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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미 “퇴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물감' 때문”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는 잠시 미뤘습니다』 김유미 저자

퇴근 후 마주한 캔버스 속 세상에서 받은 위로와 용기를 대신 전하고 싶어요. 애쓰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제법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그러니 지금 우리만의 그림을 그리자고.

“퇴근이 빠를까, 퇴사가 빠를까?” 이런 유행어가 보여주듯 최근 몇 년 사이 고된 직장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싶어 하는 목소리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무작정 퇴사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일상이 될 수도 있다고. 애쓰지 않고도 사랑하며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쯤은 있어도 되겠다고.


여기에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 같지만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우리의 일상은 이미 예술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는 잠시 미뤘습니다』는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던 퇴근 후의 저녁을, 잊었던 나를 발견하는 시간으로 바꾼 한 평범하고 소심한 직장인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 취미로 시작한 그림에 어느새 푹 빠져버린 탓에 이제는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를 잠시 미뤘다는 김유미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취미 하나쯤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시작하려고 하면 시간이 안 나서 겁을 먹거나 금세 포기해버리는 직장인들이 많습니다. 어떤 계기로 그림이란 취미를 시작하셨는지, 그림 그리기 위한 시간을 어떻게 확보해나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매일 퇴근하고 보던 친구들이 떠나는 바람에 혼자서 놀 궁리를 해야 했습니다. “고독은 운명이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려는 것”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고독한 나머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 했습니다. 뭔가 티 나는 것을 하고 싶었어요. ‘피아노 치는 직장인’ 같은 느낌으로 반전 매력을 가지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다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일단 무조건 3개월은 해보자는 마음으로 동네 화실을 찾았습니다. 그림이 저의 인생 취미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화실은 주로 월요일과 목요일에 나갑니다. 언제부터인가 요일을 정해두고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내일 가야지 이러다가 결국 주말이 오더라고요. 딱히 약속이 없으면 화요일에도 가고 수요일에도 그림을 그립니다. 주중에 바빠서 가지 못하면 토요일 아침 일찍 화실을 찾아요. 다들 회사 다니면서 어떻게 그러냐고 하는데, 제게 그림 그리는 2~3시간은 회사 동료들과 남아 불평하는 시간보다 짧고 유익했습니다. 쓸데없는 야근과 의미 없는 만남을 줄이니 확실히 제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 시간을 그림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기존의 다른 많은 책들이 ‘퇴사 준비’나 ‘퇴사 이후의 삶’ 등에 초점을 맞춘 반면에, 이 책은 퇴사가 능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과 ‘나다운 삶’의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까요?


균형을 잘 잡는 노하우라기보다는, 그냥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소극적이고 멋없는 월급쟁이의 삶일 수도 있겠죠. 저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서른 중반이 되면서 친구, 후배들이 자기 사업을 시작하거나 프리랜서, 교수가 되어 있더라고요. 저는 여전히 일개 직장인인데. ‘난 그동안 뭐 했지?’라는 생각도 들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고민되었습니다. 내 탓을 할 용기마저 없어 애꿎은 직장을 원망하고 매일 불평불만만 늘어놨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들었죠. 보란 듯이 퇴사하고 나서 먹고살 거리도, 용기도 없다면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들로 하루를 낭비하지 말자고.


한 걸음 물러서 보면 직장인이 마냥 나쁘지는 않습니다. 개인 사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들도 나름의 고충들이 있는데, 그들의 SNS 속 모습만 보고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직장인의 최대 장점은 어쨌든 한 달에 한 번 스치듯 돈이 들어오고 퇴근 후에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퇴근해도 따라오는 스트레스는 애사심을 조금만 버리면 해결이 됩니다.


사장님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사실 회사는 우리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월급만큼 최선을 다해 일하면 됩니다. 그 이상을 해주다 보니 지치고 서운한 나머지 사직서를 품게 됩니다. 그러지 말고 월급만큼만 일하고 퇴근 후 자유로워지세요. 그러려고 직장인을 하는 거잖아요. 소위 말하는 ‘워라밸’을 실천하니 신기하게도 회사 생활도 조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월급이 필요하니 불만보다는 감사한 마음도 생겼습니다. 내 가치를 인정해주고 고용해주는 회사가 있다는 것은 직장인의 자부심이죠. (그러니 사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너무 어렵다거나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으셨나요?


처음에는 그림이 어렵다기보다는 따분한 점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30분 이상 앉아 있기도 힘들고 집중도 안 되어 자꾸 딴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실력이 는다는데 잘 되지도 않고 재미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오히려 스케치북 위로 연필 선을 따라 잡념이 따라다니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격이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게 되면서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고 선생님을 찾지 않고 끝까지 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집중의 순간을 맛보게 되었어요. 그날의 모든 일이 사라지고 온전히 나만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면서 그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바뀔 때마다 위기가 한 번씩 왔어요. 연필은 말씀드린 것처럼, 집중하지 못했던 것과 형태를 제대로 잡지 못해서 끙끙 앓았습니다. 연필에서 목탄, 수채화로 넘어갈 때마다 미술 도구에 적응하고 기술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해 매번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특히 유화는 지금도 고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림을 계속 그리게 되는 것은 어떻게든 완성이 되고, 완성된 그림 속에는 제 생각과 시간, 저도 몰랐던 혹은 잊고 지내던 모습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는 내내 그림과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며 위로받았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에서 오는 성취감은 아무래도 중독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겐 애쓰지 않고도 사랑하며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마주한 모든 일들에 악착같이 매달려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로 다가와서 좋았습니다.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서 좀 더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특별히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제가 목을 자주 삐끗한 적이 있습니다. 물리치료를 받다가 필라테스를 하면 좋다고 해서 거금을 들여 다녔습니다. 그래도 계속 목과 어깨에 담이 오고 나중에는 허리도 아프더라고요. 그러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마사지를 받으러 갔습니다. 마사지를 해주던 분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풀렸어요. 가만히 누워 있는데 왜 이렇게 어깨가 긴장하고 있냐며 힘을 풀라고 했습니다. “목에도 힘 좀 풀어요, 여기 쉬러 왔잖아요.” 이 말이 어찌나 서럽게 느껴졌던지, 눈을 덮은 수건이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잘 때도 힘을 잔뜩 주고 있으니 목이 결리고 어깨에 담이 자주 왔던 것이었어요. 요가를 배울 때도 항상 어깨에 힘을 풀라는 지적을 받았는데, 잠자는 동안에도 긴장하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그때부터 긴장하지 않는 연습을 했습니다. 일을 할 때는 어쩔 수 없더라도, 그 외 시간에는 적당히 애쓰지 않고 즐기며 하려고 해요. 하루 중 모든 긴장을 풀고 나와 놀아 주는 시간을 만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있잖아요.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이 되면서 정식 화가로서도 첫발을 떼셨습니다. 작가로서 앞으로 그려보고 싶은 주제나 스타일은 무엇인지요?


취미로 그림을 그릴 때는 내 방에 걸어두거나 선물할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좋아하는 그림이나 배우의 사진을 찾아 고민 없이 바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나름 화가라고 하니 저만의 화풍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그림을 구상해야 하니 쉽게 그림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서명을 할 때도 작가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내 그림에 대한 책임감도 커졌습니다. “아무나 다 화가잖아.”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그림의 완성도를 위한 공부도 하게 되고요. 무엇보다 작가의 애정이 묻어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그릴까’에 대한 고민은 작가가 되기 전부터 해왔는데, 일상의 발견을 소재로 그리고 싶어요. 이번 책에서 ‘나를 위한 시간의 발견’을 글로 담으면서 다시 한번 공감하고 그것에 영감을 얻어 그림에서도 담으려고 합니다. 평범하지만 빛나는 일상을 나답게 그리고 싶어요. 인상파나 야수파의 그림에서도 그 시대의 일상을 볼 수가 있는데, 제가 그린 오늘의 평범한 일상을 미래의 누군가가 보고 “이때는 종이책을 읽었구나.”라며 이야기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경험을 글로 써서 책까지 출간하셨습니다. 굳이 비교해보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글을 쓰는 것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만약 또 책을 쓰신다면 어떤 책을 쓰고 싶으신가요?


글을 쓰면서 정말 그림과 똑 닮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림 그리는 과정과 똑같았어요. 차이점은 글 쓰는 데는 돈이 안 든다는 것이지만, 앞으로도 글을 쓰려면 퇴사는 좀 더 미뤄야 한다는 것마저 그림과 닮았습니다. 무엇을 써야 하나에서부터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일치했어요. 교정을 할 때도 제가 급하게 써 내려간 글은 수정에 상당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구성 없이 급하게 그려 내려간 그림에 붓질 자국이 밉게 남아 있는 것처럼, 글도 못나게 티가 나더라고요.


특히 이 책을 쓰면서 다시 한번 저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나는 이렇게 시간을 보냈구나’ 하며, 제법 괜찮게 살고 있다고 안심했습니다. 자화상을 그릴 때와 같은 위안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설렘과 긴장으로, 보다 좋은 글이 되어야 하고, 나도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기분 좋은 그림이 되라고 주문을 걸었는데, 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을 쓰면서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이것도 그림과 비슷하네요. 지금은 (언젠가의) 개인전을 위한 그림과 함께 보여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유화 작품마다 이야기가 있는데, 작가노트가 아닌 한 편의 에세이로 작업 중입니다. 그런 다음엔 저의 게으른 시간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저는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10시간은 넘는 게으른 사람인데,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썼다고 하니 갑자기 사람들이 저를 보고 부지런하다고 합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제 게으름의 실체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꾸준하게 게으르면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게을러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직장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날에는 어떻게 이겨내시나요? 덧붙여서 현재 직장이 힘들어서 이직이나 퇴사를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를 후배 직장인 독자들에게 힘이 되는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10여 년간 직장인의 삶은 적응의 연속이었습니다. 신입사원에서 대리가 되기 전까지는 회사 일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퇴근 후 회사 일은 잊으려고 해도 잘 안 되었어요. 그때는 사회생활에 파이팅이 넘칠 때라 회사의 모든 사람과 친해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대리가 되고 팀장 역할을 하게 되면서 사회에서는 친구 아닌 사람과는 적당히 친해지고 인정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새 적응하여 프로 직장인이 된 저도 회사 일로 부들부들할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는 혼자서 시간을 보냅니다. 예전 같으면 사정을 잘 아는 직장 동료나 친구를 찾았는데, 부정의 기운만 더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집으로 향합니다. 분노의 정도에 따라 그림을 그리러 가기도 합니다. 화실에 가면 일단 회사 일은 잊을 수가 있습니다. 그림을 망칠 정도로 기분이 아닌 날에는, 이불 속에 숨어서 엄마에게 괜히 저녁을 안 먹었다고 카톡을 보내요. 엄마는 제가 당장이라고 쓰러질까 봐 뭐라도 챙겨 먹으라고, 또 다이어트 하냐고 잔소리를 하세요. 엄마 ‘관종’인 저는 그렇게 위로를 받고 잠을 잡니다. 정말 쓰러지면 안 되니까요.


사실 저도 요 며칠간 퇴사 욕구가 솟구칩니다. 직장 스트레스 컨트롤을 자신하고, 감히 조언해대던 저도, 사고 치는 대리님이 밉고 보고할 때마다 엉뚱한 소리를 하는 부장님이 이해가 안 됩니다. 아무래도 이 회사는 나를 담기에 너무 작은 곳이 확실합니다. 당장이라도 품고 있던 사직서를 던지고 싶은데, 다음 주에 써야 할 코발트블루 물감도 사야 하고 가을 재킷도 사야 해서 퇴근만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직해도 직장의 생태계는 반복될 테니 일단 우리 퇴사는 잠시 미뤄 보고, 남은 연차를 즐겁게 쓸 궁리를 같이해봅시다.

김유미

매일 똑같지만, 똑같지 않은 일상의 모습들이 예술이라 믿으며 그것을 매일 조금씩 그림으로 그려 나가는 사람, 그리고 매일 서울 지하철 9호선 속 수많은 인파와 함께 출퇴근길을 걷는 보통의 10년 차 직장인. 그 속에서 조금은 ‘반전’ 있는 직장인이 되고 싶어 2014년 여름 어느 날 취미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연필 소묘를 그려보고 목탄화, 수채화를 거쳐 요즘은 유화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여전히 하루 8시간을 직장인으로 살고 있지만, 저녁 7시가 되면 작가로 변신해 두 번째 하루를 시작한다. 지금은 개인전을 목표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마음속 풍경이 그림이 되는 순간, 그림 속 풍경이 글이 되는 순간들을 사랑한다.

글ㆍ사진 | 출판사 제공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는 잠시 미뤘습니다

김유미 저 | 쌤앤파커스

 

한 소심하고 평범한 직장인이 퇴근 후에 그림을 배우면서 발견한 인생의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들을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소박하게 기록했다. 애쓰지 않고도 사랑하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기 위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도서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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