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가 된 후, 삶이 몰라보게 쉬워졌다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아주 오래전 한 선배의 심부름으로 그녀의 책상 위에 있는 자료를 뒤척인 적이 있다. 그러다 우연히 그녀의 신혼여행 계획표를 보게 되었다.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선배는 꼼꼼한 성격답게 결혼 준비도 야무지게 하고 있었는데, 그 계획표에는 주로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첫째 날
아침 : 흰색 니트 원피스
점심 : 빨간색 비치웨어 세트
저녁 : 검은색 이브닝드레스
둘째 날
아침 : 하늘색 민소매 티셔츠 미니스커트
점심 : 도트무늬 비키니
저녁 : 플라워 원피스
신혼여행에서 어떤 옷을 입을지 빽빽하게 적힌 그녀의 계획표. 심지어 이 계획표에는 어떤 신발을 신고 어떤 가방, 액세서리 등을 매치하면 좋을지도 세세히 적혀 있었다.
이 계획표를 본 나의 소감을 솔직히 말하면, 충격 그 자체였다. 여자의 여행이란, 원래 이렇게나 신경 쓸 게 많은 일이었던가? 솔직히 이 선배처럼 작정하고 계획표를 만드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자들의 여행은 확실히 남자들의 여행보다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여자들은 가방 하나를 꾸리는데도 패션쇼 버금가는 옷들을 챙기고, 화장품을 더하고, 거기에 선글라스나 모자도 빠뜨리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여행 출발 전부터 일정을 최대한 빼곡히 짠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구경할지, 어느 음식점에서 어떤 걸 먹을지, 돌아올 땐 뭘 사올지, 그야말로 정보와의 전쟁이다. 일주일만 머물 뿐인데 한 달짜리 일정을 소화할 기세다. 일상에서의 일탈, 휴식의 결정체라 말하기엔 여자의 여행은 너무 복잡하다.
이뿐만 아니라 여행을 떠난 사람은 많은데, 이상하게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행 준비부터 시작해 여행 도중에도 내내 이어지던 생중계가 여행이 끝나면 뚝 끊긴다. 굳이 소식을 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행을 통해 변화된 일상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이건 장기 여행을 다녀온 사람도 마찬가지다. 용기를 내어 세계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은 많다. 그 덕분에 이제 우리는 책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그들의 여행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모두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아주 유명한 여행 작가가 된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는 ‘여행 이후의 삶’이 ‘진짜 여행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복잡함을 환기시키고자, 새로운 생각을 얻어보고자, 삶의 변화를 느껴보고자 떠나는 게 여행인데 어째서 사람들은 여행 후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이 책에서 나는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자도 얼마든지 쉽고 단순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여행을 통해 어떻게 삶의 모습이 달라졌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세계 여행을 떠났을까? 나는 10년 가까이 방송을 한 아나운서였지만, 월급을 받는 평범한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늘 피곤하고, 골치 아프고, 처리하기 버거운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삶을 지속시킬 자신이 없었다.
이런 삶을 살고 있던 건 10년째 월급쟁이인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좀 더 본질에 집중하는 단순하고 쉬운 삶을 꿈꾸게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1년간의 세계 여행을 위해 회사를 떠나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미국 횡단을 시작으로 남미와 아프리카, 중동, 유럽을 1년 동안 자유롭게 여행했다. 335일 동안 35개국을 다녔고, 130여 개가 넘는 도시에서 잠을 잤다. 그 기간만큼은 정말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았고, 이 여행은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렇다면 여행을 모두 마친 지금의 삶은 달라졌을까? 변화가 있다면 어느 정도일까? 나는 이 질문에 아주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본질에 집중한 심플한 여행은 내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고, 복잡했던 일상이 거짓말처럼 쉬워졌다고 말이다.
알다시피 장기 여행자의 짐은 매우 간소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짐들을 끌어안고 살아왔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또한 없으면 당장 큰일 날 것 같은 물건들도, 막상 없어도 사는 데 별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간소한 짐과 함께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나날, 먹고 자는 문제를 매일매일 고민하고, 다른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다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 속에서 여행은 자연스레 ‘단순한 삶’의 축소판이 된다.
약 1년간의 장기 여행을 통해 나는 일상에서도 여행하듯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여행을 아예 내 삶으로 끌어들였고, 내 삶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과감히 쳐냈다. 내가 여행 후 가장 먼저 했던 일도 집에 있는 수많은 짐들을 정리하고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심플 라이프스타일을 내 삶의 방식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독자 여러분께 복잡한 삶과 멀어지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화려한 여행 이야기는 쏙 빼버리고, 모두가 느껴봤으면 하는 ‘일상의 여행’에 대해서 말이다.
단순하고 쉬운 삶을 찾기 위해 누구나 회사를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없다. 일상에서도 여행자의 삶을 유지하는 법, 나는 이 책에서 그 방법을 전하려 한다.
나는 원래 여행을 싫어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을 불변의 진리처럼 여겼다. 여름휴가가 주어져도 특별히 어디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고, 여행 책이나 여행 관련 방송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여행할 줄 아는 여자’가 되어 돌아왔다. 정말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여행 초반, 나는 모든 게 어설펐다. 여행자에게 필요한 짐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지도를 보는 법도 잘 알지 못했으며, 다음 여행지로 가는 교통편을 해결하는 일도 힘에 부쳤다. 많은 것이 고생스러웠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여행을 잘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행을 잘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대신, 진짜 여행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짐은 최대한으로 줄이되 예전에는 느끼기 어려웠던 행복과 만족, 즐거움과 낭만, 평화와 여유 등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를 누리며 마음만큼은 늘 풍족함을 유지했다. ‘어디에 가면 반드시 무슨 사진을 찍어야 한다’, ‘어느 도시에서는 꼭 이 기념품을 사야 한다’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나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여행 일정을 채워나갔다.
여행에 필요한 건 테크닉이 아니었다. 여행의 기술 같은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한 여행자가 될 수 있었고, 여행지를 잘 모른다고 여행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직접 겪어보니, 여행은 여행자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발길 닿는 대로, 마음이 머무는 대로 이동하는 동안, 인생도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마음을 새로운 감정으로 채웠고, 변화된 내면은 삶의 태도까지 변화시켰다. 항상 심각하기만 한 나였는데, 온전한 여행자로 살게 된 뒤로는 내 어깨를 짓눌렀던 삶의 무게를 점점 덜어낼 수 있었다.
사실 여행을 떠날 당시에는 ‘알뜰하게 여행하는 방법’이 내 주된 이야깃거리가 될 거라 생각했다. 나는 이미 나의 첫 책 『여자의 습관』(다산북스)에서 절약과 저축의 생활재테크에 관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따라서 세계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돈을 아끼며 여행할 수 있는 노하우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알뜰한 여행의 방법을 터득하긴 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날 무렵,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라져 있었다. 알뜰한 여행의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복잡한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만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복잡하게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더 이상 무언가를 추가하고 싶지는 않다. 획기적이고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기 전에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것들을 과감히 끊어내는 게 먼저다. 그러고 나서 기존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서로 연결하고 그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할 때 내 고유의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다.
나도 여행 전에는 이런 변화가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나는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도 이렇다 할 문제없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증거’가 되고 싶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아침을 맞았을 때의 그 설렘으로 매일을 감사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정은길 저 | 다산3.0
29살에 1억을 모아 내 집을 마련한 생활재테크 이야기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여자의 습관』의 저자, 정은길 아나운서의 두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첫 책에서 밝혔듯이, 정말로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나 약 1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생활재테크의 달인답게 ‘알뜰하게 여행하는 방법’이 주된 이야깃거리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알뜰한 여행의 기술보다 ‘복잡한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만들어가는 법‘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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