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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희서 “제 이야기의 첫 관객을 모십니다”

에세이 『기적일지도 몰라』

가장 좋아하는 일은 연기.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일은 글쓰기인 사람. 배우 최희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연기가 타인의 삶에 완전히 젖어 드는 일이라면, 글쓰기는 내 안을 더 깊이 파고드는 일이다. 책 『기적일지도 몰라』를 출간하며 배역을 벗고 한 사람의 모습으로 독자 앞에 선 최희서를 만났다. 그는 “앞으로 나약해지는 순간마다 글이 나를 잡아줄 것 같다”고 말했다. 

‘나에겐 이 책이 나만의 ‘이야기’를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첫 공연이나 다름없으니. 당신은 이미 나에게, 이 ‘이야기’의 소중한 첫 관객이다.’  _(7쪽)

글 쓰는 일을 좋아해요 

작가로서 인터뷰하는 소감이 어때요? 


나의 시간과 노력을 쏟은 어떤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면서 기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마음은 배우로서 인터뷰를 할 때와 비슷한데요. 오늘은 그 대상이 ‘책’이라서 더 떨리는 것 같아요. 영화에서는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지만, 책은 최희서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요. 캐릭터가 아닌 저의 이야기를 독자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궁금하고 긴장되네요. 


브런치에 연재한 글을 보고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를 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던 건 영화 <박열>을 촬영한 뒤였어요. 영화 홍보의 일환으로 <박열>의 제작기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당시에는 제 글이 책으로 출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죠. 그런데 이 경험을 계기로 브런치를 계속하게 됐어요. 글 쓰는 게 재미있었거든요. 제가 살면서 느낀 감정들을 개인적인 다이어리가 아니라 공공연한 공간에 풀어놓는 묘미가 있더라고요.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 달아주는 댓글을 보는 것도 좋았고요. 그 이후로 종종 브런치에 글을 올렸는데 출판사에서 연락을 주셨어요. 처음에는 ‘내가 감히 책을?’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자기의 책을 갖는 건 대단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책을 만드는 경험은 어떠셨어요? 


이전까지는 즐겁고 기대가 되었는데요. 초교를 받아본 뒤에야 처음으로 두려워졌어요. ‘와 진짜 책이 나오네?’라는 실감이 났거든요(웃음). 제가 쓴 글을 객관적인 시점으로 읽어보니 부끄럽기도 했어요. 글을 고치고 다시 쓰면 쓸수록 ‘이 글을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쉬움이 남은 글을 그대로 출간하면 결국 후회는 나의 몫이잖아요. 편집자님과 여러 차례 의논하며 가장 좋은 버전의 글을 완성했을 때 정말 벅차고 기분이 묘했어요. 


프롤로그에서 누군가 나에게 “최희서 씨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첫 번째로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글 쓰는 일을 좋아해요.(4쪽)”라고 말할 것 같다고 했어요. 이 대답의 말줄임표가 많은 걸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좋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의한다면, 저는 첫 번째로 연기를 좋아하고요. 그다음은 글 쓰는 일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말줄임표는 아마 약간의 부끄러움이자 ‘그래도 좋아하는 걸 어떡해’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프롤로그는 제 앞에 인터뷰어가 있다고 상상하면서 썼어요. 누군가가 “최희서라는 사람에 대해 말해주세요”라고 했을 때의 답을 담았죠. 


본명이 ‘최문경’이죠. ‘글이 아름답다’는 뜻이라고요. 


할머니가 작명소에서 지어오신 이름이에요(웃음). ‘글월 문(文)’에 ‘아름다운 구슬 경(瓊)’이라는 한자를 써요. 어렸을 때는 문경이라는 이름이 딱딱하고 올드하게 느껴져서 좋아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문경이라는 본명도, 희서라는 예명도 다 좋아요. 


어린 시절의 최문경은 어떤 어린이였나요? 


양면적인 측면이 있는 아이였어요.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이불 속에 혼자 누워서 책 읽는 것도 즐겼죠.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모습은 유치원 시기인데요. 목소리가 굉장히 컸고, 많이 뛰어다녔고, 늘 선두에 서서 놀이를 주도했어요. 그런가 하면 일본에 가서 살게 됐을 때, 말이 통하지 않아 300페이지짜리 사전을 들고 등교했던 초등학교 시절도 있었죠. 특히, 저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책을 읽는 재미 덕분에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었죠.

현재를 사는 진짜 최희서의 이야기

이 책이 시작된 계기는 ‘결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결혼을 앞두고 브런치에 쓴 글이 화제가 되었죠. 


영화 <박열>의 제작기를 쓴 이후, 2년 가까이 브런치 계정을 방치했는데요. 결혼을 앞두고 다시 글을 업로드했어요. 사실 저는 결혼을 공표하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그래서 도대체 왜 그럴까 자문자답을 해봤거든요. ‘여배우이기 때문에 결혼 이후 달라질 시선이 신경 쓰이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지?’라는 식으로 질문이 꼬리를 물었죠. 수많은 질문에 대한 마지막 답은 ‘그냥 하면 되지!’였어요. 여기까지 다다르니 이 생각을 한번 정리하고 싶더라고요. 그때 쓴 글이 책 맨 앞장에 실린 ‘86년생 배우 최희서입니다’예요. 성별이 여성인 배우로서 느끼는 30대의 나이, 그리고 결혼에 대한 저의 생각이 담긴 글이었죠. 


브런치 글에 댓글이 정말 많이 달렸더라고요.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너무 많은 분들이 축하해주셨어요. ‘공감 가는 글이다, 솔직해서 좋다’라는 말씀들이 기억에 남아요. 


“삶과 떼놓을 수 없는 직업을 가진 나는, 직업과 떼놓을 수 없는 나의 삶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24쪽)”고 했어요. 지금의 마음은 어떤가요? 글을 쓰고 얻은 변화가 있나요? 


속이 시원해진 것 같아요. 물론 글 하나 썼다고 저의 모든 불안과 걱정이 종식되는 건 아니지만요. 그럼에도 달라진 건, 여전히 비슷한 종류의 불안이 저를 찾아올 때 내가 쓴 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거예요. 글 ‘86년생 배우 최희서입니다’는 저에게 어떤 의미에서 선언이었거든요. “나는 앞으로 정해진 굴레 안에서 살지 않을 거예요”라는 선언이요.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을 것 같아요. 


기록의 장점이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적인 곳에 내 생각을 기록한다는 건 굉장한 책임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앞으로 불안해질 때마다 글이 저를 잡아줄 것 같아요. ‘너 당당하게 글 써놓고, 계속 이렇게 지낼래?’하고요(웃음). 사실 배우라는 직업은 굉장한 환희가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기도 해요. 어느 정도는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일이니까요. 작품이 없거나, 생각보다 흥행을 못 했거나, 혹평을 받을 때 마음이 많이 나약해지죠. 하루는 친한 지인에게 “저 너무 나약해진 것 같아요”라고 말했더니 “그런 면이 너를 배우로서 더 매력적으로 만들 거야. 스스로 나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굉장한 용기야”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런 말이 저에게 위안을 주듯이, 글도 비슷한 역할을 해요. 


스스로에게 가장 위안이 된 글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된 ‘86년생 배우 최희서입니다’도 애착이 가고요. 영화 <아워바디>를 촬영했던 순간에 대해 쓴 ‘NG여도 좋다’도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글이었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20대에는 저 자신에게 채찍질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좌절할 것 같은 순간마다 “반드시 이겨내야 해.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자아가 있었죠. 요즘은 ‘하다가 안 될 수도 있지. 최선을 다한 작품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해요.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기보다 그 순간을 살아내는 것에 더 관심이 생긴 거예요. 


이건 영화 <박열> 촬영기를 브런치에 쓸 때까지만 해도 몰랐던 감정이에요. 그런데 이후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글을 쓰면서 비로소 알게 됐죠. 그 생각이 책의 4장에 주로 담겼어요. 특히 ‘NG여도 좋다’에 많이 드러나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처럼 안 될 때가 있지만, 그게 끝은 아니라는 걸 이제 알아요. 그래서 저는 4장을 읽을 때 제일 기분이 좋아요. 1~3장이 과거의 빛났던 순간들을 담고 있다면, 4장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진짜 저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요. 

매일 기적의 씨앗을 심고 있다 

‘기적일지도 몰라’라는 제목을 보고 궁금해하며 책을 펼쳤는데요. 다 읽고 나니 내용에 딱 부합하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이켜보면 지금의 저를 만든 일들이 특히 그렇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대본을 보면서 연극 연습을 했을 뿐인데, 같은 지하철에 타고 계시던 신연식 감독님 눈에 띄어서 영화 <동주>를 찍게 됐고요. 그 인연으로 이준익 감독님을 만나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게 되었으니까요. 혼자 끄적이던 시나리오를 오래 묵혀놨는데, 덕분에 우연한 기회로 영화 <반디>를 제작하기도 했고요. 사실 이 모든 일은 어느 한순간의 기적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용히 혼자 발버둥치며 했던 노력들이 어느 날 표면으로 올라온 거죠. 씨앗이 느리게 싹을 틔우는 것처럼요. 어떻게 보면 저는 매일 기적이 될 수 있는 씨앗들을 심고 있는 것 같아요.  


책을 쓰는 건, 배우로서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책을 쓰면서 제가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고요. 계속 일을 벌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저는 작품이 없을 때도 가만히 있지 않고 늘 뭔가를 만들어서 했거든요. 손석구 배우와 연극 <사랑이 불탄다>를 만들었던 것도 10년 전의 일이죠. 요즘 석구 오빠랑 찍은 사진이 SNS에 엄청 많이 올라오는데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워요(웃음). 연기뿐 아니라 번역, 미술, 의상 등 연극에 필요한 모든 걸 저희 스스로 다 했던 시절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포스터도 직접 붙였거든요(웃음). 관객을 다 합해도 200명이 채 안 됐던 연극이었는데 그걸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많다는 게 너무 감사하죠. 어쨌든 쉬지 않고 뭐라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10년 전에는 두 분 모두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겠네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웃음). 정말 기적이에요. 제가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 역으로 많은 상을 받았을 때 석구 오빠가 자기 일처럼 축하해줬어요. 저도 지금 그 감정을 느껴요. 너무 대단하고 기쁘죠.


‘최희서’라는 배우를 두고 여전히 ‘가네코 후미코’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죠. 여기에 대한 생각은 어때요? 


또 다른 대표작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기억되는 캐릭터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후미코가 넘어야 할 산 같았어요. 지금은 뒤돌아보면 있는 산 같아요. 


책을 읽으며 촬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인상적이었어요. 현장에서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있나요?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지 않으려고 해요. 너무 덥거나, 촬영을 오래 해서 피곤하거나, 장비에 문제가 생겨서 촬영 시간이 늦어지는 등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변수가 발생하잖아요. 특히,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면 솔직히 언짢아지기도 하는데요. 이 감정을 밖으로 전파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이면 주변의 동료들도 동화될 수 있으니까요. 힘든 상황일수록 “괜찮아요! 우리 할 수 있어요!”라고 더 얘기하죠. 그럼 지쳐 있던 사람들이 씁쓸하게나마 미소를 지어요. 되도록이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기 위해 노력해요. 


요즘 배우님을 즐겁게 하는 게 있다면요?


일단 책이 출간된 일이고요(웃음). 또, 최근에 현대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교환 학생 때 1년간 현대 무용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잊고 지냈거든요. 오랜만에 다시 하니 너무 재밌더라고요. 지난주에 첫 번째 안무를 끝냈고, 이제 두 번째 안무에 들어가요. 현대 무용은 어떤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재미있어서 배우는 일이거든요. 이게 저에게는 남다른 의미이기도 하죠. 


마지막으로 배우님이 생각하는 기적이란 무엇인가요?  


오늘 계속 비가 내리다가 사진 촬영하기 전에 갑자기 해가 났잖아요. 이런 게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매일 일어나는 기적의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최희서


배우. 2009년 영화 <킹콩을 들다>로 데뷔했다. 주요 출연 작으로 영화 <동주>, <박열>, <아워 바디>, 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등이 있다. 2017년 <어떻게 헤어질까>로 37회 황금촬영상 시상식 심사위원특별상, 2018년 <박열>로 5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신인연기상을 수상하였다. 30대 여성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질문하며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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