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불멸을 꿈꾸며 기록을 남기다
우리 사회는 지금 쓰는 중이다. 대학의 ‘인문학적 글쓰기’, 시니어센터의 ‘자서전 쓰기’, 평생교육센터의 ‘일상의 글쓰기’, 대학입시 학원과 취업 준비생의 ‘자기소개서 쓰기’ 등 여러 가지 종류의 글쓰기 모임마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출간하는 독립출간물이 쏟아지고 있으며 소셜 네트워크에 요리, 서평, 육아, 여행 등에 관한 글을 꾸준히 올려 단행본 독자에 못지않은 팔로워를 거느린 이들도 많다. 왜 쓰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시니어센터에서 자서전을 쓰는 할아버지는 “인간은 누구나 종국에는 작가를 꿈꾼다.”라고 대답하셨다. 인간, 기록으로 영원을 꿈꾸는가! 이 책은 인간이 기록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출발했다.
지금, 보통 사람들의 아카이브가 필요하다
스페인 북부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의 그림이 4만800년 전에 그려졌다고 하니 인류의 기록 행위는 탄생 초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다만 오늘날 컴퓨터, 휴대전화, 아이패드 등 디지털 기기의 개발과 다양한 매체의 발달 덕분에 널리 알려지고 대중화되었다 하겠다. 기록물의 형태 또한 다양해져 문서, 사진, 그림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음원, 동영상, 댓글 등의 자료가 쏟아진다. 누구나 자신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생각과 활동을 기록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었다.
쓰는 사람이 증가하고 양이 많아지자 기록물의 수집과 분류, 관리 및 폐기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원래 아카이브Archive는‘정부의 기록’ 혹은 ‘공문서’의 의미였다가 지금은 ‘기록’이나 ‘기록물을 보관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특정 계급이나 기관만이 기록을 생산하지 않고 누구든, 어디서든 기록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으니 우리네 삶의 일상을 담은 기록물이 지니는 가치를 돌아보고 기록물의 내용과 성격에 따른 관리, 폐기와 공유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다. 공문서와는 다른 아카이브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은 아카이브 방법론을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기록하는 풍경을 스케치하며 듣고 모았다.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가 왜 쓰는지 그 까닭을 묻고,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고유한 기록물의 관리 방법들이 그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기록하고 기록물을 살피는 행위는 자신을 만드는 과정이다. 기록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기록은 살아가는 목적이자 방법이며 생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불멸을 꿈꾸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모든 기록물은 공공성을 지닌다
이 책은 보통 사람들의 기록물이 지닌 공공성에 주목한다. 오롯이 사적인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온전한 내 생각도 다른 사람과 사회,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성된 ‘공유된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다. 사고의 가장 근본적인 틀인 언어는 사회적 약속으로 인간의 생각과 활동은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의 독자성은 사람들과 더불어 엮이며 사회로 흘러나왔다가 다시 자신만의 창의적인 생각과 행동을 잉태한다. 국가 주도로 작성된 기록물이 아닌 민간 아카이브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 개인의 기록물이 지닌 공공성에 주목하는 까닭은 기록이야말로 우리의 ‘공유 기억’을 만드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유의 틀을 만들어 사람들이 더 나은 미래와 인류의 삶을 꿈꾸도록 돕는다. 이를 기록의 확장성이라 하겠다. 이렇듯 기록의 공공성과 확장성에 주목하다 보니 기록의 보관과 폐기를 결정하는 기준에서도 사회적 의미를 살피게 된다.
개인의 사적인 글쓰기와 그 기록물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밝히고 공공기록물로 인지, 공유, 활용할 방법을 꾀한다면 개인을 넘어 더불어 살아가는 ‘인류’가 될 것이다. 누구나 저만의 방법으로 자유롭고 다양하게 글을 쓰지만 ‘더불어’ 인류가 되는 일은 또 다르다. 광장에서 기록물을 펼치면 사라질 기록과 남겨야 할 기록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많아진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돌아보기, 보통 사람들의 느린 아카이브를 제안한다. 우리는 그동안 빨리, 그리고 많이 생산하느라 지속할 수 없는 미래를 만들었다.
아카이브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경쟁을 멈추고 함께 돌아보게한다. 기록물들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그 보존과 폐기를 결정하면서 개인으로서의 나와 사회적 인간인 나, 그리고 내가 사는 세상을 본다. 부분적인 쓰기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물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진다. 아카이브는 나의 성장과 시대적 흐름을 한 타래로 엮는 일이다. 보통 사람들의 기록물에 공공성을 살피는 일은 개인에게서 인류를 발견하는 일이다. 인류를 만드는 일이다.
기록이 내는 저마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메모리카드의 용량이 아무리 커도 기록하는 모든 것을 보관할 수는 없다. 생산량이 많을수록 관리가 중요하다. 잘 분류되지 않은채 쌓아 놓기만 한 자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선택과 폐기, 분류가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의 아카이브는 쓰는 사람과 기록물을 관리하는 아키비스트가 같다. 우리는 ‘쓰는 나’와 ‘관리하는 나’를 구분해야 한다. 아키비스트가 되어야 한다. 기록물에는 저마다 소리가 있다. 그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릴 것인가? 아키비스트는 기록물로부터 거리감을 확보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기록물을 생산하는 제1의 나도 아니요, 기록물을 살피는 제2의 나도 아니요, 주관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쟁취한 ‘제3의 나’가 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인천의 팟알 카페 |
기록을 일상의 문화공간으로 끌어오는 ‘기록문화 생태계’
이 책에서 다루는 또 하나의 주제는 기록물의 활용이다. 역사관이나 박물관의 기록물이 아무리 쌓여도 사람들이 읽지 않으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것과 같다. 기록물이 생활공간에서 일상으로 사람들과 만나야 스스로 소리를 만들어내며 그 울림이 멀리 간다.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한 기록문화를 셜록 홈스 박물관, 비틀스 애비로드, 네스 호 박물관, 전통민박집 B&B 등의 공간에 전시하고 생활용품으로 디자인하여 국내외에 수출하는 영국의 사례를 통해 ‘기록문화 생태계’ 조성과 기록물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가늠하고자 한다. 또한 인천의 팟알 카페와 포천 재인폭포상회 프로젝트, 언니네 텃밭의 씨앗 아카이브에서 우리네 삶의 풍토에 필요하고 알맞은 기록문화와 일상적 향유의 가능성을 살핀다. ‘기록문화 생태계’를 만들면 생산하고 수집한 자료들을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을 창조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할 수 있다. ‘기록문화 생태계’ 꾸리기는 문화 다양성을 얻는 가장 근본적인 활동이다.
스토리텔링 아카이브, 가 장 오래된 기억 전승 방법
마지막으로 아카이브의 구축 형태를 살핀다. 첫머리에서 인간은 불멸을 꿈꾸며 기록을 남긴다 했다. 이때 불멸은 개별적인 인간의 불로장생이 아니다. 인간은 결국 죽는다. 전 생애에 걸쳐 축적한 기억과 경험이 다음 세대에게 전승된다. 개별적인 인간은 소멸하되 기록하는 인류는 미래를 꿈꾼다. 수만 년 동안 단 한 번의 쉼 없이 기록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기록을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이야기로 들려주는 아카이브를 상상한다. 인류는 생존의 키워드를 이야기에 심었다. 가장 오래되었으나 미래적이며 근본적이나 가장 쉬운 이야기 들려주기 방법은 아카이브에 생기를 불어넣어 흥미를 유발하고 삶 속으로 가까이 들어오게 할 것이다.
기록은 목소리를 가져야 하고 그 소리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아카이브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억저장소이기 때문이다.
안정희 저 | 이야기나무
이 책은 기록하려는 인간, 그 기록을 수집하려는 인간, 수집된 기록을 재해석해서 다른 것을 창조하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어떤 기록을 물려받았는지를 살아 있는 동안 되새김질하는 자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카이브는 멀게는 앞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기록이며 가깝게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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