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소음을 이긴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Beethoven - Piano Concerto No 3 in C minor, Op 37)
어릴 때부터 치과를 하도 많이 다녀서, 참을성 부문에선 항상 선수권에 랭크되던 인간이 있었다. 바로 나다. 매복 사랑니를 네 개나 뽑은 뒤론 안 웃긴 농담을 들어도 참을 수 있고, 입안이 헐어도 매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도무지 못 참는 게 생겼다. 집 주변의 지속적인 소음이다. 겨우 시끄러운 소리가 괴롭히는 걸 못 참다니 어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지난 1년 동안 소음 때문에 글을 못 써서 이사를 세 번이나 했는데, 귀찮아 죽는 줄 알았다. 헤비메탈을 풀 볼륨으로 꽝꽝 듣고 살아온 주제에 이제 와서 소리를 못 참는 신세가 되다니. 신경 줄이 얇아진 건가? 나이 먹을수록 점점 기능이 못 쓰게 되기만 하네, 이거. 확 그냥 나이를 안 먹어 버려?
어쨌든 지금의 집은 소음 문제가 크지 않았는데 봄부터 어떤 이름도 모르는 새가 딱 내 창문 근처에서 운다. 듣기 좋은 지저귐과는 달리, 무슨 녹슨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혹은 어설픈 연주자가 싸구려 피리의 가장 높은 음을, ‘삑사리’ 내는 소리에 가깝다. 상당히 주파수가 높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절대 1초도 쉬지 않고 1초 간격으로 삑삑삑삑삑 울어댄다.
밥도 울면서 먹고 똥도 울면서 싸는 걸까? 목 안 아프나? 성대가 무슨 쇠파이프 같은 걸로 되어있는 거겠지? 아니 음색이 좀 다채롭던가. 낼 수 있는 소리가 ‘삑’ 한 개뿐이라니 안 쪽팔리니?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아아 조물주는 왜 요런 음치 같은 새새끼를 만들었단 말인가!
하지만 인간이 지구에서 다른 생명체와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건 당연한 도의이며, 벌레들을 먹어치워 주는 고마운 생명체를 향해 새총 부리를 겨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봐, 나는 가엾은 무명작가니까 부디 딱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사정하거나, 안 울기만 하면 고품격 먹이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소개팅까지 시켜주겠노라고 거래를 할 수도 없었다.
주정뱅이와 주유소 소음에 시달리다 지쳐 지금의 집에 이사 왔을 때 나는 두 가지 종류의 소음과 싸워 이겼다. 하나는 TV 소리였다. 아래층 사는 사람이 거의 풀 볼륨으로 깊은 밤까지 TV를 시청하는 것이었다. 방음이 거지같이 안 되는 저급 빌라이긴 하지만 그 사람이 뉴스를 틀어놓으면 토시 하나 안 빼고 완벽하게 들을 수 있었다. 웃고 떠드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으면 글쓰기는커녕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려가 부탁이니 제발 좀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그 사람은 착했다. 간단한 대화 한 번에 TV 볼륨을 줄여주었다. 지금은 아예 TV를 안 보는 게 아닌가 싶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다음은 집 근처 전자제품 가게의 소음이었다. 한 블록이나 떨어져 있는데 외부 스피커로 음악을 아주 그냥 인정사정없이 크게 틀었다. 그런데 선곡이 주로 질질 짜는 발라드라, 멀리서 들으면 기묘한 울음소리 같은 게 하루 종일 칭얼거리는 걸로 들렸다. ‘귀신이 곡하는 소리’ 따위를 내내 듣는 기분인 거다.
항의전화를 걸어 처음엔 정중히 부탁했고, 두 번째는 쌍욕을 했고, 세 번째는 그런 음악을 틀어 재껴서 손님을 끌 수 있다는 생각은 황망하게 저능하며, 과연 음악 저작권료는 내고 트는 건지 궁금하며, 내가 신경쇠약에 걸려 병석에 드러누우면 치료비와 보상금이 깨질 거라고 설명해줬다.
그제야 그들은 볼륨을 낮추었다. 손해는 안 보려고 하면서 피해는 왜 끼쳤던 거냐.
아무튼 새새끼에겐 통할 방법이 안 떠오르는 거였다. 어젯밤엔 새벽 5시까지 글을 썼는데 7시에 그 빌어먹을 새 우는 소리에 벌떡 깨버렸고,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
지친 고막이 건성 피부처럼 예민해져 좋아하는 프로야구 중계도 요즘은 음소거를 해놓고 본다. 응원하는 팀 응원단장 호루라기 소리가 딱 그 새소리처럼 높고 날카롭게 퍼지기 때문이다. 경기 내내 끊임없이 불어 재껴서 팀이 이기든 지든 몹시 괴롭다.
어쨌든 듣기 싫은 새소리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내 귀때기에 뭔가 씌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귀에 꽂는 귀마개로는 차단율이 20%도 안 됐고, 오래 끼면 귀만 아팠다. 외부 소리를 완벽히 막아주는 고성능 헤드폰을 사러 갔지만 너무 비싸서 심장이 마비될 뻔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크게 듣는 방법을 써봤다.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인 베토벤을 내 맘대로 듣는 건 소음일 수가 없을 테니까. 특히나 신경쇠약 직전일 때 듣게 된 오늘의 주제곡은 상당한 치유 효과와 일말의 가르침까지 줬다.
바로 요 음악이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링크한 곡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했고, 피아노는 크리스티안 짐머만이 때렸다.
이 곡의 효과는 상당했다. 일단 차분한 ‘힐링음악’으로 분류될 수 없는 곡인데 의외였다. 소음에 지친 귀때기에 들이닥치는 1악장의 알레그로 콘 브리오(힘차게 빨리)는 다른 시끄러운 소리들을 참을 수 있는 근육을 키우는 게 옳다는 듯 강하고 패기가 넘쳤다. 2악장 라르고(아주 느리게)로 넘어가면 음량이 많지 않아 새소리가 헤드폰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음에 진득한 참을성이 가득해서 뭔가를 버틴다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끼쳤다. 그에 경도되자 내 귀와 신경은 소음의 파상공세 틈입조차 신경 쓰이지 않는 상태로 편해졌다. 3악장 론도, 알레그로에서는 다시 한 번 터프한 음색이 내 귀때기 근육과 마음가짐을 복습시켜주며 마무리.
그렇다. 도피보다는 정면 돌파로 방어력을 키우는 게 옳다고 알려주는 명곡이었다. 베토벤 덕분에 새들과 나는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새소리를 못 참을 만큼 또 나약해 지면 베토벤이라는 영웅의 방패를 꺼내 들면 되는 것이다.
사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베토벤에겐 내가 지금 못 견뎌 하는 소음들도 얼마나 듣고 싶은 소리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무슨 소리든 관대하게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베토벤은 나폴레옹 때문에 전란에 휩싸여 쫄쫄 굶을 때도 음악을 만들었다. 겨우 새소리 때문에 글을 못 썼다니 어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글 박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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