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위장 메우러 '속초'
2월, 속초로 떠났다. 열린 위장을 메우러 바다로 떠났다.
겨울의 속초를 가면 눈을 뒤집어쓴 설악의 늠름한 육체미와 푸른 동해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
●설악산 반, 동해 반
바다를 다녀왔다. 내가 겨울 바다를 다녀온 이유는 팝 밴드 ‘푸른하늘’의 ‘겨울 바다’(1998)의 노랫말이 생각나서는 아니다. 수도권 거주자에게 흔히 있는 바다 결핍증이 있는 편도 아니다.
다만 이 추운 겨울에 제대로 맛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먹거리가, 그 차가운 물속에 가득한 까닭이다. 메워진 가슴을 여는 게 아니라 열린 위장을 메우러 가는 셈이다.
그 긴 동해 해안선에서도 속초를 고른 이유 역시 다른 곳에서 만나기 어려운 ‘겨울 바다’와 ‘제철 먹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분단 상황에서 동해안 최북단 시(市) ‘속초’는 정말이지 근사한 곳이다. 일단 땅의 절반 이상이 설악산 국립공원이며 나머지 반은 넘실거리는 동해를 바라볼 수 있는 해변을 향하고 있다.
해돋이 이벤트가 1년에 365번 펼쳐지는 곳이다. 뭐 운 때만 맞으면 이글거리는 태양의 맨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아직은 겨울 자락 아닌가. 대단히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길도 좋아져 마음만 먹으면 금세 도착한다. 직선거리 160km(도로 190km)로 서울에서 출발하면 2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도로 거리가 215km에 이르는 강릉보다 가까우니 서울과 가장 가까운 동해안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속초에 왔다.
속초는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지만, 문화의 다양성만큼은 대단하다. 인구 600만명이 넘고 한반도 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함경도민이 전쟁 때 일부 내려와 속초에 내려와 섞였다. 원래 모래밭이던 청호동 아바이 마을이 정착지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특유의 복합 문화가 태어났다.
서울 중구 오장동이나 부산 광복동 일대에 조금 남아있는 함경도 식당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유일한 ‘함경도 문화 마을’인 셈이다. 관북지방의 유명한 음식인 아바이순대와 가자미식해, 함흥냉면 등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라 근래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 중 한 곳이다.‘기린 발굽’ 인제군(麟蹄郡) 북면을 지나 미시령을 넘고 나면 바로 속초다. 알다시피 미시령은 굉장히 험준한 고갯길이다. 해발 고도 826m로 대관령(832m)이나 한계령(1,004m)보다는 낮지만 요즘 같은 겨울철 눈이 잦고 급경사 구간이 길어 지극히 위험한 도로였다.
2006년 속초로 바로 가는 미시령 터널이 생겨나고, 2017년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가 완전히 연결되며 속초가 수도권 쪽으로 성큼 다가선 셈이다. 터널을 지나면 다시 순백으로 뻗은 길은 곧바로 저 멀리 바다로 곤두박질친다. 해발 500~600m에서 순식간에 0m 이하 남양(藍洋)으로 잠기는 푸른 길이다. 일종의 관성이다. 속초의 바다 풍경은 여느 곳과 다르다. 워낙 작은 도시라 설산이 바다에 면해 있는 풍경이 근사하다. 강릉만 가도 이 같지 않다.
목말랐던 철도 소식도 들린다. 각각 부산과 춘천에서 출발하는 동해북부선과 춘천-속초선이 2028년 개통을 목표로 철로를 놓고 있다. 속초가 우리 옆에 왔다.
미시령터널을 지나면 설국이다. 봄이 오면 이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고 만다 |
●글로벌 속초예찬
부쩍 길이 좋아진 덕에 속초 해변에 호텔과 리조트, 펜션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공급 객실 물량이 속초 시민을 모두 다 재우고도 남을 정도다. 속초는 명실상부한 관광도시, 그래서 관계인구 포함 인구밀도가 꽤 높은 편이다. 관광객도 늘 수천 명 이상 와 있다.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차가 막힌다.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거리가 도처에 있다. 강원도 최소 면적 지방자치단체라 속초시 면적 자체는 좁지만, 그 안에 서랍처럼 빼곡히 들어선 즐길거리가 많아 1박 2일 일정으론 살짝 부족해 뵌다.
‘천하제일경’이라는 금강산과 견준다는 설악산을 품고 시내 바로 앞에 늘 푸른 동해가 있다. 영랑과 청초, 두 석호(潟湖)까지 안았으니 없는 게 없다. 여기다 억센 바다와 함께 싸우며 살아온 어민과 함경도 실향민 문화가 뒤섞여 다양성을 표출하는 도시다.
요즘처럼 추울 때가 제격인 온천도 많다. ‘핫플레이스’답게 예쁜 카페, 베이커리, 맛집도 줄줄이 들어서서 우직한 자연미에 도시 인프라의 디테일(세세함)을 채우고 있다. 겨울에 제 이름을 찾고야 만 설악(雪岳)은 좀 더 늠름해진 느낌이다. 하얀 망토를 두른 산은 영랑호와 청초호, 동해를 내려다보며 정초의 겨울을 지키고 섰다.
미시령 터널의 끝을 지나면 설국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글처럼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설악의 오른쪽 어깨엔 거대한 수석(壽石)을 닮은 울산바위가 버티고 섰다. 흰 비단을 두른 듯 고결하고도 씩씩한 자태로 여행객을 맞는다. 옛 친구처럼 반갑다.
설악의 기세는 역시 겨울에 눈을 뒤집어써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울산바위도 마산봉도 수바위도 모두 나뭇잎을 떨어내고 흰 눈이 맺혀야 그 잔근육이 잘 보인다.설악 ‘육체미’를 감상하려면 전망 포인트에 가야 한다. 미시령 터널을 지나자마자 뷰 포인트가 하나 나온다. 이곳에선 울산바위가 잘 보이는데 아침나절에 가야만 산의 그림자에 갇히는 ‘역광’을 면한다. 멀리 엑스포 공원 쪽 바다까지 가서 산을 바라봐도 좋다. 이 역시 아침녘에 나가야 한다. 산이 좋은 인자(仁者)라면 케이블카를 타고 설악 권금성에 올라도 좋다. 다리 아픈 이도 늙은이, 어린이에게도 설악의 눈부신 설경을 보장하는 보험이다.
애초 계획한 대로 가야 한다. 청호동. 아바이 마을. 피란 온 함경도와 강원도 이북 ‘아바이’들이 눌러앉았다. 섬도 땅도 아닌 외딴 끄트머리 땅에 집을 짓고 모여들었다. 70여 년 느릿한 추억을 부여잡고 거친 바다와 싸워 가며 살아온 실향민 마을이다. 줄을 묶어 갯배로 오가며 생선을 말리고 식해를 담가 팔며 살았다.
관광객들이 득실한 갯배 선착장 주변 분위기는 과거와 많이 변했다. 그 이름난 생선구이집들과 함흥냉면집, 순댓국 일색이던 곳이 매력이었지만, 십여 년 전부터 영문 간판 화려한 카페와 베이커리도 착착 들어섰다. 남미에서 온 원두를 볶고 녹진한 유럽풍 과자를 만들어 판다. 과연 글로벌 도시 속초다.
도치알탕 |
도루묵 구이 |
●여차저차, 아차 하기 전
요즘은 겨울, 제철 먹거리가 많다. 꼬득한 살과 알이 가득한 도치알탕은 김치를 넣고 끓여 시원하다. 그리 건더기는 많아 보이진 않지만, 알이 가득인 국물을 떠서 밥을 말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든든하다. ‘비비탄’같은 알이 가득 찬 도루묵도 굽고 조려 먹을 수 있다. 영랑호 인근 포장마차촌의 ‘당근마차’가 잘한다. 곁들여 주는 간장새우장도 밥도둑이다.
생선구이 밥상 |
가자미와 볼락, 고등어 등 바삭하게 구워 내는 생선구이도 맛이 좋을 때다. 함경도 출신 모친에 이어 2대째 제철 생선을 구워 내는 ‘옥이네 밥상’은 반찬 하나하나모두 주인공이라 해도 될 만큼 근사한 상차림으로 소문난 곳이다. 꾸덕꾸덕 말린 가자미와 고등어, 볼락 등을 구워 갖은 나물과 젓갈과 함께 먹는다. 구운 생선을 상추에 싸서 표고버섯 쌈장을 넣고 입 안에 넣으면 바다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강원도식 멍게비빔밥은 거제와 통영 등 경남식과는 또 다른 맛을 낸다.
홍게라면 |
달착지근한 홍게와 대게도 맛볼 수 있다. 2월이면 제대로 수율이 오르는 때다. 더 늦어도 되지만 자칫 때를 놓치면 2월 지나 ‘이월’된다. 동명항 ‘스타대게’는 홍게와 대게, 생선회를 푸짐한 곁들임 안주와 함께 차려 내는 곳. 게도 싱싱하고 튀김 등 안줏거리도 맛이 좋다.청호동 아바이 마을에는 함경도 음식을 별미로 챙기면 된다. 뜨거운 가리탕(갈비탕) 한 그릇과 아바이순대 한 접시면 일단 기본, 식해와 냉면, 오징어순대까지 맛볼 수 있다.
설악온천(한화 워터피아) 아래 학사평엔 두부 요리를 잘하는 집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다. 강릉식과는 또 다른 맛이다. 전통 방식으로 뭉근히 굳혀 낸 두부 한 사발이면 몸도 마음도 든든하다.
시내 관광수산시장(중앙시장)에선 실로 다양한 주전부리를 즐길 수 있다. 속초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 메뉴인 닭강정을 비롯해 씨앗호떡, 치즈호떡, 마카롱 아이스크림, 커피 등 다채로운 군것질거리를 파는 상점과 함께 맛있는 식당도 많아 눈요기와 함께 정말 요기를 하러 관광객들이 몰린다.
문어국밥 |
시장 입구엔 ‘문어국밥’을 파는 집이 있다. 딱 제삿날 ‘탕국’의 느낌을 국밥으로 살렸다.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올리던 탕국 문화를 뚝배기에 담았다. 매우 특별한 국밥이다. 한우 양지(때론 사태)와 강원 고성에서 낚시로 잡은 참문어를 삶아 국밥을 차려낸다. 맛이 강하지 않고 심심하다. 시원한 국물 속 고소한 맛이 숨었다.
새우튀김 |
과거 전국구 명성을 떨쳤던 대포항 포장마차촌은 가로 정비가 돼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명물인 새우튀김과 오징어회 등 대표 음식 맛은 여전하다. 호텔 밀집 지역과는 살짝 떨어져 있지만, 식사와 안줏거리를 찾아 일부러 이곳을 들렀다 오는 이들이 많다.
여태껏 겨울 바다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면 속초가 제격이다. 여차저차 하다간 ‘아차’ 하는 새, 곧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갈 길이 바쁘다.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트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