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백암, 순대로 통하다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백암면은 많은 사람을 끌어모았다. 언제나 북적이던 이곳은 그들의 허기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대한민국 순대 1번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백암을 꾸미는 말
소박, 비옥, 청정
1914년 용인군으로 편입된 백암면. 지리적으로 경기도의 중심에 자리해 물자들이 오고 가는 통로였다. 과거 조선시대 때에도 영호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라 백암 시장의 규모는 꽤 컸다. 상인들은 시장을 찾는 이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순대를 만들기 시작했고, 땅이 비옥해 밥맛도 좋았다.
지역은 긴 세월을 거치며 ‘백암순대’와 ‘용인 백옥쌀’이라는 브랜드를 키웠고, 소박한 멋이 남아 있는 지방 도시로서 용인을 지키고 있다. 고층 건물 대신 2000년대 초반 감성이 묻은 상가와 간판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대에 한껏 따스함을 머금는데,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인상을 받는다. 큰 도심에서 만날 수 없는 백암만의 다정함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역민 사이에서도 느낄 수 있다. 토박이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인심과 정이 남아 있는 지역이라 앞으로도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고.
백암면의 젖줄인 청미천도 은은한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한강처럼 깔끔한 산책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정겨운 인상을 준다. 물이 좋은 건 동물도 알아보는지 수많은 오리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거창한 건 아니지만, 귀여운 모습에 멍하니 보게 된다. 그렇게 청미천을 따라 걷다 보면 백암교 위에 선다. 이곳에서 백암중고등학교와 상암교, 청미천 등이 어우러진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정적이면서도 평화롭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백암면의 오늘을 확인하기 위해 중심가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백암이 지닌 전통문화와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확인했다.
백암시장과 백암 백중문화제 그리고 백암순대거리는 지금의 백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백암시장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전통5일장이다. 특히,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큰 우시장이 섰던 곳이다. 과거의 영광은 지나갔고, 우시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여전히 교류의 장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대신 요즘 백암시장은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만물시장으로 지역민과 여행자를 맞이하고 있다. 장이 서는 날이면 농수산물, 의류 및 잡화, 전자제품, 모종, 생필품, 각종 먹거리 등 엄청난 양의 상품들이 백암면을 채운다.
특정 구역에만 시장이 열리는 게 아니라 골목골목에도 노점상이 들어서 백암 중심지 전체가 시장으로 변신한다. 하나하나 보는 것만으로도 한나절은 필요하다. 구경하다 지치면 꽈배기, 호떡 등 간식을 먹거나 테이블이 깔린 곳에서 막걸리와 족발을 즐기면 된다. 물론 백암의 명물 백암순대도 빠트릴 수 없다. 시장은 해질녘까지 운영되니 너무 늦지 않게만 가면 된다.
주민들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00여 년을 이어져 오다 중단된 백암 백중문화제도 2011년 되살려 냈다. 백암면 주민들은 마을 공동체를 회복하고, 지역 문화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2011년 다시 축제를 열었고, 올해까지 9번의 행사를 진행했다. 백중(百中)은 음력 7월15일로, 농부들이 잠시 일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던 농부들의 명절이다.
축제도 이날 즈음에 열린다. 옛 풍습을 따라 씨름과 농악은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다. 과거 백중 때도 청미천 근처 다리 밑에서 송아지를 경품으로 걸고 씨름 경기를 했다고. 동네에서 힘깨나 쓴다는 농부와 머슴들이 경쟁했으며, 흥을 돋우기 위해 농악을 울렸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가요제, 전통공연, 전통문화체험, 먹거리 장터, 전시 놀이 체험 마당 등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채워진다. 이틀 동안 백암은 즐거움이 가득한 지역이 되고, 때가 맞으면 백암5일장까지 열려 백암이 선사하는 모든 여행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의 먹거리 유산
백암순대
백암은 순대로 통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때 우시장의 유명세로 많은 상인이 백암으로 모였는데,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게 백암 순댓국이었다. 백암순대는 돼지 소창에 부속 고기와 채소 등을 듬뿍 넣어 만든다. 또 재료를 완전히 다지지 않아 씹는 맛을 살렸다. 이는 생활이 어려운 장터 사람들에게 고기 씹는 포만감을 느끼게 해주기 위한 상인들의 배려였다고 한다. 이렇게 정성 들여 만든 순대를 활용한 순댓국은 상인들의 입소문을 통해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가 지금까지 이어졌고, 백암순대는 우리 전통 순대의 대명사로 굳혀졌다. 이제는 백암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백암순대라는 이름을 건 가게를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인지도가 높아진 덕분에 백암순대는 병천순대, 아바이순대와 함께 전국 3대 순대로 불리고 있다.
백암순대와 관련된 소소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현재 백암에 있는 순대집 중 3~4곳은 뿌리가 같고, 대중화에는 아낙네들의 공이 컸다는 점이다. 1대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백암에서 식당을 운영했는데, 우연히 남편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이러한 이유로 부인과 며느리들이 힘을 모아 오랫동안 식당을 운영하게 됐다. 우리가 맛보고 있는 백암순대는 그녀들이 가꾼 유산인 셈이다. 지금도 주방과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2대째 할머니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처음에는 순댓국 전문점이 아니라 찐빵, 한식 등 상인들의 온갖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음식을 파는 식당이었는데, 점차 순대만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게 되면서 순대 전문점으로 탈바꿈했다.
백암면과 상인회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은 백암순대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 조선시대 때부터 이어진 백암순대의 역사와 맛을 알리기 위해 ‘전통백암순대거리’를 조성했으며, ‘2023 경기도 구석구석 관광테마골목’ 활성화 사업에 지원 대상으로 선정돼 거리를 재정비했다. 백암순대 관련 벽화와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여행자와 백암순대를 잇기 위한 노력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백암순대를 만나 볼 차례. 백암순대거리에는 6곳(백암식당·풍성식당·백암이내순대족발·옥산가든 등)의 순대 전문 식당이 있다. 1940년대에 영업을 시작해 8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식당, 가장 많이 알려진 제일식당(1964년 개업) 이 두 곳을 중심으로 전국에 있는 식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혼자 방문하더라도 순댓국과 모둠순대를 같이 주문하기를 추천한다. 백암의 맛을 충분히 즐기기 위한 최적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중앙식당은 가장 오래된 백암순대 전문점으로, 양배추와 부추를 푸짐하게 넣은 담백한 맛의 순대가 명물이다. 당면순대와 완전히 다른 맛이라 처음에는 낯설 수 있지만, 물리지 않고 계속해서 먹게 되는 맛이다. 순댓국의 국물은 돼지 뼈를 12시간 동안 우려 묵직한 인상을 준다. 깔끔한 맛의 순대와 진한 국물의 조화가 훌륭해 금세 한 그릇 비우게 된다. 모둠순대는 순대와 머리고기 두 종류로 채워지는데, 작은 사이즈도 양이 상당해 술안주로도 좋다.
제일식당은 여러 미디어에서 조명을 받으면서 시간대와 상관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 순대는 고기도 채소도 듬뿍 넣어 풍성한 맛을 자랑한다. 입에 넣으면 고기와 채소의 폭발적인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 농후한 맛의 국물과 순대, 머리고기, 오소리감투 등이 가득한 순댓국, 순대+오소리감투+간이 함께 나오는 모둠순대, 오소리감투, 백암순대 등이 준비돼 있어 취향대로 골라 먹으면 된다.
무엇보다도 백암순대거리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성이다. 제일식당 김신표 대표는 “백암순대거리는 다른 먹자골목처럼 식당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저마다의 아이덴티티가 확실하다”라며 “5곳의 순대집이 직접 순대를 만드는 만큼 가게마다 맛이 달라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루 한 끼를 기준으로, 백암에 다섯 번은 와야 하는 이유다. 이어서 그는 “지금 가게를 운영한 지 60년 정도 됐는데 백년가게를 목표로 백암순대의 맛을 지켜 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 취재협조 기분좋은 Q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