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보면 나는 좋아하는 일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월말이면 꼬박꼬박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던 그때의 안정감이 그립다. 주 5일을 일하면 이틀은 무조건 쉬던 그때의 여유가 그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사원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미래에 대한 안정감보다, 일과 삶의 균형보다 소중한 것을 배우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처방이 간절했던 나는 지인의 소개를 받아 심리상담소를 찾았다. 상담 첫날,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면서 “그동안 정말 힘들었겠어요” 하고 말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힘들어도 참아야 한다고 다그치거나, 엄살 부리지 말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지.
“분명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왜 이렇게 지친 걸까요? 모른 척하고 계속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다 그만두고 쉬어야 하는 건지,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어요.”
“지혜 씨는 서점 꾸려 가는 일을 좋아하는 것도 맞고 잘하는 것도 맞아요. 다만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진짜 지혜 씨가 아닐 뿐이죠.”
“진짜 제가 아니라고요?"
“게으름 피우고 싶고 무례한 손님에게 화내고 싶은 지혜 씨는 저 구석에 숨어 울고 있는데, 친절하고 다정하고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지혜 씨의 존재만 점점 커져가고 있잖아요. 지금 그 간극이 너무 커서 지혜 씨가 힘든 거예요. 지혜 씨 안의 못난 나도 인정해주고 사랑해주세요.”
“도대체 어떻게요?”
선생님은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 9개월 동안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어둠 속에는 서점 안을 분주히 오가며 일하는 내가 있었다.
“왼손을 들어 가슴에 올려 보세요. 그리고 위아래로 쓰다듬어 주면서 지난 9개월 동안의 지혜 씨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댐이 무너지듯 가슴속에 꾹 갇혀 있던 어떤 감정이 쏟아졌다.
“지혜야,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그때 깨달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스스로의 인정과 위로였다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 힘들면 하지 말라고 말하던 남편의 냉정한 조언도 속상했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던 아빠의 잔소리도 서운했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만 스스로를 칭찬하고 인정하면서 나도 모르게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 뒤로도 선생님과 몇 번 더 만나면서 지쳐 있던 나를 다독여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법과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법 등을 배웠다.
나를 위한 첫 번째 처방은 운영 규칙을 만들어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운영 시간이 불규칙하다는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사적인 시간에 손님의 연락이 오면 짜증을 내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영업 시간을 오후 1시부터 8시까지로 정하고, 그 시간 안에 온 연락만 확인했다. 오후 1시가 되면 마음속으로 출근 스위치를 켰고, 8시 이후로 들어오는 문의는 확인하지 않고 다음 날 오후 1시 이후에 처리했다. 이렇게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훨씬 줄어들었다.
두 번째 처방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을 위한 책을 처방하는 데는 최소 다섯 시간 정도가 걸린다.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한 시간, 처방할 책을 읽고 고르는데 필요한 서너 시간, 그리고 편지 쓰는 한 시간. 그러나 당시 나는 오백 자 분량의 편지를 쓰는 데만 서너 시간이 걸렸다. 손님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지혜 씨, 백 퍼센트 만족은 신의 영역이에요. 왜 타인의 마음까지 컨트롤하려고 해요?”
선생님의 말에 순간 쾅하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손님의 평가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손님에게 만족스러운 피드백이 오지 않거나 재방문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더 좋은 책을 고르지 못한 나를 책망했다. 처방한 책에 대한 피드백은 손님 몫이라는 걸 받아들이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단 한 명의 책도 성의 없게 고른 적은 없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다음은 손님에게 넘기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자, 자연스레 편지 쓰는 시간은 서너 시간에서 한 시간 안팎로 줄어들었다.
세 번째 처방은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업무량이 늘어났으니 직원을 뽑을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오픈 초기부터 자주 받은 질문이었다. 그때마다 사적인서점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나답게 즐겁게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쭉 혼자 할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선생님은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예전 방식을 고집하는 게 옳은 일이냐고 되물었다. 두 달치 예약이 하루 만에 마감될 정도로 책처방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는데, 혼자서 그 많은 예약을 전부 소화하기는 버거웠다. 몇 달 동안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마침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던 동료가 퇴사 후 쉬고 있던 무렵이어서 함께 책처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최혜영 책처방사의 합류 이후 나에게 처음으로 휴무일이 생겼다. 책처방 프로그램은 책처방사의 성격, 가치관, 독서 취향에 따라 전혀 다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다양한 책처방을 받을 수 있어 손님들의 반응도 좋았다. 무엇보다 새로운 책처방사의 합류는 그동안 혼자서 하느라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환기시켜주었다. 나를 위한 맞춤 처방이었던 셈이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 『지지 않는다는 말』 , 김연수 지음, 274쪽
돌이켜 보면 나는 좋아하는 일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도 지겨워질 수 있고, 좋아하는 일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난 지금, 나는 안다. 절대적으로 즐겁고 보람 있으면서 돈까지 잘 버는 일, 그런 일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회사원으로 일하는 것에도, 자신만의 가게를 꾸려가는 것에도 각자의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반짝이는 빛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이제 나는 안다. 서점을 꾸려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고 막막한 일이다. 물론 생각보다 훨씬 보람차고 즐거운 일도 많다. 겪을 땐 죽을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니 선물처럼 느껴지는 일도 있다. 직접 서점을 열고 몸으로 경험하지 않았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 것들이 하나둘 마음을 채워간다.
글ㆍ사진 | 정지혜(사적인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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