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지옥,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
연상호 감독·최규석 작가 합작 만화 『지옥 1』 출간
“너는 5일 후 15시에 지옥에 간다.”
어느 날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불특정 인물들에게 지옥행을 고지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영화 <부산행> <반도>의 연상호 감독과 만화 『송곳』의 최규석 작가가 의기투합해 만들어 낸 기묘한 세계 『지옥』은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오랜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다가 작품을 기획했다고 한다. 연상호 감독이 구축한 세계는 최규석 작가의 손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태어났다.
지옥에 갈 것을 고지 받은 자들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죽음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예고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누군가는 지옥의 사자들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되는 사회. 이 혼란의 중심에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옥행 사례를 연구해 온 ‘새진리회’의 정진수 의장이 있다. 그는 지옥에 간다는 선고가 정의롭지 않은 인간을 향한 신의 경고라고 말한다. 눈앞에서 사람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은 새진리회에 열광하고 지옥행을 앞둔 사람들에게 죄를 물으며 참회를 강요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죄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직 결말이 밝혀지지 않은 『지옥』의 첫 번째 이야기가 책으로 묶였다.
최규석 감독, 연상호 시나리오의 이야기
책은 출간 이후에 본격적인 행사들이 진행되는데 반해 영화는 개봉 전에 홍보 일정을 소화하느라 더 바쁠 것 같다. 개봉 당일의 기분은 어떤가. (인터뷰는 연상호 감독의 새 영화 <반도> 개봉일에 진행됐다)
어제까지 수십 군데 언론사와 인터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실시간으로 관객 데이터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웃음) 흥행에 대한 부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늘 하던 일이라 이제 일상이 된 것 같다.
오늘은 『지옥 1』에 대한 인터뷰다. 오랜 친구인 최규석 작가와 공동으로 작업한 작품인데.
최규석 작가와는 아주 옛날부터 제일 친한 친구 사이다. 하루에 3~4번씩 통화를 하다 보니 “너희 사귀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웃음) 그런데 결혼해서 애 낳고, 서로 바빠지다 보니 만날 일이 없는 거다. 재작년쯤인가 같이 맥주를 마시다가 “우리가 같이 작업을 하면 좀 자주 보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와서 함께 작업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돼지의 왕>을 냈을 때쯤, 최규석 작가가 인터뷰 등에서 다른 작가와 작업을 한다면 누구와 하고 싶냐는 질문에 “연상호 감독과 하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그런데 사실 같이 작업한 작품은 인권위 기획 『사이시옷』에 수록된 단편만화 「창」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처음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최규석 작가의 작업실 근처 만화방에서 그간 구상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부적인 스토리를 잡아 나갔다.
단편 애니메이션 데뷔작인 <지옥: 두 개의 삶>이 모티프가 되었다.
이야기의 베이스를 거기에서 가지고 왔다. 최규석 작가와 함께 작업하자는 대화를 나눴을 때 <지옥: 두 개의 삶>으로 뭔가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었다. 최규석 작가가 예전부터 그 작품을 좋아했다.
작업하면서 <지옥: 두 개의 삶>의 시나리오를 썼던 시절이 많이 떠올랐겠다.
<지옥: 두 개의 삶>의 첫 번째 이야기인 <지옥 part.1>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쓴 시나리오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나리오라는 걸 써본 셈인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 완성도를 떠나 그 설정 자체는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아이디어를 다시 살려보고 싶었다. 그땐 어떤 느낌만 있었지 작품을 만든다는 거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취향만 존재하는 상태였다.
친한 친구와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땠나.
어느 투자자보다 힘들더라. 짜증나 죽는 줄 알았다.(웃음) 최규석 작가와는 워낙 말이 잘 통하고, 작품적으로도 취향이 맞아서 작업하는 게 수월할 줄 알았는데 같이 작업해보니 상당히 까다로웠다.(웃음) 중간에 아예 갈아엎고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도 했다.
어디서 의견 차이가 있었나.
『지옥』이 1,2부로 나뉘어 있는데 사실 초반 시나리오는 2부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보니 ‘애초에 이런 세계가 있다’는 가정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다 쓰기까지 3~4개월쯤 걸렸나. 완성해서 메일을 보내고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한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한참 뒤에 연락이 온 거다. “이렇게 하면 안 될 거 같다”고.(웃음) 최규석 작가는 이런 세계가 등장하게 된 사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을 줬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했지. “장난하냐? 그걸 왜 지금 얘기해?”(웃음) 결국 다시 썼다. 원래 2부에 있었던 이야기가 1부에 많이 반영됐다.
예상했던 것과 반대다.(웃음) 시나리오를 쓴 사람의 영향력이 더 클 거라 생각했는데.
영화로 따지면 이 작품은 최규석 작가가 감독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시나리오만 쓰면 그만이지만 그걸 연재하는 입장에서는 혼자 연기도 하고, 연출도 하고, 무대 디자인까지 다 해야 하는 거다. 그리고 최규석 작가는 작품의 내용과 주인공의 감정을 완벽히 이해해야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더라. 전화가 엄청 많이 왔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어떤 감정이냐고 물어보고, 본인이 생각할 땐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의견을 많이 줬다. 최규석 작가가 작업하는 걸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무엇이 부러웠나.
모든 걸 혼자서 다 창조해야 하지 않나. 예를 들어 ‘새진리회’의 공간이라고 하면 그게 어떤 분위기인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등을 다 생각해야 한다. 말 그대로 혼자 배경 디자인, 배우의 표정, 화면의 구도 등 모든 걸 만들어내야 하는 거다. 나는 영화 작업을 오래 해서 그런 게 부러웠다. 영화는 외부 자본도 많이 유입되고,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수많은 사람과 협업한다. 배우와 소통도 해야 하고. 그런데 만화는 약간 개인 사업을 하는 느낌이었다.(웃음) 그래서 이번 작업을 하면서는 마음이 편했다. 만화를 연재하는 플랫폼에서도 작품을 관리하긴 하겠지만, 영화만큼 콘텐츠에 디테일한 관여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말 그대로 둘이 장사하는 느낌으로 작업을 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상상했던 장면이나 캐릭터가 최규석 작가의 손을 거쳐 그림으로 나왔는데 첫 화를 보고 어땠나.
나는 최규석 작가의 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오랜 팬이기도 해서 그의 만화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만든 이야기가 최규석이라는 걸출한 만화가를 통해 그려진다는 게 좋았다. 물론 내가 작업하는 방식과 조금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내 이야기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연출자에 의해 재해석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옳은가
『지옥』이란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무척 이성적이지 않나. 그런데 알 수 없는 어떤 계기를 통해 순식간에 야만의 세계로 돌아가 버리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때 ‘야만의 세계로 가게 되는 원동력이 인간의 이성이라면 어떨까’라는 게 첫 시작이었다. 그 이야기를 미스테리 스릴러로 보여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두 존재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공권력’, 하나는 ‘신’이다. 공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형사가 주인공이 됐다.
지금은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사회다. 공권력이 아닌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공권력의 상징이면서 장르적으로 스릴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물을 생각했을 때 형사라는 직업이 적합했다. 형사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지옥행을 고지받는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방식으로 죽는다.
명확한 이미지를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새로운 현상으로 인해 동요하려면 마치 심판처럼 보일 명확한 액션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 현상을 해석하는 건 사람들의 몫이지만, 어쨌든 보편적으로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텐데, 그걸 명확한 이미지로 보여준다면 집단 광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새진리회’를 이끄는 정진수 의장의 대사들이 인상적이다. ‘정진수 의장 때문에 새진리회에 가입하고 싶다’는 리뷰도 많았는데, 대사를 쓸 때 공을 많이 들였을 것 같다.
정진수 의장만이 가진 논리가 분명히 있다. 보편적 다수, 평균적인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진수의 논리가 확실하게 존재하는데, 특별히 고민을 많이 했다기보다는 ‘내가 정진수 의장이라면 어떤 말을 할까?’라는 관점에서 대사를 많이 썼던 것 같다.
새진리회를 열성적으로 추종하며 사람들을 선동하는 ‘화살촉’ 집단은 원주민 분장을 하고 있다.
원초적인 기원 같은 느낌이 필요했다.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세계 말이다. 새진리회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성으로 지어진 세계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원시적인 느낌을 주고 싶어서 아프리카의 주술적 의미를 가진 분장들을 생각했다.
등장인물은 대부분 가족을 중심으로 딜레마를 겪는다. 여러 가족관계 중에서도 특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특별한 의미가 있나.
아무 의미 없다.(웃음) 그저 보편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기본 단위가 가족이고 특히 부모와 자식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주인공이 딜레마에 빠지는 게 속도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분들이 사소한 부분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절대 사소한 부분에 무언가를 숨기지 않는다.
애니메이션 <사이비>에서도 종교, 사후세계 등의 이야기를 다뤘다. 평소에 종교나 죽음 등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인가.
거의 안 한다.(웃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끌어오기에 종교가 좋은 소재인 건가.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나약한 면도 많고, 뭔가에 기대고 싶어 하고. 비단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살기도 하는데 이건 불안, 확실치 않음에 대한 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게 가장 큰 이슈인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면에 뭔가가 존재한다는 느낌말이다. 그게 음모든 신이든 이데올로기든.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종교인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업계가 종교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대부분의 업계가 종교화되어 있다고?
예를 들자면 영화도 그렇다. 영화 찍으면 흥행하라고 고사 지낸다.(웃음) 특정한 뭔가를 해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는 막연한 믿음이 존재하는 거다. 그걸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지 모든 분야에서 맹신하는 게 있다. 종교인들도 자기가 뭔가를 맹신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종교를 믿지 않나.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다.(웃음) 왜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보면 알겠지 뭐’라는 입장이다. 얼마 전에 마이클 조던의 다큐멘터리를 재미있게 봤는데, 마이클 조던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는 절대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운동을 열심히 할 뿐이지 오늘 이길지 질지 같은 거에는 신경을 안 쓴다는 거다. 그런 태도가 인상적이다.
일주일 뒤에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받으면 그사이에 뭘 할 것 같나.
변호사를 만나야지. 저작권에 관련된 것도 조정해놔야 하고, 앞으로 하기로 한 작품도 있는데 일주일 뒤에 죽으면 못하지 않나. 그럼 계약금을 어떻게 할 건지 다 정리를 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곤 사토시’ 감독이 췌장암으로 40대에 죽었는데, 본인이 죽기 전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한 걸 본 적이 있다. 엄청 정신없이 보냈더라. 일주일이면 쉴 틈이 없다.(웃음)
현재 『지옥』 시즌2 18화까지 공개됐다. 언제 완결될 예정인가?
아마 8월 중에는 끝날 것 같다. 일단 최규석 작가와 같이 기획한 건 2부까지였기 때문에 시즌2로 작품이 완결될 거다. 그런데 이런 세계관의 작품은 얼마든지 다른 에피소드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후속작에 대한 가능성이 아예 닫혀있는 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야기도 얼마든지 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 이번 작품으로 『지옥』의 세계가 끝난 게 아닌가?
영원히 안 끝날 거다. 평생 하는 게 목표다.(웃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도 선보여질 예정이다.
지금 촬영 중이다. 넷플릭스는 전 세계 언어로 번역을 해야 하는 등 세부 작업이 많아 아마 내년 하반기쯤 방영될 것 같다.
웹툰을 드라마로 만드는 작업인데, 무엇을 가장 신경 쓰고 있나.
영상화했을 때 자연스럽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도다. 크게 만화와 다른 느낌을 주려 하진 않고 있다. 최규석 작가의 연출 방식 자체가 무척 영화적이기 때문에 그걸 잘 살리려 한다. 다만 촬영을 하다 보니 『지옥』이 꽤 까다로운 작품이더라. 등장인물 ‘박정자’ 집을 구하러 한 달을 돌아다녔다. 만화에 구현된 모습을 영상으로 찍으려면 비슷한 공간이 필요한데, 지옥에 가는 모습을 시연하는 장면을 찍으려면 벽을 다 헐어야 하지 않나. 그런 데가 어디 있냐고.(웃음) 그래도 다행히 겨우 구했다.
웹툰은 공개되는 즉시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린다. 특히 『지옥』은 구독자들 사이의 토론도 활발한데, 댓글도 보나.
최규석 작가는 만화 그리느라 시간이 없어서 댓글을 아예 안 보고, 나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본다. 개별 의견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편은 아니고, 전체적인 분위기만 파악하는 정도다.
작품이 기억되는 게 중요하다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 그래픽노블, 드라마, 웹툰 등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작품을 선보인다. 경계 없이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뭔가.
프리랜서라 그런 것 같다.(웃음) 사실 프리랜서들은 어떤 직업이 있다고 얘기하가기 좀 애매하다. 말 그대로 일이 있으면 일을 하고, 없으면 못 하는 거니까. 그런 관점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기회가 닿으면 이것저것 다 해보고 있다. 일단 하다 보면 뭔가 더 나은 게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했던 것 같다.
여러 플랫폼을 넘나들면서 오는 두려움은 없나.
작품을 할 때마다 압박감은 있다. 나에게 제안을 해준다는 게, 내 마음대로 아무거나 만들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려면 힘이 들긴 한다. 그런데 그건 플랫폼을 옮겨가며 생기는 게 아니라 영화만 주구장창 해도 갖게 되는 두려움이다.
연상호 감독을 이야기할 땐 늘 ‘대중성’과 ‘작품성’ 양쪽의 평가가 공존한다.
작품이 새로 나올 때마다 ‘이게 진짜 연상호가 맞냐. 내가 아는 연상호는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건 작가로서는 행운인 것 같다. 어떤 논란 혹은 격렬한 반응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작가에게 좋은 일이다. 다만 “진짜 연상호는 뭐냐”고 많은 분들이 묻는데, 나는 작품에 내 진짜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웃음) 그리고 내가 대표해서 인터뷰를 하긴 하지만, 모든 작품은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나가는 거기 때문에 그 평가가 꼭 나만을 향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평가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진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가장 부합하는 건 어떤 작업이라고 생각하나.
나이를 더 먹으면 만화를 하고 싶다. 만화는 개인적인 작업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혼자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싶다.
협업에 지친 건가?
그건 아니고, 여러 명이 하는 일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화를 찍고 있지만, 언젠가는 아무리 영화를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되는 날이 올 수 있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여건이 생겼지만, 이게 평생 가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다.
창작자는 무엇보다 대중의 시그널을 잘 읽어야 한다. 대중이 매력을 느낄만한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있나.
플랫폼을 이해하려고 한다. 웹툰, 영화, 드라마, 넷플릭스 등 다 같은 대중인 것 같아도 각 장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다른 것 같다. 내가 가진 이야기가 어느 플랫폼에 어울릴지를 주로 생각하는 편이다.
플랫폼에 따라 팬들의 반응도 다른지 궁금하다.
팬…? 팬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무슨 의미인가?
팬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이 만났는데, 팬을 본 적은 없다. 그냥 영화 한 번 봤으면 팬이라고 하는 거지. 기자들도 인터뷰하면 “팬이에요”라고 자주 말하는데, 팬은 무슨.(웃음) 나는 진짜 팬의 모습을 안다. 정치인들의 팬도 봤고, 같이 촬영하는 배우들의 팬도 봤다. 그런 게 팬이지, 작품 한 두 개보면 다 팬인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웃음) 그럼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
사실 별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내가 아니라 작품이 기억됐으면 좋겠다.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나에게 팬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대 내 팬이 아니다. 내 작품의 팬인 거다. <돼지의 왕>의 팬이니까 <부산행>을 욕하는 거고, <부산행>의 팬이니까 <염력>을 욕하는 거다. 사실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한다.(웃음) 작품을 만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전면에 나서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작품이 기억되는 게 중요하다.
웹툰이 곧 결말을 앞두고 있다. 『지옥』의 최종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 것 같나.
넷플릭스 측에서는 결말을 알지 않나. 시나리오를 다 보고서는 “이 다음에는 어떻게 되냐”고 묻더라. 그래서 “끝인데요?”라고 했더니 이대로 끝내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웃음)
『지옥』을 책으로 만나 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만화책을 되게 좋아하는데 『20세기 소년』을 봤던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다. 친구가 그 만화를 추천하길래 재밌냐고 물었더니 만화방에 가서 딱 두 권만 빌려보면, 나머지 다 빌리게 될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정말 두 권을 빌려본 뒤, 바로 달려가 나머지를 다 빌려왔다. 『지옥』이 그런 경험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으로 출간된 『지옥』은 내가 동경하는 만화책이라는 것에 가장 근접하는 상태다. 너무 좋아하는 형식이고, 좋아하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그걸 잘 즐기셨으면 좋겠고, 아직 2권이 나오지 않은 상태인데 2권을 기다리게 되는 책이길 바란다.
글 | 성소영 사진 | 한정구(HANJUNGKU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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