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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를 간직한 '칠곡' 늦가을 가볼만한 곳

오래된 미래, 옛것이 현재에 빛나 미래를 밝히다

●1000년 은행나무의 전설

말하는 은행나무

경북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417,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옛 이야기를 간직한 채 가을을 보내고 있다. 1018년에 심은 것으로 추정한다는 안내판의 문구대로면 1000년이 넘었지만, 보호수를 알리는 나무 앞 푯돌에는 1993년에 보호수로 지정됐고, 수령이 950년이라고 새겨져있으니, 보호수 지정년도에서 30년이 지난 지금으로 치면 980살 먹은 나무다. 1000년에 가까운 ‘1000년 은행나무’라고 할만하다.

1000년 은행나무(말하는 은행나무) 굵은 줄기가 듬직하다.

1000년 은행나무(말하는 은행나무) 굵은 줄기가 듬직하다.

이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옛 대흥사 터이기도 하다. 대흥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됐다고 알려졌다. 지금도 옛 절터에 주춧돌과 부도가 남아있다. 옛 절터 아랫마을의 옛 이름이 퉁지미 마을이다. 옛날에 대흥사가 번창할 때 절에서 사용하는 놋그릇을 만들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1000년 은행나무는 옛 대흥사의 내력과 주변 마을 이야기를 간직한 채 지금도 가을이면 은행잎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1000년 은행나무(말하는 은행나무)

1000년 은행나무(말하는 은행나무)

1000년 은행나무는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었던 옛날에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던 나무이기도 했단다. 옛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농사의 풍흉을 점쳤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무엇에라도 기대어 풍년을 기원했던 사람들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1000년 은행나무 앞에 ‘말하는 은행나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 이 마을로 시집 온 새색시가 힘든 일을 겪을 때 마다 은행나무 앞에서 기도하며 마음을 달랬고, 꿈에 은행나무가 사랑하는 가족 중 한 명으로 변해서 위로해줬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안내판에 나오는 사랑하는 가족은 친정어머니였다. 퉁지미 마을로 시집온 새색시가 몇 년이 지나도 아기가 생기지 않아 대흥사 절터의 은행나무를 찾아가 기원하며 마음을 달랬다. 어느 날 밤 은행나무가 친정어머니로 변해 “보름달이 뜨는 날 은행나무에 가서 떨어지는 은행잎을 잡으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은행나무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 새색시는 꿈에 나타난 친정어머니 말대로 했고,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000년 세월은 은행나무를 신령으로 여기게 했다. 1000년 세월 동안 나무에 깃든 사람들의 기원은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1000년 은행나무(말하는 은행나무) 뒤편에 있는 대숲을 걸었다.

1000년 은행나무(말하는 은행나무) 뒤편에 있는 대숲을 걸었다.

1000년 은행나무(말하는 은행나무) 뒤편 대숲에 놓인 커다란 거울들

1000년 은행나무(말하는 은행나무) 뒤편 대숲에 놓인 커다란 거울들

노랗게 물들어가는 1000년 은행나무 뒤로 낡은 기와집이 보인다. 그 옆 대숲이 바람에 일렁인다. 대숲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큰 거울 몇 개를 가져다 놓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안내 문구도 있었다. 대숲은 우거졌으나 길지 않았다.  대숲이 통째로 일렁인다. 나도 숲이 된다. 바람이 나를 흔들며 소리 내며 지난다. 그곳의 모든 게 거울이었다.   

●올해도 열매가 주렁주렁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

칠곡 동부 도덕산 서쪽 해발 고도 약 400m 정도 되는 산중턱 작은 암자, 도덕암에 큰 이야기 세 개가 전해진다. 혜거국사, 고려 광종 임금, 그리고 800년 된 모과나무 이야기다.   


도덕암의 전신은 칠성암이다. 고려 광종 임금 때인 968년에 혜거국사가 절을 중수하여 칠성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절이 창건 된 건 그보다 훨씬 전인 435년(신라 눌지왕 18년)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

혜거국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의 큰 스님으로 여긴 인물이었으며, 고려 정종 임금은 혜거국사를 왕사로 모시기도 했다. 고려 광종 임금은 칠성암의 혜거국사를 국사로 모시기 위해 갖은 정성을 기울였으나 혜거국사는 광종의 뜻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에 광종은 직접 칠성암을 찾았고, 3일 동안 머무르면서 혜거국사의 마음을 얻었다. 고려 광종 때 국사를 지낸 혜거국사는 몇 년 뒤인 972년에 입적했다. 

고려 광종 황제 어정약수. 혜거국사를 국사로 모시기 위해 광종 임금이 직접 칠성암을 찾아 3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이때 광종 임금이 이 샘물을 먹었고, 앓고 있던 속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광종 황제 어정약수. 혜거국사를 국사로 모시기 위해 광종 임금이 직접 칠성암을 찾아 3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이때 광종 임금이 이 샘물을 먹었고, 앓고 있던 속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광종 임금이 칠성암에 머무를 때 마셨다는 샘물은 ‘어정수’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속병을 앓고 있었던 광종 임금이 칠성암에 머무는 동안 마신 샘물 덕에 속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혜거국사와 광종 임금의 이야기와 함께 전해지는 오래된 이야기의 주인공은 800년 된 모과나무다.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 굵고 울퉁불퉁한 줄기가 기운차게 보인다.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 굵고 울퉁불퉁한 줄기가 기운차게 보인다.

혜거국사가 절을 중수하여 칠성암이라고 이름을 지을 무렵 모과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때가 968년이었으니 현재 모과나무 옆에 보호수를 알리는 푯돌에 적힌 수령 800년 보다 더 오래 전이다. 혜거국사가 모과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에 무게를 둔다면 나무의 나이는 800년 보다 훨씬 더 되는 셈이다.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 모과나무 고목이 산하를 굽어보는 듯하다.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 모과나무 고목이 산하를 굽어보는 듯하다.

칠성암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 중수하고 인조 임금 때 나한전을 짓고 효종 임금 때 중수 한 뒤 1800년대 중반 철종 임금 때 몽계당 선의대사가 중수하면서 도덕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큰 법당 안으로 들어가면 몽계당 선의대사의 진영 복제품을 볼 수 있다.(진품은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있다.)  

사진 가운데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가 있다. 사진 왼쪽에 동명저수지(송림지)가 작게 보인다.

사진 가운데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가 있다. 사진 왼쪽에 동명저수지(송림지)가 작게 보인다.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에 올해도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도덕암 800년 모과나무에 올해도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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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산령각, 자응전이 나란히 이어지는 곳에서 800년 모과나무를 본다. 모과나무가 바라보는 먼 곳 풍경에 송림사 아래에 있는 동명저수지(송림지)가 작게 보인다. 늦가을 800년 모과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자식나무를 키우는 160년 된 탱자나무

창낙댁

‘이사 가던 날 뒷집 아이 돌이는 각시 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장독 뒤에 숨어서 하루를 울었고 탱자나무 꽃잎만 흔들었다네 지나버린 어린 시절 그 어릴적 추억은 탱자나무 울타리에 피어오른다~~’ 산이슬이 부른 노래 <이사 가던 날> 노랫말이다.   

창낙댁 탱자나무 고목. 굵고 울퉁불퉁한 줄기에서 힘이 느껴진다.

창낙댁 탱자나무 고목. 굵고 울퉁불퉁한 줄기에서 힘이 느껴진다.

그랬다. 가시가 크고 굵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지방을 돌아다니다보면 탱자나무가 있는 집을 간혹 볼 수 있다. 무려 500년 넘게 살고 있는 탱자나무도 보았다. 집 울타리는 아니었지만 대문 옆을 지키고 있는 탱자나무의 내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창낙댁에도 오래된 탱자나무가 있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아니지만 오래된 집과 역사를 함께 써내려가고 있는 탱자나무다.   

창낙댁

창낙댁

창낙댁 상량문에 적힌 건축 연도를 보면, 160년 정도 전에 지금의 창낙댁을 지은 걸 알 수 있다고 한다. 탱자나무 또한 당시 집을 지을 때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창낙댁 탱자나무를 보러가는 길, 흙돌담 기왓장에 올라간 고양이를 보았다.

창낙댁 탱자나무를 보러가는 길, 흙돌담 기왓장에 올라간 고양이를 보았다.

창낙댁 탱자나무는 지금도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탱자나무 고목 아래 떨어진 열매에서 자연발아 되어 자라는 작은 탱자나무도 있다. 이른바 탱자나무 고목의 자식나무다. 지난 봄 어느 날 창낙댁 탱자나무 아래 서있었다. 산이슬의 <이사 가던 날> 노래가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순전히 탱자나무 때문이었다. 

●40년 넘은 만두 세 친구 

지란방(芝蘭芳)

지란지교(芝蘭之交),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처럼 벗 사이에 맑고 고귀한 마음을 나누며 사귄다는 말이다. 경북 칠곡군 왜관 읍내 만두집 지란방(芝蘭芳)에 앉아 만두를 먹고 있으면 지란지교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의 맑은 기운이 꽃다운 향기(芳)와 함께 하는 지란방(芝蘭芳)이란 이름이 지란지교를 떠오르게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지란방 고기만두. 만두가 꽃송이 같다.

지란방 고기만두. 만두가 꽃송이 같다.

두 번째 이유는 식탁에 오르는 만두 모양과 맛이다. 소담하게 접시에 담겨 나오는 만두 모양이 꽃처럼, 잎처럼 보인다. 오래 된 우정처럼 모난 데 없는 담백하고 수수한 맛이다. 차림표에 적힌 고기만두, 꾼만두, 진교스가 지란방에서 파는 음식의 전부다. 진교스는 찐만두의 경상도식 이름이다. 군만두 보다 꾼만두, 찐만두 보다는 진교스라는 이름에 추억이 깊어지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닐 것이다. 

지란방 만두(왼쪽이 고기만두, 아래에 보이는 게 진교스, 그 위가 꾼만두다.

지란방 만두(왼쪽이 고기만두, 아래에 보이는 게 진교스, 그 위가 꾼만두다.

오래 전에 순심여고를 졸업하고 타지로 나가 살게 된 어느 아주머니의 사연이다. 그 아주머니의 자식이 왜관에 일이 있어 하루 묵게 됐는데, 아주머니가 자식에게 왜관 간 김에 지란방이 아직도 남아있으면 만두를 사다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자식은 짬을 내어 지란방을 찾았고 만두를 사오라시는 어머니의 사연을 지란방 주인에게 말씀드렸다. 지란방 주인은 만두를 굽거나 찐 뒤 포장한 채로 시간이 오래 지나면 제 맛을 느낄 수 없을까봐 만두를 만들어 요리하지 않은 채로 잘 싸서 줬다고 한다. 


일하러 왜관을 찾은 바쁜 자식에게 지란방 만두를 부탁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어머니가 맛본 것은 만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고시절 친구들과 지란방에서 만두를 먹으며 우정을 쌓아가던 그 추억을 맛보고 싶었을 것이다. 또 어머니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착한 자식의 마음과 제대로 된 만두 맛을 전달하기 위해 신경써준 지란방 주인의 마음 또한 ‘지란방’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 그대로다.

지란방. 지금 사장님이 1979년에 인수받아 지금까지 만두를 만들고 있다.

지란방. 지금 사장님이 1979년에 인수받아 지금까지 만두를 만들고 있다.

지금 지란방 사장님이 이 가게를 인수받은 건 1979년이라신다. 그 전에도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 사장님이 지란방을 운영한 역사만 해도 40년이 훌쩍 넘는다. 그러니 ‘지란방’은 만두와 함께 추억이 깊어가는 곳이 될 만하겠다. 고기만두, 꾼만두, 진교스, 만두 세 친구의 40년 넘은 우정처럼... 


글·사진 장태동 트래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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