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이여, 배신해다오
얼마 전의 일본 여행은 배낭 속에 챙겨간 소설 『금각사』와 소설 밖 금각사로 인해 행복했다.
노비 문장(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다른 호주머니의 담배가 손에 닿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272쪽
1.
모든 예측 가능한 것들에는 감동이 없다. “안 봐도 비됴”라면 비디오를 틀 필요가 없다.“ 안 들어봐도 뻔할 뻔자” 라면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예술의 본질은 상상의 범위 밖에서 훅하고 침범해서 툭 하고 감성을 건드리는 것이다. 사랑도 그렇지 아니한가. 같은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또 다른 우주와의 결합, 이 오묘한 즐거움이 사랑의 교묘한 기쁨이 아니던가.
여행은 집이라는 안전한 공간, 일상이라는 예측 가능한 시간을 벗어나 불확실 속으로 몸을 던지는 행위다. 누구를 만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무엇을 볼지를 모르는 그 자발적 모험에 여행자는 기꺼이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묻지마 관광’이라는 것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달리는 관광버스에서 불륜의 중년들이 부비부비하는 관광이 아니고, 참여자는 여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는 여행이 ‘묻지마 관광’이었다. 어디로 갈지, 가서 무엇을 할지를 모른 체 사람들은 집결 장소로 모여들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문득 멈춰 서서 들꽃을 바라보는 의외성, 나는 그런 여행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인터넷 하나면 여행지의 모든 것이 안 봐도 비됴가 돼 버리는 정보의 세상 속에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식상한 것’이 될 수 있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묻지마 관광’은 10년 이상 지속됐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문학 여행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가가 상상하고 그려낸 것들을 독자의 눈으로 확인하고 느껴보는 여행은 의외성 보다는 직접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입체적 즐거움을 준다. 김승옥이 묘사한 『무진기행』 속 안개,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은 안개”를 읽지 못했다면 순천의 여행은 밋밋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쫀득쫀득한 겨울 꼬막 맛” 이라는 그 관능적 문장을 미리 만나지 못했다면 벌교의 꼬막이 그렇게 특별하게 다가올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의 일본 여행은 예측을 전혀 배신하지 않은 오사카로 인해 심심했고, 배낭 속에 챙겨간 소설 『금각사』와 소설 밖 금각사로 인해 행복했다.
2.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소설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 외적인 부분에서도 흥미를 자극했던 책이다.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을 때, 그 책은 읽지도 않았고 대신 『금각사』는 읽었노라고 인터뷰 함으로써 당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또한 1970년, 도쿄 자위대 본부를 점거하고 자위대의 봉기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할복 자살한 작가의 정신 사나운 죽음 역시 국제적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50년 21세의 학승, 하야시 쇼켄에 의해 벌어진 금각사 방화 사건을 모티브로 쓰여진 『금각사』는 탐미문학을 이야기 할 때 늘 첫 손가락에 꼽히는 소설이다. 아름다움을 최상의 가치로 보고 모든 것을 미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예술 사조에 작가의 문체와 주제와 스토리가 완전하게 병합된다. 소설 속에서 금각사는 미의 원형이며 완성체다.
몸도 약하고 선천적 말더듬이 증세를 가진 주인공 미조구치는 세상과 단절되고 관계에서 고립된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미조구치가 그 열등감과 고독을 해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남에게 이해 받지 못할 행동이나 위악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 하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들었던 금각사를 절대적인 미의 상징으로 설정하고 때때로 금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하며 현실에의 위로와 미래에의 구원을 공상하는 것이다.
1944년 전쟁말기에 금각사의 도제가 되면서 금각과의 관계는 더 친밀해지고 밝은 성격의 ‘쓰루카와’, 영악하고 현실적인 ‘가시와기’ 등과의 교제를 통해 주인공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간다. 그러면서도 금각은 그의 성장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그와 관계된다. 자신이 추한 만큼 그 보상심리로 금각은 더 아름다워 보였다가, 공습으로 금각이 부숴지는 상상을 하며 자신의 죽음과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금각과의 연대와 동료의식이 깨지기도 하고 영원히 소유하겠다는 소유욕이 생기기도 한다.
환장할 일은, 여자와의 결정적 순간에 꼭 금각이 환영으로 등장해서 산통을 깨버리는 것이다.
“위엄으로 가득한, 우울하고 섬세한 건축, 벗겨진 금박을 여기저기에 남긴 호사(豪奢)의 주검과도 같은 건축, 가까운가 싶으면 멀고, 친하면서도 소원하고 불가사의한 거리에, 언제나 선명하게 솟아있는 그 금각이 나타난 것이다. (133쪽)”
나는 저 문장을 보면서, 금각사가 정말 보고 싶었었다. 팔팔한 청춘의 하초 기립마저 일순간에 풀죽게 하고 여인들에게 벗은 옷을 다시 주워 입게 만들었던 금각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것은 대체 어떤 것인지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게다가 답사계의 레전드, 유홍준 선생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일본편 4 - 교토의 명소>에서 금각사를 청수사와 함께 교토 관광의 양대 메카라고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표현하여 금각사로 향하는 나의 발길을 더 재촉했다.
"눈발 속에서 빛나는 금각은 마치 흰 사라(紗羅)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연상케 했다. 그것은 '시각적 관능미'였다. 그러나 범접하기 힘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시각적 관능미'” (151쪽)
나는 가끔 유홍준 선생이 홈쇼핑 채널에 나와 해남 고구마나 영주 도너츠 등을 팔면 대박이 날 거라는 공상을 하고는 하는데, 그만큼 답사기 속에서 선생의 글은 배낭을 꾸리게 만드는 삐끼력이 만랩이다.
실제로 본 금각사는 황홀했다. 경호지란 이름을 가진 호수 위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3층 누각 건물은 오래 오래 시선을 머물게 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주인공을 집착하게 만들고 파괴적으로 탐닉하게 만들었던 그 무엇을 당연히 나는 교감할 수 없었다. ' 몽상에 의하여 성장한 것이 일단 현실의 수정을 거쳐, 오히려 몽상을 자극하게 되면서' 그 미적 완성도를 더해가는 것은 미조구치의 금각사였지 나의 금각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금각사를 찬찬히 보고, 경내를 여기 저기 산책하며 소설의 스토리를 복기하는 즐거움은 미조구치도 누릴 수 없는 나의 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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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노사의 배려로 대학에 진학하지만 노사의 미움을 살 짓만 골라하는 미조구치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나 여기에 있다고, 나 좀 봐달라는 신호로 그는 금각을 불태워 버리려는 결심을 한다. 그 결심을 하고 나서야 유곽에서 여자를 제대로 품을 수 있었다. 그는 방화 후 자살을 하려고 수면제와 단도를 구입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는 임제록의 구절을 떠올리며 방화를 실현한다. 부처를 죽이라는 것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모든 사상, 철학, 윤리, 관습 등에서 자유로워지라는 것이다. 너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의 평생을 따라다니던 금각이라는 신화를 그는 전소시킨다. 말더듬이라는 실존을 당당하게 인정하기 보다는 늘 금각의 뒤로 숨었던 자신의 피신처를 불 태우면서 소설은 이제 마지막 한 페이지만을 남겨둔다.
사람들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 눈의 고장이었다” (설국) 라든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카레리나),“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방인) 등을 예로 들며 소설 속 첫 문장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금각사의 마지막 문장을 보며 전율한다.
“호주머니를 뒤지니, 단도와 수건에 싸인 칼모틴 병이 나왔다. 그것을 계곡 사이를 향하여 던져 버렸다. 다른 호주머니의 담배가 손에 닿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 예측을 통쾌하게 부수는 마무리였다. 나는 실제 방화범이 그랬던 것처럼,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이 자살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자신의 어둠이자 빛이자 분신이었던 것을 소멸시키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담배 한모금 피우는 사람의 가벼움으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은 삶을 선택한다. 허무할 정도로 가벼운 이 반전 앞에서, 그리고 저 새털처럼 가벼운 문장 앞에서 나는 예측에 배신 당한 쾌감을 즐기고 있었다.
3.
교토는 설령 금각사가 아니더라도 잘 묵혀진 시간의 흔적으로 매력적인 도시였고 나라는 한 손에 꽉 잡힐 듯 공간이 압축적이어서 좋았다. 오히려 나는 오사카에서 지루했다. 작년에 한국인 여행자가 가장 많이 간 도시 1위가 오사카라고 한다. 저가 항공사가 취항하면서 특히 자유여행자들이 오사카를 많이 찾는다. 도톤보리, 신사이바시, 난바 등을 걷다 보면 한국인들이 너무 많아 여기가 명동인지, 한국인지 모를 정도다. 도톤보리의 돈키호테 잡화점은 한국사람들이 점령을 했고, 유명한 라면집, 오코노모야끼집, 타코야키 집에도 역시 한국인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행의 취향도 입맛처럼 나이에 따라 변하는가 보다. 딱 십오 년 전에 밤 도깨비 여행으로 도쿄를 다닐 때는 구석구석이 그렇게 재미있고 음식들은 어찌나 맛있던지 다리 아픈지도 모르겠더니, 십오 년 후의 오사카에서 나는 전혀 신명이 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일본 라면과 일본의 음식, 그리고 인터넷에서 주문이 가능한 잡화점 들에 도대체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더운 태양 아래, 명동 거리를 하루 종일 다니라고 한다면 당장 손사래를 치는 것처럼, 나는 - 비록 싸다고는 하지만 - 어쨌든 자기 돈을 내고 와서 이 감흥 없는 자본의 거리를,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범용의 도시를 다니는 젊은 여행자를 보며, 그들의 여행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10만원도 되지 않는 국제선 항공료 이벤트에 서버가 다운되고, 젊은이들은 우동 한 그릇 먹기 위해 해외를 나가는 세상이다. 그런데 나는 앞으로도 이러한 행렬에 동참하지는 않을 것 같다.
최소한 나는 소설 『금각사』의 마지막 페이지와 같은 반전의 여행지를 꿈꾼다. 실제 <금각사>의 입장권처럼 일반적인 예측을 배신하는 것들을 여행지에서 자주 만나고 싶다. 책과 여행은 공히 뒷통수를 때리는 놈들이 좋다는 것, 이번 여행에서 정확하게 확인한 독서의 취향, 여행의 취향이다. 다행이다. 노안 이후의 이런 기호를 확실히 할 수 있어서.
금각사만큼 멋스런 금각사 입장권 |
글 |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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