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된 사내, 김영갑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로 137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우도에서 빠져나와 성산항에 도착하자 허기가 밀려왔다. 머지않아 해가 저물 터인데, 일행 중 누군가 두모악으로 향하자 말했다. 나는 두모악은 물론이며, 그곳을 만든 김영갑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저 나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그런 곳이길 바랐다. 자동차로 삼십 여분을 달리니, 폐교가 나왔다. 그곳은 내가 기대하던 식당이 아니었다. 한 사내가 만든 사진 갤러리였다.
영갑이라는 사내
영갑이라는 사내가 있다. 그가 남긴 사진은 나를 제주로 단번에 데려가 준다. 갈대를 스치는 바람과 바위를 적시는 파도와 새벽을 밝히는 여명과 아스라이 보이는 수평선의 반듯한, 그 반듯한 경계를 눈으로 따라가 본다. 어느덧 그와 함께 섬을 산책하는 기분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눈으로 읽고 입으로 곱씹고 귀로 듣는다. 섬의 사진을 통해 그와 같은 눈높이에서 같은 바람을 맞고 같은 빛을 쬐며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결국 섬에는 그와 내가 함께 있다. 하지만 내가 잘 알게 된 그는, 한 줌의 흙이 되어버렸다. 한 송이의 꽃이 되어버렸다. 한 아름의 나무가 되었다. 한 장의 사진이 되었다. 그 섬에는 그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섬에는 그가 있다.
여기, 섬에 홀려 마침내 스스로 섬이 된 한 사내가 있다. 그는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서울에 주소지를 둔 평범한 청년이었다.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중에 그곳에 매혹되어 1985년부터는 아예 섬에 정착했다. 가족도 친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섬의 모든 것을 필름 속에 기록하는 일이 살아갈 유일한 이유가 되었다. 가난한 사진작가가 혈혈단신으로 섬 생활을 시작했으니,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을까.
그 시절 섬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든 낯선 사내가 기웃거리는 모습은 수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4?3사건의 비극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제주도의 노인들에게 ‘뭍의 것들’이라 불리며 의심을 사기도 하고 홀대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노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 했으며, 그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유일한 재산인 필름과 사진 장비가 홍수에 잠겼을 때도 제주도의 자연을 원망하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분명 오고야 말 ‘그날’을 위해, 냉가슴으로 사진만을 짝사랑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토박이 버스기사인 병선 씨와 친구가 될 수는 있어도, 육지의 지인들은 한사코 만나지 않았다.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이 되었지만, 정작 어머니의 제사와 형제의 결혼식에는 가보지 못했다. 제주도가 변방이던 시절부터 땀과 눈물로 섬 생활을 연명한 토박이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오름을 오르고 갯가를 쏘다닐 뿐이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들판 위에 서서 나무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곤 했다. 제주도의 바람을 포착해내려 몇 날 며칠이고 한 장소에 서 있곤 했다. 해가 지고 난 뒤에도 꺼져가는 한줄기 빛을 잡아내려 어둠 속을 헤매곤 했다. 그렇게 그는 제주의 맨얼굴을 발견했을 때야 비로소 셔터를 눌렀다.
창과 틀
사진은 그의 마음과 통하는 유일한 창이다. 날선 모서리에 비해 사진의 면적은 온기로 가득 차 있다. 6X17의 파노라마 사진은 그가 오래도록 섬을 찍어오다, 언젠가부터 고수하게 된 틀이다. 세로에 비해 가로가 세 곱절이나 긴 프레임은 시야의 최대각처럼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틀 자체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짐승의 허리처럼 완만하게 굴곡진 오름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고, 작은 물고기가 꼬리를 흔들며 헤엄을 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지만 그가 선택한 최고의 창문인 셈이다. 그는 필름이나 렌즈도 하나만 고집한다. 수평선을 프레임의 중앙에 놓고, 위는 하늘, 밑은 바다를 찍는 것이 그의 촬영 방법이다. 쉬워 보이지만 누구도 그를 따라할 수 없다. 그는 아무리 익숙한 풍경일지라도 새롭게 바라보려고 평생을 노력한 작가이다. 그렇게 자연을 바라보다보면 훌륭한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바람도 사라진다고 한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 그는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몰입의 황홀함, 그가 사진을 찍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도 그 섬에는 그가 있다
그는 어느 날부턴가 이유 없는 통증을 느꼈고, 나중에는 카메라를 들지도 못하게 되었다. 근육이 점점 퇴화하는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는 그토록 좋아하는 사진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에 상심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찍어야 할 제주가 남았으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전국에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심신은 지쳐버리고 몸은 상해가고 있었다. 결국 찾아오는 것은 허무였다. 그는 치료를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남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한 방책일 뿐이었다. 처음 제주로 떠나왔던 때를 회상하며, 그는 병과 맞서 싸울 것을 다짐했다.
그는 제주의 한 폐교를 임대해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라산의 옛 명칭인 ‘두모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면, 가진 작품들을 제주 속에 또 한 번 녹여내는 일을 하고자 결심한 것이다. 혼자서는 숟가락을 들 힘도 남지 않았지만 돌담을 쌓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근육은 점점 퇴화했지만 그럴수록 악착같이 공사에 전념했다. 그는 영혼과 열정을 바쳐서 제주 속의 제주를 만들어갔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책을 통해서 처절한 투병의 시간을 살필 수 있었다. 가족에 대해 말해야 했을 때, 특히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저도 그는 제법 흐트러짐 없이 해내고 있다. 그는 가족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 고백은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말로 읽힌다. 그의 글에는 지나온 시간의 공백과 공허가 드러난다. 문단의 행간, 문장과 문장 사이의, 침묵의 여백으로밖에 드러낼 수 없었던 고통과 투쟁과 고독과 나약함이야말로 그가 감추고 싶었던 본모습일 것이다. 그가 찍은 사진 속에서도 그를 볼 수 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뿐만이 아니라, 불어오는 바람과 내리쬐는 햇빛과 넘실대는 파도와 흩어지는 구름 속에도 그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찍지 않은 것은 제주에 없다. 반대로 제주는 그의 눈 속에 모두 담겨 있다.
이제는 그의 글과 사진을 통하여 경이로운 제주를 볼 수 있다. 그 세계는 이십여 년 동안 사진에 몰입하여 그가 발견한 ‘이어도’인지도 모른다. ‘이어도’란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다. 그는 호흡곤란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을 때 이어도를 만났다고 고백한다. 인간이 보아서는 안 되는 한 세계를 만났기 때문일까. 그는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났다. 누구도 그를 만날 수 없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가 남긴 글과 사진이, 제주에 위치한 평화로운 갤러리가 그를 살려내고 있다. 그 섬에는 그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섬에는 그가 있다.
글ㆍ사진 | 오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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