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겸의 무표정 : 내 눈엔 네가 안 보여
상대를 면전에서 무시하고 부정하는 완고함,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영화 '공범자들'의 한 장면 |
어떤 이들은 말보다 침묵으로 더 많은 말을 하기도 한다. 취임 100일을 맞아 CBS의 존 디커슨과 함께 대담을 나눈 도널드 트럼프는, 디커슨이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을 던지자 “나한테 질문할 필요 없다. 나는 내 의견이 있고 당신도 당신의 의견이 있을 수 있으니까.”라는 기괴한 핑계를 대며 대답을 피했다. 디커슨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자 트럼프는 “됐다, 이쯤 하자.”라며 일방적으로 인터뷰를 끊더니, 뜬금없이 집무실 데스크 앞에 앉아 데스크 위의 서류를 뒤적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방금까지 “엄청나게 유력한 회사의 CEO도 이 집무실을 둘러보고는 압도되어 울었다” 따위의 자기 자랑을 늘어놓던 남자가 불현듯 급한 업무가 떠올랐다는 듯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자기 자랑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어 도망가는 사내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이라니.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시도한 언론장악의 역사를 영화 한 편에 압축한 최승호 감독의 영화 <공범자들> 또한 그런 얼굴을 한 사람들을 잔뜩 만나볼 수 있다. 사천까지 내려가 질문을 던지는 최승호 감독을 보고 당황한 김재철 전 MBC 사장의 떨리는 인중부터, 인터뷰를 피하겠다며 아파트 비상계단을 뛰어내려가는 현란한 추격씬을 선보인 안광한 전 MBC 사장의 뒷통수, 괜히 다 끝난 행사를 들먹이며 “UHD는 방송의 미래인데 방송의 미래를 망치려 들지 말라”는 핑계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백종문 MBC 부사장의 갈 곳을 잃은 눈빛까지. 이런 사람들이 한 나라의 공영방송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관객은 쓰게 웃다가 견딜 수 없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 공영방송의 구성원들은 어떻게 지난 몇 년간 저런 사람들을 상대로 싸워 왔던 거지?
인상적인 인중과 뒷통수, 눈빛들을 지나온 자리에 김장겸 현직 MBC 사장이 있다. 인상적인 장면들을 하나씩 남긴 전임자나 동료들과는 달리, 김장겸 사장은 가능한 한 완고한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끈질기게 따라 붙으며 인터뷰를 시도하는 최승호 감독과 뉴스타파 제작진들 앞에서도, 김장겸 사장은 당황하거나 뭐라도 말을 꺼내는 일 없이 절벽같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서둘러 자리를 뜬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항의를 하고 책임을 묻든 자신은 사퇴하는 일 없이 임기를 꽉 채우고 나가겠다는 그의 무표정은, 상대의 존재를 면전에서 무시하고 부정하려는 강고한 의지의 결과물이다. 그에 비하면 뻔뻔스레 웃으며 최승호 감독의 안부를 물어본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우스꽝스러운 말들을 늘어놓다가 말이 꼬여버리고 마는 김재철 전 사장이 차라리 말을 섞기 더 편한 상대로 보이는 착시까지 일 지경이다.
무언가 책임지고 답을 하는 것도 아무 때에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답을 할 수 있을 때 답을 해야 하는 법이다. 미디어 비평지 미디어오늘은 8월 25일자 단독 보도에서 김장겸 사장이 TV조선 뉴스에 출연하는 걸 타진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MBC 측은 바로 허위사실보도라며 정정보도를 요구하고 법적 대응을 시사했지만, 사태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은 “왜 최승호 감독이 물어볼 때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다가 이제 와서 남의 방송에 나가려 하는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 완고한 무표정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지켜보면서, 영화의 명대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자.
“김장겸은 물러나라!”
글 | 이승한(TV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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