 홍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떠는 거 좋아하고요. <비정상회담>의 인도 대표 럭키 씨도 방송에서 만나서 친해졌죠. 하지만 아직은 약간 연예인 체험하는 느낌이에요. 제가 방송인이라고는 절대 생각 안 해요.
왜요?
공부하는 사람은 원래 혼자 있는 게 정석이에요. 그래도 스포트라이트 받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 사람들의 삶을 체험할 어마어마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해야죠. 방송, 연예 커리어라는 건 롤러코스터 같은 건데, 올라가면 내려가거든요. 그냥 ‘언젠가 한 바퀴 돌면 원래 삶으로 돌아가겠지’ 이런 생각으로 원래 생활 패턴을 바꾸거나 하진 않아요. 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도중에 내가 뭐라도 된 줄 알고 내 인생을 바꿔버리면 끝나고 종착지가 되게 낯설게 느껴질 거란 말이에요. 제가 원래 개그맨이나 아이돌, 가수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능을 무지하게 잘해서 빵빵 터뜨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지금 한국에서 좀 흥미로운, 젊고 가벼운 콘텐츠를 갖고 있는 사람을 목말라하던 차에 운이 좋아서 사람들이 절 많이 쳐다봐 주시는구나, 감사하다, 한 1,2 년 즐기자는 마음이에요.
힘 빼고 물 흐르듯이
예전 인터뷰에서 ‘책을 보고 항목 하나하나에 매달리지 말고 철학을 봐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책을 내시면서 관통하는 철학이 뭔가요?
우리나라는 힘들게 하는 게 잘하는 거라고 가르쳐요. 피눈물 쏟으면서 열심히 해서 분명 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대부분 힘든 건 뭘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우리나라 많은 사람이 일도 공부도, 생활 자체를 너무 열심히, 힘들게 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느 분야나 잘하는 사람들은 쉽게 하거든요. 물론 그 쉬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길이 여기 있는데 길이 없는 곳을 계속 파는 건 그만할 때가 되지 않나 싶은 거죠.
기존 세대는 길이 없으니 개척자 정신으로 뚫는 게 의미가 있었죠.
어디에도 길이 없던 세대는 그냥 정면돌파였어요. 경부고속도로 막 뚫고요. 잘하셨어요. 그분들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됐는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거죠. 지금은 시간 여유가 있잖아요. 좋은 길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투자하면 훨씬 빨리 갈 수 있는데 무작정 달려드는 건 이제 그만하자는 거죠. 꼭 공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삶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에서 힘 빼고, 숨 좀 쉬고, 상대방 얼굴도 쳐다보면서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껴보라는 거죠. 알아듣는 것만 들으면서, 못 알아들으면 못 알아듣는 대로 통하고요.
다른 인터뷰에서는 우리나라 문화를 번역해서 다른 나라에 알리고 싶다고도 하셨어요.
지금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문학과 문화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히 내가 한국 사람이고, 영어와 프랑스어에 어느 정도 견해가 있으니 할 수 있겠다고 여기고 한 말이었는데, 이후에 한국 고전을 파기 시작하니까 제가 아는 게 없더라고요. (웃음)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서 한국의 정신세계를 설명할 만큼 잘 아는 게 아니더란 거죠. 다시 처음부터 하고 있어요, 하늘천 따지부터.
글 | 정의정 사진 | 한정구(AM12 Studio)
조승연 저 |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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