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에세이
작가, 변호사, 만화가, 서평가가 꼽은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에세이
에세이는 “모든 문학형식 가운데 가장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장르입니다. 새해에는 조금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사람이 돼보면 어떨까요? 좋은 에세이를 읽으면서 말입니다. 작가, 변호사, 만화가, PD, 서평가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또 읽고 싶은 에세이가 있습니까?”
찰스 램 『찰스 램 수필선』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작가를 꼽으라면 찰스 램은 아마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어려서부터 심한 말더듬이였던 그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정신병으로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어떤 것보다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누나이자 문학적 동반자였던 메리 램(두 사람은 나중에 함께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쓴다)의 정신병이었다. 찰스 램이 21살이었을 때 그녀는 발작 상태에서 부엌칼로 어머니를 찔러 죽인다. 램은 누나를 보살피겠다는 조건으로 석방시킬 수 있었지만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두 번에 걸친 사랑에도 실패해서 독신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서 어두운 곳을 찾기는 어렵다. 지극히 산만해 보이면서도 삶의 사소한 면까지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그의 수필에는 무엇보다 따뜻한 유머가 흐른다.「돼지구이를 논함」 같은 글을 읽으면서 웃음을 참기는 쉽지 않다. 글쓰기가 치유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좋은 예라고 할까. 힘들 때 가끔씩 '찰스 램 수필선'을 꺼내 읽게 되는 것은 그의 글 속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봤던 사람의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자에게도 치유와 위안이 된다. -금태섭(변호사)
무라카미 하루키『먼 북소리』
"내가 방황하는 것은 내가 고향을 멀리 떠나왔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방황하는 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내가 쓴 문장인 줄 알았다. 사람과 책은 인연이 닿지 않으면 만나도 알아볼 수 없다. 나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는 오래 전 만났으나 알아보지 못한 인연이었다. 프랑스에서 6년, 미국에서 3년가량을 살고 나서야 그를 마음에 받아들였고 잊지 못할 운명이 되었다. 이 책은, 스치듯 지나가는 여행기가 아닌, 머물다 떠나는 여행기를 보여준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인생에 두고두고 남는 인연은, 여행하듯 스치지는 않더라도 머물다가 떠나가는 인연이다. 하루키에게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문 곳이었고 그래서 특별한 여행기를 남길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이와 같은 경험을, '인생의 휴가'라고 부른다. 때로는 여행이, 때로는 만남이, 우리에게 인생의 휴가를 가져다 준다. 하루키의 이 책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의 휴가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때로 휴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 책으로 기록에 남긴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체류 중,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를 썼다. 쉼표 하나가 문장의 의미를 바꾼다. 인생도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긴 휴가를 떠나야 할 때인지 모른다. - 이서희(작가)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SNS에 각종 제작과정의 영상을 퍼 올리는 동료가 있다. 난 참 고맙게, 재미있게 본다. 그런 영상이 공통적으로 포함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훈련된 숙달자가 정성을 다해 노력하여 무언가를 완성하는 것'이다. 『소설가의 각오』를 읽었을 때의 흥미지점과 그런 영상을 볼 때의 그것은 닮아 있다. 소설가라는 나와 다른 직군의 대가가 더욱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해 갖는 단단한 마음가짐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 단단한 마음이 직조되기까지의 과정도 참 흥미롭다. 우린 가끔 나와 닮은 종류의 노력을 하는 이를 보며 내 노력의 고통을 위안 받지 않나. 그런 위안이 이 책에 가득하다. - 강형규(만화가)
김계수 『나는 달걀 배달하는 농부』
수년간 읽어온 책들의 목록을 들추다가 이 제목에서 시선이 멈췄다. 에세이가 필자의 생각과 삶이 드러나는, 그래서 그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르라면, 이 책이 좋겠지 싶었다. 김계수는 전남 순천에서 '달나무농장'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을 직접 소비자들에게 배달하는 농부다. 반가운 소식이 담긴 편지를 전하는 우편배달부처럼, 그는 고이 달걀을 싸 들고 10년 넘게 매주 두 번씩 동네의 아파트로 배달을 나서왔다. 이 책 속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농산물을 키우는 농부의 마음과 짐승을 대하는 인간의 에티켓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농부 김계수가 배달하는 달걀은, 태어났을 때의 따스한 온기를 그대로 품고 있을 것만 같다. 이 책 또한 그러한 땀 흘림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담고 있다. - 임윤희(나무연필 대표)
고종석 『서얼단상』
아주 좋은 글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통찰의 실마리를 마련해 주는 글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독자가 살고 있는 시공간의 맥락에서 재해석된 통찰일 뿐이다. 글이 씌어진 당대를 함께 호흡하는 가운데 그 글에 담긴 통찰을 음미하는 것은 그보다 사뭇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그래서 가장 좋은 글은 언제나 당대에 씌어진 글일 수밖에 없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빼어난 산문가들이 숱하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굳이 단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당대에 아무개의 글을 읽는' 기쁨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까닭이다. 내게 그 '아무개'는 고종석이다.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약중인지라 '최고의 걸작'을 운운하는 일이 적잖이 경망스러운 짓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시점에서라면 주저없이 <서얼단상>(개마고원, 2002)을 첫손에 꼽고 싶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출간 당시에 썼던 서평(http://ddonggae.kr/articles/review?m=view&bbs_id=review&p=1&search_category=&seq=838)에. 더 덧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출판컨설턴트)
강상중 『도쿄 산책자』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 도쿄가 가장 일상적이고 친숙한 공간일 것 같은 사람이 도쿄를 낯설게 산책한다. TOKYO STRANGER, 낯선 사람이라니.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에 손이 갔다. 이 도시에서 당신은 누구인가. 무엇을 찾아 이곳에 왔는가. 그가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에 이끌렸다. 새로운 공간에서, 특히 도시에서 우리 모두는 낯선 사람이다. 수많은 군중이 오가는 복잡하고 화려한 도시의 한가운데서 알아보는 이 하나 없는 낯섦, 그 속에서 느끼는 시선의 자유.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저자는 우리에게 '자기 찾기'의 방법을 제안하려고 이 글을 쓴 게 아닐까. '진정한 나'에 대한 고민과 불안으로 청춘을 보낸 그에게 '도쿄'라는 도시의 적막감이 문제의식의 출발점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도시의 세련됨 뒤에 감춰진 고독감과 소외를 먼저 느껴보길 권한다. 청춘의 기억이 쌓인 도시를 산책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추억하고, 관찰하고, 걱정하고, 희망하는 그를 따라가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힌트를 얻는 느낌이다.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장소에서 나만의 의미 찾기의 재미를 알 것도 같다. 여전히 이방인을 자처하는 그의 겸손함과 공손한 어투가 다행히도 책장의 무거움을 덜어준다. 그는 혼자 생각하는 도시 산책을 했지만, 덕분에 우리는 친구와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산책을 하게 될 것이다. 조금은 진지하지만 가볍게 나설 수 있는 도쿄 산책 한 바퀴. 마음이 복잡할 때, 방황하고 싶을 때, 답이 필요할 때, 산책을 나서보자. 도쿄든 서울이든 우리가 사는 도시 어느 곳이든. 걷다 보면 생각하는 힘이 생기고, 생각하다 보면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 소중한 기억이 깃든 장소가 있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도,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는 그의 믿음처럼 담담한 마음이. - 김영혜(MBC PD)
김현진 『육체탐구생활』
그녀에게 '글'은 행동을 기록하는 도구, 오늘을 기억하는 방식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김현진 작가의 『육체탐구생활』은 '말'로만 지껄이는 사람들의 고고한 삶을 부끄럽게 만든다. 나름 '센캐(센 캐릭터) 언니'라고 불리던 작가가 녹즙 배달을 하며 여사님들의 텃세에 주눅들고 빌딩을 오가며 수금을 받아내는 지난한 과정은 책상머리에 앉아 '어떻게 살면 좋을까?'를 고민하는 이들을 자극한다. 팔자 좋게 2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 여행이 한낱 아름다웠던 과거가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그 여행이 내게 준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이 책을 만났다. 스스로 '도시빈민'이라고 부르는 작가가 '빈털터리가 되어도 괜찮다며 그 바닥을 견뎌낼 배짱만 있으면 된다.'고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 김은덕(작가)
마루야마 겐지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사서 읽게 되는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집이다(하루키는 잊었다, 아니 더 읽을 게 없던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길들지 않는다 등을 쓴 작가다(정작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다). 통쾌하고 신랄하여 읽는 맛이 후련하다. 자주 가슴을 통렬하게 후빈다. 그럼에도 인생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실천적 안목이 매력적이다. 신간이 나왔다 하면 사는 까닭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일본의 지붕이라 일컫는 북알프스 지역에 마련한 350평짜리 정원을 가꾸는 내용이다. 1년간, 매달 한 편의 에세이를 써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정원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 그것을 관찰하는 작가의 감상이 일상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담겨 있다. 정원 가꾸기가 노곤한 노동으로 이뤄져 있고, 그것으로 얻는 만족감은 짧아 투정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책은 전작과는 '어투'가 다르다. 자연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정원에서 생각대로, 맘대로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손이 많이 가고, 자주 애타는 마음이 되곤 한다. 하지만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란 사실을 순순히 음미하고 이해하며, 아름다움과 사랑, 위로의 정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지금을 충분히 즐기는 심정이 되었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시선 또한 너그러워졌다. 젊을 때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인생 목표를 세웠던 노작가는 '정원과 소설'을 가까스로 쥐고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 자족한다. "정원과 소설에 딱 맞는 몸과 마음으로 노년기를 맞이한 게 행운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행운이란 말인가." 20년 후, 내 손에는 어떤 것이 쥐어져 있을까. - 백승관(맨즈헬스 편집장)
김이율 『가끔 이유 없이 눈물이 날 때가 있다』
어른이 되니 많은 것들이 가혹해 집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 말하면 너 혼자 그런 게 아니니 유난 떨지 말란 말로 돌아오고, 매일 하는 크고 작은 선택은 나 스스로에게 불신만 쌓여갑니다. 얼굴에 붙은 두 개의 눈은 왜 하필 밖을 향한 것인지 내 결정을 하는데도 남의 눈치만 보게 되고, 그 덕에 속 시원히 울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겨운 사람들에게 울어도 괜찮다 말해줍니다. '마음 약한 사람이 우는 것이 아니라 울지 못한 사람이 약한 사람'이라 말해줍니다. 정말이지, 가끔 이유 없이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의 다정함을 읽고 있노라면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에 부끄럽지 않아도 될 정당성이 생깁니다. 어른이 되며 터득한 것이 하나 있다면 스쳐 지나간 모든 것들이 훗날 그리워질 것이라는 것. 오늘의 울음도 얼마 안가 스쳐가는 과거가 될 것이고 그리고 우린 울었던 젊은 날을 그리워하게 되겠지요. 괜찮습니다. 험한 세상 꽤나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힘내세요. 당신만 참고 있는 게 아니에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 남정미(개그맨, 서평가)
글 | 엄지혜사진 | 이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