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상 올 줄 몰랐다"…'소년들' 설경구가 밝힌 극장의 가치
영화 '소년들' 설경구 인터뷰
배우 설경구. /사진제공=CJ ENM |
배우 설경구의 얼굴에는 유독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배어있다. 어쩌면, 실화 영화와 인연이 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필모그래피를 톺아보면, '실미도'(2003), '그놈 목소리'(2007), '소원'(2013) 등 가슴 아프면서도 묵직한 이야기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화 바탕의 영화를 촬영할 때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다는 설경구. 그의 진정성은 스크린 너머의 우리에게 전달되면서 함께 울고 웃는 이유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소년들'(감독 정지영)로 다시금 단단한 울림을 전달하는 설경구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이다.
'소년들'은 지방 소읍의 한 슈퍼에서 발생한 강도치사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들과 사건의 재수사에 나선 형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사건 실화극. 배우 설경구는 사건의 재수사에 나선 수사 반장 황준철로 분했다.
영화 '소년들' 스틸컷. /사진제공=CJ ENM |
삼례나라슈퍼사건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소년들'. 설경구는 실제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이니만큼 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했다고. 설경구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잔인하다. '소년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저항을 못 하지 않나. 실제로 그분들을 보면, 해결된 것은 따로 없는 것 같다. 마음으로 누르고 계시는 것 같다"라고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설경구는 모든 촬영이 끝나고 실존 인물들을 만나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는 "전주에서 시사회를 했는데, 유가족, 피해자, 진범, 박준영 변호사도 오셨다. 박준영 변호사가 '소년들을 성장시켜줘서 고맙다'라고 하더라. 실제로는 못 했다고. 영화에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실미도', '그놈 목소리', '소원' 등 실화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에 유독 많이 출연했던 설경구. 따로 부담은 없냐는 질문에 설경구는 "그런 운명인 것 같다. 촬영하면서 보다는 그분들을 만나면서 무게감이 쌓인다. 일부러 안 만나는 것도 있다. 마음이 이상하다"라고 털어놨다.
영화 '소년들' 스틸컷. /사진제공=CJ ENM |
연출을 맡은 정지영 감독은 '소년들'의 황준철 캐릭터로 처음부터 설경구를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설경구는 "별명이 미친개로 나오지 않나. 강철중 캐릭터보다는 이성적 판단이 있는 사람이다. 범인을 잡는 부분에서 미친개이지, 일상까지 미친 사람은 아니다. 강철중 이미지와 비슷해질 것 같아서 생각을 안 했다"라고 캐릭터를 소개했다.
데뷔 '40주년'을 맞은 거장 정지영 감독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존경심이 생겼다는 설경구는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정지영 감독님이었다. 사회에 목소리를 내시는 분이셔서 그런 부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거부할 수 없었다. 스태프 막내까지 동료로 생각하신다. 수평 관계로 생각하신다, 진짜 마인드가 좀 다르시다. 어른이라는 생각보다는 같이 작업하는 동료 같았다. 나도 그렇게 나이를 먹고 싶다"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영화 '소년들' 스틸컷. /사진제공=CJ ENM |
'소년들'에는 사건의 진실을 좇아 고군분투하는 황준철의 든든한 조력자들이 등장한다. 후배 형사 박정규 역의 허성태에 대해 "일단 악역만 하는 배우이지 않나. '소년들'에서는 선한 역이다. 추천보다는 감독님께 여쭤봤다. 결국은 인연이라고 본다. 되게 좋아하더라. 원래가 그런 사람이라고. 되게 쑥스러움도 많고 떨더라. 그때 당시 '오징어 게임'을 같이 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재수사에 나선 황준철을 지지해주는 아내 김경기 역의 배우 염혜란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더 글로리', '마스크걸'로 이른바 흥행 요정으로 불리는 염혜란에 관해 설경구는 "염혜란 배우는 집이면 집을 만들고, 식당이면 식당을 만드는 캐릭터다. 황 반장 캐릭터를 만드는 것에 도움을 줬다. 요새 흥행 요정인데, '소년들'에서 미모를 담당했다고 하더라. 워낙 잘하는 배우고, 겸손하고 사람이 너무 좋다"라고 칭찬했다.
배우 설경구. /사진제공=CJ ENM |
1999년 영화 '박하사탕'(감독 이창동)으로 데뷔하며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겪어오기도 했던 설경구는 팬데믹 이후, 위축된 한국 영화 시장에 대해 언급했다. "'실미도'를 찍을 때, 강원석 감독님이 섬에서 갇혀서 참여하니까 지인분들과 회식을 많이 했다. 항상 건배하면서 천만이라고 했다. 다들 속으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때 말도 안 되는 숫자가 나왔다고 하더라. 요즘은 100만 축하에도 기사가 나오지 않나. 또 좋은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기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극장의 존재 이유나 가치는 '주체적인 것'이라며 강조하기도 했다. 설경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극장 같다. 극장은 내가 선택해서 가는 것 아닌가. 큰 스크린에서 압도되는 것이 있다. 물론 필름 시절과는 달라진 부분이 있다. 이런 세상이 올지 몰랐는데 어떤 세상이 올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라고 강조했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