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내 마음에 그림 한 점, 활짝
『꽃 피는 미술관』 정하윤 미술사학자 인터뷰
정하윤 미술사학자 |
미술사학자 정하윤이 전 세계의 명화 중에서 ‘꽃’을 주제로 한 그림만 큐레이션한 뒤 친절한 해설을 붙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책을 출간했다. 실제 어디선가 전시가 열리고 있을 것만 같은 제목이다. 『꽃 피는 미술관』.
책을 열어보니 이 미술관을 즐기는 법까지 있다. 우선 가장 좋아하는 곳에 앉으라 권한다. 미술관에서는 주로 걷는 게 일인데, 우선 따라가본다. 어라, 그리고 남은 일은 하나란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것. 이 미술관을 연 미술사학자가 궁금했다. 왜 1년 동안 365점의 꽃 그림을 모으게 되었는지도. 이 책의 저자 정하윤을 만났다.
꽃 그림만 모은 책은 처음 접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계속 보면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신기했습니다. 게다가 정말 어디선가 전시가 열리고 있을 것 같아요.
큐레이션 때문일 거에요. 큐레이션은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보여줄까”가 핵심이거든요. 책을 쓸 때도 그 부분을 가장 신경 썼어요. 그림을 고를 때에는 되도록 다양한 지역, 다양한 시대의 예술가를 넣으려 애썼어요. 예술가들은 자기 개성이 워낙 강하기에 같은 대상을 그려도 결과가 모두 다른데요, 그래서 지역과 시대를 넓히면 그림의 색감이나 구도, 붓질, 작품의 의도 등을 더욱 다양하게 만날 수 있어요. 그렇게 모은 그림이기 때문에 ‘같은 꽃을 이토록 다르게 그릴 수 있구나!’ 하고 놀라시곤 해요. 수선화라도 밀레가 그린 수선화와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린 수선화는 정말 다르니까요.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을 거예요.
그림의 배치 즉, 독자들이 보게 될 그림의 순서도 중요해요. 미술관에서 전시를 꾸리는 방식을 따라 그림을 골랐어요. 좋은 전시는 큐레이터가 작품의 배치를 깊이 고민해요. 그림끼리 서로 대화를 주고받도록, 그래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도록 고심하죠. 이 책을 위해 그림을 고를 때도 앞뒤의 그림들이 서로 연관되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어요. 각각의 그림이 그려진 시대는 달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예술가들이라거나, 같이 작업을 했던 동료라거나, 서로를 존경했다거나 이런 이야기들이 흐를 수 있게요. 그림이 서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이 책의 힘인 것 같아요. 어디선가 전시가 열리고 있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진짜 열려요. 강남역에 있는 ‘일상비일상의틈’이라는 공간에서 6월 21일부터 7월 3일까지요. 책과 꽃과 함께 향기로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출판사에서 열심히 준비중이랍니다. 이번 책으로 다 함께 미술관 운영팀이 된 것 같아요.
그림 해설이 짧고 명쾌해요. 화가의 생애부터 붓질, 색감, 시대적 배경까지 짧은 해설에 다 담겨 있더라고요. 미술사학자의 연구 영역이 꽤 넓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미술사학이 뭐예요?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학문인가요?
작품에 대한 해설은 최대한 쉽게 읽히도록 썼어요. 어려운 설명이 미술로부터 관람자를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 쓰는 것이 대중서를 쓰는 학자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 전문 용어는 최대한 배제했고, 작품 하나에 핵심 요소 하나만 담으려고 했어요. 예를 들면 한 그림에 화가의 의도, 색채, 시대적 배경 등의 설명을 모두 넣지 않았어요. 한 그림에 화가의 의도만 담고, 다음 그림에는 시대적 배경만 담고, 이렇게요. 그렇지만 작품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설명을 모두 읽으시면, 형식적 접근, 사회학적 접근, 자전적 접근 등 미술사학의 방법론을 골고루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미술사학은 미술 작품의 의미를 살피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잘 파악하기 위해 색채나 구도 같은 작품의 형식적 요소와 시대 상황과 같은 외적인 맥락을 살피는 거죠. 물론 예술가의 개인적인 스토리도 봐야하고요.
그리고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미술사 또한 사람을 향해야 한다고 믿어요. 좋은 작품이 갖는 힘은 너무나 커서,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관점을 바꾸고, 지친 사람을 일으키게 할 수 있거든요. 책의 문장 문장에 저의 이런 마음이 들어가 있어요. 저는 그림을 전공한 후에 미술사로 진로를 틀었어요. 일반 중학교를 졸업하고 예술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고1 첫 실기 시간에 알겠더라고요.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 길이 아니라는 걸요(웃음). ‘이제 어쩌지’ 하다가 고2 때 미술사를 배웠는데, 그때 이거다 싶었어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는 게 너무나 즐거웠거든요. 지금은 그림을 직접 그리지는 않지만, 미술 재료를 다뤄봤던 경험이 작품을 분석할 때 도움이 많이 되어요. 예술가들의 마음이나 작업 과정을 안다는 것도요. 그렇지만, 꼭 그림을 전공해야 미술사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작품은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들어 있고, 다양한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림이 아닌 다른 학문을 연구했던 학자들이 많아요.
아무리 미술사학자라고 해도, 1년 동안 매일 1점씩 꽃 그림을 모으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1년의 기한을 정해서 매일 한 점씩 꽃 그림을 모은 이유가 있으세요? 그렇게 보낸 1년, 어떠셨어요?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어요. 정원을 만드는 프로젝트의 아트 디렉터로 입사를 했는데, 철쭉이나 수국과 같은 수종 조사나 장미 관리법 리서치 같은 것들을 업무로 받곤 했어요. 꽃과 나무를 보러 출장도 자주 가고요.
새로운 분야라 배우는 것도 많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전공에서 너무 멀어진다는 위기의식이 들더라고요. 전문성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은 공포도 느끼고요. 그래서 그림을 더 붙들었어요. 장미 조사를 한 날은 장미 그림을 찾아보고, 수국을 보고 온 날은 수국 그림을 찾아보고요. 그러면서 점점 더 꽃 그림의 매력에 빠져들었어요. 처음 보는 좋은 작품도 정말 많더라고요.
그러면서 매일 아침 출근 전에 꽃 그림 하나를 보고, 그에 대해 짧은 글을 적고, 오픈채팅방에 공유했어요. 1년 동안요. 그렇게 모은 글이 책이 되었네요. 꽃 그림이 매일을 버거워하던 그 당시의 제게 큰 위로를 주었어요. 매일 새로운 그림을 본다는 설렘이, 그림의 아름다움이, 예술가들의 삶이 주는 영감이 저로 하여금 힘을 내게 해주었어요. 꽃 그림이 없었다면 그때의 저는 매일을 더 힘들게 느꼈을 거예요. 독자분들도 매일을 살아갈 새로운 힘을 꽃 그림을 통해 얻으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384페이지의 큰 화집이에요. 한 페이지에는 그림, 한 페이지에는 해설이 있으니까, 이런저런 구성을 빼고 나누면 대략 190점 정도의 그림이 들어가 있는 거네요. 1년의 꽃 그림을 한 권에 다 넣었으면 800페이지의 대작이 되었겠네요.
봄여름 편은 183점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요. 원래는 1년 365개의 꽃 그림을 한 권에 모두 담으려 했는데, 그러다보니 이 책의 핵심인 꽃 그림 감상이 여의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 끝에 봄여름, 가을겨울 편으로 나눠서내자고 편집자와 이야기했죠. 좋은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실 수 있게요.
작품수가 많고 잘 펼쳐 볼 수 있게 양장본으로 만들다보니 책이 묵직해요. 저는 이 책이 도록처럼 만들어져서 정말 마음에 들어요. 미술관에서 나오는 도록은 도판의 질과 종이의 재질이 탁월한데, 이 책이 딱 그래요. 양질의 도판을 좋은 종이에 크게 넣었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시는 맛도 있고요. 표지도 봄여름 편에 걸맞게 화사하지요. 이번 책에는 다 못 담은 가을겨울 편에도 좋은 작품이 너무 많아요. 다알리아, 국화, 동백 등등이요. 어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봄여름 편이 잘 되어야 가을겨울 편도 빨리 나올 텐데요(웃음).
어려운 질문 하나 드리고 싶어요. 이번 봄여름 꽃 그림 중에서 어떤 그림을 가장 좋아하시는지요. 딱 한 점만요.
가장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림은 정말이지 다 좋고요, 그래도 꼭 보셨으면 하는 그림을 고르자면, 메리 커셋의 <여인과 해바라기>에요. 작품에 대한 인상이 작품 설명을 읽기 전과 후가 많이 달라지거든요. 처음 봤을 때는 엄마와 아이가 사랑스럽게 앉아 있는 그림으로 다가와요. 마냥 예쁘죠.
그런데 해바라기의 의미를 알고 나면,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가 읽혀요. 그림 속에서 나누는 엄마와 아이의 대화도 완전히 달라지고요. 아무 지식 없이 그림을 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지만, 그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났을 때 또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미술사의 매력인데, 독자분들도 이 그림을 통해 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메리 커셋의 <여인과 해바라기> |
책 작업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원고와 도판을 모두 넘기고, 가족과 산책을 갔던 날이 기억나요. 저희 딸이 연둣빛 풀 사이로 들어가 민들레 홀씨를 불었는데, 책에 있는 그림이 완벽히 겹쳐 보였어요. 그런데 책을 담당하신 편집자와 디자이너도 똑같은 경험을 하셨대요. 자유로를 운전하며 가는데 그날따라 출근길 가로수가 고흐의 풍경화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고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림이라는 새로운 필터가 장착되기 시작하는 거죠.
저는 정원 프로젝트 팀에서 일할 때 비로소 나무와 꽃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 이후에 세상이 더 입체적으로 다가와요. 그냥 나무였던 것이 이팝나무, 산딸나무, 보리수 등이 되었고, 그냥 꽃이 아니라 양귀비, 매발톱, 접시꽃이 되었고요. 뭉뚱그려 있던 덩어리 속에 하나하나가 생생해지는 거죠. 편집자와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로 이 책을 만난 후로는 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말을 전해줬어요. 이제는 무슨 꽃인지 알겠고, 그 꽃이 또 그림으로 연결되고요. ‘세계가 확장되는 놀라운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꽃 그림을 한 장 한 장 따라 가시다보면 독자분들도 같은 경험을 하실 거라 생각해요.
저자의 작업실인 쥬빌리 아트 가든에서 |
그럼요(웃음). 저도 매일 매일 한 점씩 보고 있어요. 말씀드린 대로 그림을 보고, 해설을 읽고, 그림을 다시 보고요. 신기하게도 볼 때마다 또 새로운 것들이 보여요. 매번 ‘가장 좋은 작품’도 달라지고요.
길가를 가거나 꽃집에 가서 꽃을 보면, 집에 와서 책을 펴고 그 꽃이 있는 섹션을 찾아보기도 해요. 일상에서 마주친 대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그림을 보는 것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하더라고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서 가을겨울 편도 보여드리고 싶네요. 그러면 정말 365일 동안 다채롭게 행복할 텐데 말이에요.
*정하윤
현대미술사 미술사학자. 이화여자대학교 회화과와 같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 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돌아와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며, 정원이 딸린 양평 작업실에서 어린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미술 교양 수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 『여자의 미술관』이 있다.
정원 미술관 조성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수많은 정원과 꽃을 만났다. 그림 속에서 아름다운 배경으로만 생각했던 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에나 꽃이 있다”고 한 앙리 마티스의 말을 떠올린 저자는 꽃 그림을 연구했고, 이 책에 그 결과를 담아 그림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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