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우울증을 잊는다, 맛있는 도시 '파주'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의 봄 풍경 |
파주에 10년을 살며 알게 된 건 이 도시가 지나치게 맛있는 곳이라는 것.
장어, 두부, 막국수, 돼지갈비, 순댓국, 칼국수, 부대찌개, 파스타 등등, 거기에 수준급 커피를 만날 수 있는 카페도 많다.
●우울증 초기입니다
병원 로비에서 수학 문제집 같은 설문지를 30분 동안 작성한 후 찾은 상담실. 의사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밀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증상이니까요. 지금 나이면 한 번쯤 찾아옵니다. 1년 정도 치료하면 나아질 겁니다.” 우울증이 시작됐다.
임진강의 저녁 무렵. 강과 하늘이 붉게 물든다 |
●우울증엔 맛있는 음식이 가장 좋은 치료제
의사는 ‘세로토닌(serotonin) 결핍으로 생긴 우울증’이라고 설명했다. 세로토닌은 인체가 분비하는 화학 물질로 신경 전체에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의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조급함, 스트레스, 우울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허리나 등이 아프지는 않으세요?” 하고 의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우울증의 한 증상입니다. 우울증은 정신뿐만이 아니라 신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일 때 근육의 수축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의사는 컴퓨터에 처방전을 입력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고 심각한 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로토닌 결핍은 왜 생기는 거죠?” 내가 묻자 의사가 대답했다. “비타민이나 미네랄이 부족해서 그런 겁니다. 술을 너무 마시는 것, 햇빛 부족도 원인이 됩니다.” 그렇군. 모든 게 빌어먹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야. 집 안에만 너무 틀어박혀 원고만 쓰고 술만 마셔댔던 거지. 밖으로 쏘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대야 하는데 통 그러질 못했어. “고등어, 연어, 참치, 고기, 치킨, 달걀, 치즈, 견과류, 초콜릿 등이 세로토닌의 분비를 촉진시키는 음식입니다. 많이 많이 많이 드세요.” 의사는 분명 ‘많이’를 3번이나 강조했다. 다이어트도 원인이었던 거야. 젠장, 오늘부터 많이 많이 많이 먹어 주마. 병원 문을 나서며 다짐했다. 따가운 햇빛이 눈을 찔렀다.
병원을 다녀와 아내에게 말했다. “둘이서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자.” 물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은 숨겼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맨날 맛난 거 먹으러 다니는 사람이.” 아내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뭐, 앞으로 우리 둘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20년 정도 남지 않았을까나. 남은 세월 맛난 거나 먹으러 다니면서 그렇게 설렁설렁 사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점심은 심학산 두부마을 어때.”
심학산은 파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30분이면 정상까지 오른다. 맑은 날이면 개성 송악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둘레길도 만들어져 있어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모이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식점들이 들어섰다. ‘심학산 두부마을’은 파주 특산품인 파주 장단콩으로 장과 두부를 만드는 집이다. ‘퉁퉁장’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메뉴가 있다.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보광사 |
●퉁퉁장을 아시는지요
“퉁퉁장이 뭐야?” 자리에 앉으며 아내가 물었다. 네이버를 열었다. “청국장의 충청도 방언이라는군. 끓일 때 두부와 함께 넣는데 퉁퉁거리는 소리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네.” “아, 청국장! 청국장은 출판단지 입구 진달래가 맛있는데.”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렇지. 그래도 오늘은 여기서 먹어 보자. 근데 이 집 퉁퉁장은 청국장은 아니고 우렁이가 들어간 강된장이라고 하는군.”
우렁이 푸짐하게 들어간 퉁퉁장. 구수한 찌개 내음에 겨우내 달아났던 입맛이 돌아온다 |
주문하니 밑반찬들이 먼저 깔린다. 콩나물무침, 꽈리고추 멸치볶음, 느타리버섯볶음, 취나물무침, 올방개묵무침, 가지볶음 등등. 나이가 들수록 맛있어지는 것들이다. 두부가 나왔는데 해초 같은 것이 섞여 있다. 먹어 보니 매생이다. 두부에 매생이를 넣은 매생이 모두부는 처음이다. 메인은 퉁퉁장과 콩비지. “강된장은 되직하게 끓였구나. 아,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뭔가 상당히 아저씨 같다.” 아내가 답했다. “아저씨잖아.”
삼학산 두부마을의 퉁퉁장 정식 |
퉁퉁장에는 우렁이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한 숟가락 떠서 먹어 보니 짜지 않고 구수한 감칠맛이 강하다. 주인은 이 장을 짜게 하지 않으려 많이 노력했다고 한다. 된장에 삶은 보리와 콩을 넣고 일주일을 숙성해서 내놓는다고 한다. 콩비지도 담백해서 그대로 막 퍼먹어도 괜찮을 정도다. 벽에는 맛있게 먹는 법이 적혀 있는데, 대접에 밑반찬과 퉁퉁장을 넣고 비벼 먹어도 되고 김에 싸 먹어도 된다고 한다. 유명인사들의 사인도 빼곡하게 붙어 있다. 허영만 선생님도 이미 다녀가셨구나. 이 집은 밥을 다 먹고 나오며 ‘아, 잘 먹었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집이다. 이 집 옆으로 곤드레밥집과 도토리묵집이 붙어 있는데, 두 곳 모두 이 집에 뒤지지 않는 맛을 자랑한다.
심학산 두부마을
주소: 경기 파주시 교하로681번길 16
영업시간: 매일 09:30~21:00(매주 월요일 휴무, 공휴일 정상운영)
전화: 031 941 7760
가격: 퉁퉁장 정식 1만원, 해물두부전골 3만원
철조망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포비 DMZ. 설치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
●텅 빈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
밥을 먹고 자유로 드라이브 겸 커피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파주에는 최북단 카페 ‘포비 DMZ’가 있다. 파주에서 라떼가 가장 맛있는 곳이다. 자유로를 끝까지 타고 가면 닿는다. 포비 DMZ는 사방이 통유리로 된 단층 건물이다.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우두커니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티스트가 설치한 작품 같기도 하다. 실내에는 2개의 스탠딩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건물 앞에는 철책이다. 여기는 파주. 어딜 가나 철책을 쉽게 볼 수 있다. 철책 너머로는 DMZ다. 포비DMZ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철책 너머 비무장지대를 멍하니 바라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미니멀한 인테리어는 차분히 철책 너머 빈 공간을 바라보라는 포비 DMZ의 의도된 배려다.
시원한 통요리로 지어진 포비 DMZ의 내부 |
북녁땅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 |
“이 집 라떼 맛있다.” 아내가 말했다. 누군가 내가 데려간 음식점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다. 포비 DMZ는 서울 합정동 본점에서 로스팅 한 ‘DMZ’와 ‘Smoke’ 원두를 사용한다. DMZ는 중배전 원두인데, 이는 파주라는 지역적 특징을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중립과 융합의 의미를 담아 맛과 향, 질감을 균형감 있게 분배했다. 커피를 마시며 눈앞에 펼쳐진 빈 들판을 본다. 멀리 기러기 떼가 날아가고 있다. 살면서 이런 느긋한 풍경을 가진 카페를 확보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매일 매일 이어지는 마감과 업무 그리고 사람들과 얽힌 관계 속에서 지치다가 이런 풍경을 앞에 두고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으면 머릿속에 가득한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 든다.
포비 DMZ
주소: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로 1771
영업시간: 평일 09:00~18:00(주문 마감 17:30), 주말 및 공휴일 09:00~19:00(주문 마감 18:30)
전화: 070 7774 6552
가격: 블랙 커피 3,800원, 핸드 드립 4,500원
●나이가 들어서 더 좋아졌습니다
파주에는 아주 맛있는 막국수집이 두 곳 있다. ‘오두산막국수’와 ‘장원막국수’다. 오두산막국수는 헤이리 입구에 있다. 오두산막국수를 처음 찾았을 때를 기억한다. 벌써 10년 전이다. 파주로 이사 오자마자 오두산막국수로 달려와 막국수를 시켜 먹었다. 그때 3살이었던 딸은 지금은 자라서 초등학생 소녀가 됐다. 육수가 담긴 커다란 냉면 그릇을 들고 육수를 마시던 딸은 이제 불닭비빔면과 짬뽕을 야무지게 먹는다. 오두산 막국수는 메밀음식 전문점이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도 등장했다. 양념이 자극적이지 않고 메밀의 향과 식감이 제대로 느껴지는 면발이 경기 북부에서는 최고라고 할 만하다. 슴슴하고 은근한 육수도 수준급. 어떤 이는 막국수보다 빈대떡이 맛있다고 한다. 돼지기름으로 바삭하게 구워 낸다.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오두산 막국수의 빈대떡을 생각하니 군침이 고인다.
오두산막국수의 물막국수. 막국수에서는 그윽한 메밀향이 난다. |
오두산막국수의 비빔막국수 |
장원막국수는 교하 신도시에 있다. 100% 순메밀을 쓴다. 주문을 받아야 반죽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오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린다. 물막국수, 비빔막국수, 들기름막국수가 있는데 다 맛있다. 개인적으로는 들기름막국수를 추천한다. 들기름을 넉넉하게 뿌리고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낸다. ‘고소하고 고소하고 또 고소하다’는 것이 먹어 본 이들의 평균적인 평가다. 테이블에는 설탕과 식초가 올라와 있고 막국수를 시키면 무채나물과 열무국수가 반찬으로 나온다. 옛날 방식이다.
돼지기름으로 지진 오두산막국수의 빈대떡은 고소하고 바삭하다 |
뭐랄까, 막국수를 먹을 때마다 ‘아, 이젠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맛이 점점 좋아지다니 말이야.” 빈 그릇을 내려놓으며 아내에게 말하니 아내 역시 “그러게. 우리도 나이가 들어가는 거지, 뭐.”라고 대답한다. 그러게. 문득 서서 뒤돌아보니 여기까지 왔다. 아내는 흰머리가 많이 늘었다. 나는 눈이 어둑해졌다. 노트북으로 원고 작업을 하다 보니 목과 어깨에 무리가 왔다. 그래서 노트북 거치대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서 작업하는데, 그러다 보니 노트북 모니터가 뒤로 밀려났고 ‘워드’의 글씨가 안 보인다. 할 수 없이 폰트를 키웠다. 자려고 누웠는데 팔목이 아픈 날도 있는데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낮에 택배로 온 사과상자 같은 것을 옮긴 날이다.
장원막국수의 물막국수와 들기름 막국수 |
막국수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좋아지는 음식 같다. 막국수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바뀌는 것이 많다. 메인 음식보다는 콩자반이며 멸치볶음 같은 곁다리 반찬이 더 좋아진다. 이것들을 한 젓가락씩 집어 먹으며 막걸리, 소주를 마시다 보면 두루치기니 아구찜 같은 메인 음식에는 젓가락이 잘 안 가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기계나 ‘프로그램’과는 멀어지게 된다. 얼마 전 줌(ZOOM)으로 강연을 해야 해서 줌을 설치하고 테스트를 해보는데 아무리 해도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4학년 딸아이한테 물어보니 무심하게 버튼 하나를 눌러 주고 간다. 이게 안 켜져 있잖아. 그래도 다시 젊어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누군가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 것 같다.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진심이다. 20대, 30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은 너무 힘들었고 우울했고 난폭했다. 롯데 자이언츠가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1992년, 마지막으로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했던 1999년 말고는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지난해까지 저는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었습니다. 지금은 NC 다이노스입니다).
막국수 한 그릇에 달린 사설이 너무 길었다. 그만큼 막국수가 맛있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길. 물건으로 가득 차 있는 것보다는 어딘가 비어 있는 느낌이 좋은데 막국수가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막국수 앞에서는 ‘적당한 양만 먹어야 속이 편하다’라는 논리는 먹히지 않는다. 막국수를 먹을 때마다 과식을 하게 된다. 막국수집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후회하지만 ‘괜찮아, 막국수는 금방 소화가 돼’ 하며 위로한다.
오두산 막국수
주소: 경기도 파주시 평화로 204
영업시간: 평일 11:00~21:00(연중무휴)
전화: 031 944 7022
가격: 물메밀국수 8,000원, 쟁반메밀국수 2만1,000원
장원막국수
주소: 경기 파주시 안개초길 18-2
영업시간: 평일 11:00~16:00(매주 화요일 휴무), 주말 및 공휴일 11:00~20:00
전화: 031 943 9355
가격: 비빔막국수 9,000원, 들기름막국수 9,000원, 물막국수 9,000원
벽초지 수목원에서 맞이한 봄 |
●오늘은 어제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날
오늘은 아내와 ‘뼈국수’를 먹으러 갈 예정이다. ‘교하제면소’라고 새로 생긴 집이다. 진하게 우린 육수에 칼국수 면이 담겨 있고 커다란 등뼈 하나가 얹혀 있다고 한다. 요즘 ‘파주러’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하니 가 보려는 참이다. 고기를 잘게 갈아 넣은 비빔국수도 맛있고 만두도 괜찮다고 한다. 이것 말고도 파주에는 먹어야 할 음식이 많다. 진짜 맛있는 돼지갈비집과 이북식 만둣국을 파는 식당도 있다. 칼칼한 국물이 일품인 손칼국수집과 잔치국수와 돼지갈비를 함께 내주는 집도 있다.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카페와 비건 식당도 있다.
교하제면소의 뼈국수. 커다란 등뼈가 들어 있다 |
파주의 음식을 떠올리다 보니 우울증이 나아지는 것 같다. 그렇지, 세상에는 이렇게 먹을 게 많은데 세상을 우울하게 살 필요는 없지. 우리에게 남은 날은 어제보다 하루 줄어들었으니까,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거지.
교하제면소의 비빔칼국수 |
어쨌든 지금은 아내와 함께 국수를 먹으러 가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식당으로 향하는 길, 아내에게 묻는다. “요즘 들어서는 한 번 간 식당에 또 가는 건 뭔가 낭비하는 것 같아. 세상에는 이렇게 가야 할 식당이 많은데 어떻게 같은 음식을 또 먹을 수 있겠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아내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닐까.
교하제면소의 만두 |
교하제면소
주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평화로 725
영업시간: 매일 11:30~20:30(월요일 휴무)
전화: 031 957 8989
가격: 뼈칼국수 9,000원, 비빔칼국수 9,000원, 고기만두 5,000원
글·사진 최갑수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