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발 위의 고양이
<월간 채널예스> 2019년 8월호
하늘 가득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다. 이른 봄에 태어난 아깽이들은 저마다 오종종 처마 밑에 앉아서 비 구경을 한다. 어떤 녀석은 비 오는 하늘이 원망스러운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피고, 어떤 녀석은 낙숫물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거린다. 이따금 천둥이 칠 때면 녀석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서로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녀석들의 엄마는 마실을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비는 언제 그치나. 엄마는 언제 오나. 빗방울을 구경하는 아깽이들의 맑고 파란 눈망울이 처마 밑에 반짝거린다. 이윽고 소나기가 잦아들어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아깽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마당으로 내려선다. 때마침 마실갔던 엄마도 마당으로 들어선다. 엄마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비 젖은 마당이 한바탕 난리법석이다.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와 엄마를 둘러싸고 야옹야옹 삐약삐약 저마다 군소리를 한다.
이 아이들은 아랫마을의 마당고양이 삼월이의 아이들이다. 3월에 처음 만나 삼월이라 이름붙인 녀석은 아랫마을 노부부의 집을 안식처로 삼고 있는데, 산책을 나갈 때마다 간식을 주었더니 이제는 멀리서 내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집 앞에서 기다리곤 한다. 성격 좋은 엄마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오며가며 가끔씩 간식(고양이용 소시지와 닭가슴살)을 얻어먹었기 때문인지 삼월이네 아이들도 내가 마당에 들어서면 거리낌 없이 다가와 주변을 에워싸곤 한다.
단, 삼월이가 있을 때만 아이들은 거리낌이 없다. 엄마라는 든든한 배후가 있기 때문이다. 삼월이네 아이들은 크림색 아깽이를 필두로 다섯 마리가 하나같이 어여쁘고 귀엽다. 아깽이들과 왁자지껄 마중인사를 나눈 삼월이는 마당 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다가온다. 엄마의 행동을 보고 나서야 아깽이들도 졸랑졸랑 나에게로 달려온다.
용감한 고등어 녀석은 어느 새 내 발밑까지 진출했으며, 뒤늦게 도착한 턱시도와 크림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코를 벌름거리며 신발 냄새까지 맡는다. 심지어 크림이는 내 신발 위까지 올라와 젖은 발을 털더니 다짜고짜 신발끈을 물어뜯는다. 턱시도 녀석도 내 신발에 올라와 한참이나 젖은 발을 털고 그루밍까지 한다. 가만 보니 두 녀석은 비가 내려 질척한 바닥에 발이 젖는 게 싫어 신발 위로 올라온 듯했다.
졸지에 내 신발은 구명보트처럼 아깽이들을 양쪽에 태우고 질척한 바닥을 건너는 꼴이 되었다. 제법 오랜 캣대디 생활에 이런 호사가 없다. 내가 걸음을 옮겨도 녀석들은 신발 위에서 중심을 잡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행여 아깽이가 신발에서 미끄러져 웅덩이에 빠질까, 나는 발에 쥐가 나려는 걸 겨우겨우 참는다. 신발보다도 작은 내 신발 위의 고양이.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뽀시래기들.
아무래도 녀석들은 이렇게 구명보트를 타고 바닥이 젖지 않는 봉당까지 갈 심산이다. 아쉽게 구명보트에 오르지 못한 아깽이들은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졸졸졸 따라온다. 가랑비가 내리는데도 빗물 자작한 바닥을 밟으며, 졸랑졸랑 따라온다. 어떤 녀석은 대열에서 이탈해 마당에 고인 웅덩이에서 물장구를 치고 논다. 턱시도의 유난히 하얀 양말이 다 젖었다. 예상대로 봉당이 가까워져서야 아깽이들은 구명보트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인사도 없이 흩어져 다른 일행과 장난을 친다. 빗물이 송송 맺힌 풀잎을 뜯어 맛도 보고, 빗길에 콕콕 발자국도 찍어본다. 마침내 부슬부슬 내리던 가랑비도 그치고, 아깽이들도 모두 봉당으로 올라가 파란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다. 아무래도 이 정도 됐으면 간식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하는 표정이었다. 삼월이는 노골적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냐앙, 하고 길게 울었다. 우리 아기들이 놀아주었으니 어서 셈을 하라는 핀잔이었다.
나는 그럴 줄 알고 챙겨온 사료와 간식을 푸짐하게 풀어놓았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귓전에 아깽이들의 사료 씹는 소리가 까드득 까득 들려왔다.
글ㆍ사진 | 이용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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