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경 작가, 마침내 우리에게 도달한 로맨스
각본 『헤어질 결심』
"20년 넘게 시나리오를 썼지만 <헤어질 결심>은 나를 다시 겸손하게 했다."
박찬욱 감독과 <친절한 금자씨>부터 <아가씨>까지 꾸준히 작업을 해온 정서경 작가. 하지만 그에게도 <헤어질 결심>은 새로운 '사건'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산과 바다를 떠올렸다는 그는 영화 속에서 '진짜 자연'을 마주한다. 스크린을 채우는 인간의 근원에서 소용돌이치는 사랑. 그 뒤에는 '송서래(탕웨이)'와 '장해준(박해일)'의 세계를 근본부터 쌓아올린 정서경의 디테일이 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과거에는 시나리오 작가가 엔딩 크레딧의 한 줄이었다면, 지금은 각본집을 찾아 읽을 정도로 관심이 뜨거워요.
"아무도 모르게 바다에 버려요"라는 대사처럼, 저는 시나리오 작가가 국정원 요원처럼 '아무도 모르게' 움직이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정체성으로 살았는데, 이렇게 주목을 받으니 신기해요.(웃음)
영화가 끝나면 대사놀이를 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어요. 지금은 모두가 <헤어질 결심> 대사 패러디를 하고 있죠.
이제는 뇌가 노화돼서 제가 써놓고도 잘 기억하지 못해요.(웃음) 사실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놀랐어요. 시나리오를 쓸 때는 잘 이해되지 않으면 어쩌지, 대사가 낯설면 어쩌지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특히 이번 <헤어질 결심>은 대사가 짧아요. 탕웨이가 낯선 한국어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담을 줄여줘야 했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뜨거워서 한편으로 내가 어떤 관객과 함께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됐어요.
<헤어질 결심>은 시나리오와 완성된 작품이 가장 다르게 느껴지는 영화였다고요. 어떤 점이 다르게 느껴졌나요?
처음 시사회를 보고 든 생각은 '영화가 자연 현상 같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지금까지 작업한 어떤 작품보다 자연이 많이 나오기는 해요. 산과 바다가 나오니까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자연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제 머릿속의 산과 바다와 너무 다른 거예요. 이게 진짜 산이고 바다구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오듯이, 영화가 관객에게 자연에 가까운 근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구나. 한 인터뷰에서 "관객에게 100프로 가 닿았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영화가 이미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의 일부인 우리에게 전해진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요.
기획 단계부터 탕웨이를 떠올렸다고 들었어요. 박찬욱 감독이 "멜로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 "탕웨이가 아니면 멜로를 안 하겠다"고 한 건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요.
우리에게는 2안이 없었어요. 캐스팅이 안 되면 어쩌지 감독님도 저도 불안했죠. 탕웨이와 미팅을 할 때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통역 없이 이야기를 했어요. 평소에 영어를 자주 쓰지 않으니까 중간에 막히기도 했는데, 긴장을 해서 자세한 건 기억도 안 나요. 캐스팅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너무 기뻤죠.
영화를 보고 '서래와 해준이 설화 속 인물 같다'고 느끼셨다고요. 드라마 <마더> 제작 당시 인터뷰에서, 작가님은 "엄마가 된 이후에 인간을 발생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했죠. 그 결과물이 이번 영화의 인물 같기도 했는데요.
엄마가 된 이후에 인간이 생물학적 수준에서 결정된다고 믿게 됐어요. 그전에는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은 나의 고유한 경험과 특성 때문이겠지 생각했죠. 그런데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니 사람도 마치 씨앗에서 큰 느티나무가 되듯이 자라나는 존재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서래와 해준도 농산물이나 수산물처럼 본질적 특성에서 출발한 사람으로 생각했어요. 시나리오에서 "계봉석, 충북 단양 사람"(46쪽)이라는 대사를 좋아하는데요. 마치 사람이 그 지방에서 자라난 농산물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보훈처에서 독립운동가를 그렇게 소개하는 걸 알고, 인간을 파악하는 방식이 굉장히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사랑 이외의 이유는 없었으면
탕웨이가 연기한 '서래'는 중국에서 온 사람입니다. 시나리오에는 서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디테일이 많아요.
처음부터 서래의 모든 과거를 정해놓고 쓰진 않았어요. 다만, 왜 중국에서 간호사가 됐을까, 남편 기도수를 죽인 것이 정말 처음이었을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죠. 삶이 힘들다 해서 모두 타지로 떠나지는 않을 텐데, 한국까지 올 정도면 중국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서래가 남편을 죽인 것이 처음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기도수를 죽일 때 지나치게 망설임이 없고, 오히려 잘 해내기 위해 열심히 계획을 세우잖아요.
서래는 사람을 죽이면서도 돌봄을 통해 살리는 모순적인 인물이기도 해요.
바람둥이가 매번 진심인 것 같은 느낌 아닐까요. 서래도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만들어주려고 하죠. 서래가 죽인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각자 원하는 형태로 죽음을 맞이해요. 서래는 고소 공포증이 있지만, 기도수가 산에서 죽고 싶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무서워하는 산을 울면서 올라가잖아요. 서래 입장에서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게 아니라 상대방을 생각한 거죠. 그래서 나름대로 당당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둘다 로맨스의 주인공이지만, <박쥐>의 태주와 <헤어질 결심>의 서래는 정반대의 인물 같다고 생각했어요.
태주는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서래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죠. 태주는 너무나 살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어져야만 신부의 목적이 완성되기 때문에 같이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반대로, 서래는 해준을 만나 잠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다시 죽음으로 가는 인물이고요.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서래가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 계봉석임을 밝히는 장면이에요. 시나리오에는 서래가 계봉석과 혈연으로 맺어진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역사로 생각하고 있고, "저는 당신들 누구보다도 이 땅에 살 자격이 있어요."(67쪽) 당당히 말하는 대사도 있죠.
'서래가 왜 한국에 왔을까' 고민하던 중에 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고려인 소년이 굉장히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외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가였다고 말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더라고요. 마치 귀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것처럼 참 의젓하구나, 저런 기억을 갖고 있다면 더 올바른 인간으로 자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소년이 한국에 온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그 사실에 무관심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소년에게 중요한 사실인 건 변함이 없잖아요. 그런 자부심을 서래가 갖고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았어요.
서래는 운명을 따라가는 인물 같기도 합니다. 외할아버지가 물려준 『산해경』을 필사하며 처음부터 자신이 바다로 갈 것임을 예감하기도 하고, 펜타닐 네 알을 갖고 다니며 "그거면 사라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으니까"(66쪽) 말하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해준이라는 사랑의 대상이 나타나죠.
서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지만, 해준이 나타났을 때 처음으로 어쩌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게 해준에게 죽음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또 스스로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뿌리 없이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기 때문에, 해준을 놓아주고 원래 계획대로 사라지는 걸 택했다고 생각해요.
해준(박해일)은 깔끔하고 예의 바른 형사죠. 기존의 한국 영화의 관습에서 벗어난 남성 캐릭터였는데요.
해준은 감독님이 마음속에 갖고 있는 이상적인 남성상에서 출발했어요. 제가 감독님에게 "어떤 남자가 좋으세요?"라고 물어보니 가족에게 꼭 필요한 남자가 멋있다고 생각하신대요. 아내에게 매운탕도 뚝딱 끓여주고 회도 막 뜨고. 근데 그런 남성이야말로 감독님과 가장 거리가 멀거든요.(웃음) 영화 만드는 거 말고는 많은 일에 미숙해서 제가 진짜 깜짝 놀란 적이 많아요. 여기 못을 박았으면 좋겠다고 망치랑 못을 가져왔는데 박는 곳이 유리벽이야. 아무도 감독님에게 해준 같은 모습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마음속으로는 그런 남자가 멋있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거죠. 사모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웃기고 있네?" 하는 반응이더라고요.(웃음)
영화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해준이 저렇게 가정에 충실한데 어떻게 아내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랑의 이유를 가정 내 결핍으로 만들지 않는 게 중요했어요. 흔히 결혼 제도 바깥의 사랑을 다룰 때, 많은 영화나 드라마가 배우자를 부정한 사람으로 설정하잖아요. 부부 관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가 있었다는 등 사랑을 정당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많이 만들죠. 저는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오히려 사랑스러운 배우자, 완벽한 가정에서 출발해서, 예기치 않게 닥쳐온 사랑이 그 자체의 이유와 목적을 갖고 있었으면 했어요.
그럼 해준은 왜 서래에게 끌리게 될까요?
해준의 결핍은 문명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폭력적인 세계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조건에서 비롯돼요. 해준은 안전을 유지하는 아내 정안을 만나, 안정된 삶을 지키고 조화롭게 살아가려고 한 거죠.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근원적인 특성 때문에 문명 밖의 세계에서 온 사람에게 끌리게 된다고 생각했어요. 야만이라면 야만이지만 원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죠.
해준은 배우 박해일을 만나면서 더욱 입체적인 인물이 된 것 같아요.
박해일의 연기를 보기 전에, 전 해준에게 불만이 있었어요. 해준이 서래에게 "나는 깨끗해요."라고 하잖아요. '아니, 남자가 꼭 깨끗해야 되나? 많은 특성 중에 굳이 깨끗하다는 걸 강조할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박해일의 해준을 보면 그냥 이 사람은 깨끗해 보이잖아요. 자랑이 아니라 그냥 자기 특성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인물을 죽일 때는 늘 신중하게
해준의 파트너인 경사 '수완' 캐릭터도 흥미로웠어요. 해준을 따라 근무지를 부산으로 옮길 정도로, 해준을 동경하죠.
수완 같은 남성을 늘 귀엽다고 생각했어요.(웃음) 감독님 옆에 있으면, 실제로 그런 남성들을 많이 봐요. 홍상수 영화에도 나오잖아요. 존경받는 시니어 남성을 위성처럼 따라다니는 남성들. 그건 정말 사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시나리오에서도 수완이 해준을 부르는 방식에 차이를 뒀어요. 평소엔 팀장님, 선배, 술 마시면 형. 안타깝게도 그 사랑은 영원할 수 없죠. 시니어 남성은 자신을 추종하는 남성에게 그 정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으니까, 필연적으로 실망하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도 사랑에서 시작해서 실망하고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어떤 남자, 그게 수완이었죠.
김신영 배우가 연기한 이포의 경사 '연수'도 인상적이었죠. 사투리로 대사가 완성될 줄은 예상 못하셨죠?
전혀 몰랐죠. 심지어 저는 "돌 빨았나?"는 영화관에서 못 알아들었어요. 저런 대사가 있었나?(웃음) 연수가 경찰 조직 내 왕따인 설정은 감독님이 넣었는데 절묘하다고 생각했어요. 왕따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젊은 여성이 나오니까 좋더라고요. 실제로 해외에서는 연수 캐릭터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궁금해했다고 해요.
시나리오에만 있는 디테일 중 하나는 질곡동 사건의 후일담이에요. 해준이 수완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죠. 사람을 죽일 것 같지 않았던 이지구가 오빠피씨방 아르바이트생을 죽였다고요.
그건 감독님이 추가한 설정이었는데, 저는 계속 반대했어요. "아니, 감독님 오빠피씨방 아가씨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제보를 했는데 어떻게 죽일 수가 있어요. 그렇게 앞날이 창창한 아가씨를."(웃음) 제가 살인자 주인공을 자주 쓴다고 해서, 인물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매번 신중한 편이에요.
시나리오를 쓰면서 마지막까지 고민한 부분이 있나요?
젊은 관객들이 이 이야기를 잘 받아들일까 자신 없는 순간이 있었어요. 호미산에서 서래가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165쪽)하고 말하잖아요. 이 대사를 통해, 서래가 자신의 계층적 한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젊은 여성들이 듣기에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더라고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의상팀 여성분들이 "그 대사 너무 슬펐어"하고 말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젊은 관객들도 편견 없이 대사를 받아들여주는구나 싶어서 기뻤죠.
한 인터뷰에서 송종희 분장 감독이 시나리오를 '서래와 해준의 성장담'으로 봤다고 했어요.
절묘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성장은 죽음으로 완성될 수 있겠죠.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성장일 수 있으니까요.
박찬욱 감독이 "내 영화에도 여성성, 아이다운 천진함(중략)이 있다면 그건 정서경에서 비롯한 것이다."라고 했죠. 그 말처럼 작가님은 꾸준히 새로운 여성 서사를 갱신해왔어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나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부끄러워요. 그동안 제가 잘 쓸 수 있는 것이 여성 캐릭터였고, 작가로서는 남성 캐릭터를 잘 쓰고 싶기도 하거든요.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갈증은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톰 소여의 모험』을 읽으면서 모험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누가 보호받는 여자아이가 되고 싶겠어요. 그런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이야기를 꾸준히 쓴 것 같아요. 곧 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방영되는데요. 어렸을 때 읽은 『작은 아씨들』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에서 시작한 이야기예요. 그 자매들이 현대 한국에 있으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는데 어느새 블록버스터가 되어 있더라고요.(웃음)
*정서경
시나리오 작가.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박찬욱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집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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