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국물, 범일분식
웬만해선 먹기 힘든 #3
<웬만해선 먹기힘든>은 찾아가기 번거로워 자주 먹기 힘들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에 대한 찬가다.
범일분식의 순대국 |
제주의 청량한 공기 이면에는 무겁고 짙은 습기가 있다. 그 공기처럼 제주의 음식에도 청량한 해산물이 있고 그 이면에는 육지의 진득한 맛이 있다. 해산물을 먹기 위해 방문한 이들도 해산물보다 제주의 진득한 국물을 잊지 못한다. 제주의 국물은 고기국수와 몸국으로 대표되지만 어느 음식에 국한되지 않고 이곳에서 만든 육수는 하나같이 맛이 좋다.
누군가 도시의 국물에는 도시의 공기가 담기고, 시골의 국물에는 시골의 공기가 담긴다고 했다. 같은 재료로 끓여도 지역의 특성이 국물에 꾸밈없이 담긴다. 천혜 자연의 제주에서 먹는 국물 맛이 좋은 이유다.
제주에 도착해서 줄곧 음주, 해장을 반복했다. 저녁 술안주로는 해물과 고기를 번갈아 먹고, 아침에 해장은 대부분 몸국이나 순댓국으로 했다. 제주의 국물은 밀도가 높아 해장력이 좋다. 숙취가 반나절을 못 넘긴다. 그 중 가장 잊기 힘든 맛을 낸 곳은 범일분식이다.
짙은 해풍을 맞아가며 낮은 돌담을 지나면 허름한 외관의 국밥집이 나온다. 범일분식은 가장 제주스러운 순댓국을 파는 곳이다. 도시의 순댓국과 다르게 새침하지 않고 터프한 스타일의 순댓국이다. 작은 뚝배기에는 가짓수는 단출하지만 돼지 내장의 정수를 오롯이 담았다. 넘치는 부속물들 사이에서 순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 순댓국의 주인공은 당당히 순대다. 팔뚝만큼 굵고 큼지막한 순대가 국물 위에 두둥실 떠있다. 영국의 블러드 푸딩처럼 짙은 피맛과 구수한 보리 맛이 섞여있는 순대다. 피순대가 낼 수 없는 묵직한 맛을 가지고 있는데, 창자는 쫄깃한 식감으로 진득하고 묵직한 소를 감싼다.
투박해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순대를 입 안에 넣으면 마법처럼 세련된 맛이 난다. 감칠맛과 구수한 맛의 균형이 절묘하다.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따라 깻잎지에 싸 먹으면 뒷맛이 상큼하다. 부속물들은 잡내 없이 구수하면서 뚝배기가 넘칠 만큼 가득 들어있는데, 새우젓이 따로 필요 없이 맛이 단단하다.
국물은 멀건 기색을 찾기 힘든, 진한 국물이다. 이에 들깨가 더해져 밀도를 더한다. 훌훌 마시기 힘들고 수저로 뚝뚝 떠서 먹는 것에 가깝다. 밥을 말아도 국물은 타협하지 않고 밥의 전분에 희석되지 않는다. 간신히 말아 부추와 함께 헛헛한 속으로 밀어 넣으면, 금세 위장이 차오른다.
한 그릇을 다 먹고 바깥으로 나오면 제주의 해풍은 여전히 불고 있다. 묵직해진 위장을 바람이 들어와 풀어주면 비로소 이곳이 제주임을 실감한다.
범일분식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 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