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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과 마른 안주

음식산문 #1

감독님과 마른 안주

“넌 대사를 머리로 써.”


한 때 한국 영화를 이끌었던 영화감독님이 시나리오를 훑어 보시더니 대사가 엉망이라며 술자리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당시 나는 남자의 암흑기라는 군시절을 지나 영화가 배우고 싶어서 주구장창 영화를 보다 한 손에는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의 단상>을 들고 왕성하게 시나리오를 썼다. 필립 로스의 소설에 나오는 말처럼 프로정신을 발휘해서  영감을 찾으러 다니지 않고 일어나서 노트북 자판이 부서져라 시나리오를 쓸 뿐이었다.


영화의 완성은 술이라 했다. 어르신들 술시중을 포함한 술자리는 시나리오 완성의 중심이었다. 탁상공론의 시작은 술자리에서 술자리였지만 그 공론을 영감의 원천으로 시나리오를 구상을 했다. 자리에서 많은 것을 적기는 했지만 현재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예컨대 ‘롱테이크로 찍은 타란티노식 조선 웨스턴’ 등의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담아낸 영화에 대한 구상인데 술이 깨고나면 허무맹랑한, 휘발성의 구상이라 그렇다.


마신 것들은 계통없이 섞어서 마셨지만 확실히 먹은 것은 ‘기본안주’다. 기본안주는 말그대로 한국 술집의 독특한 문화인만큼 전국에 기본안주가 없는 술집은 없다. 그 종류 또한 다양해서 한국식 술집에서는 뻥튀기, 굴뚝과자, 새우칩, 파래과자, 삶은 대두, 건빵, 시리얼을 주는 곳이 대부분인 반면 일본식 주점에서는 쓰키다시의 어원에서 온 찌께다시라 하는 콘치즈, 마요네즈 마카로니를 주고, 더러는 오토시라고 부를 수 있는 기본 이상의 안주를 주기도 하지만, 외국 맥주를 팔거나 영어가 들어간 간판을 한 곳에서는 주로는 프레첼을 주고, 객단가가 높은 가게의 경우 튀긴 파스타면에 소금을 뿌린 기본안주를 주는 곳도 있다.

감독님과 마른 안주

감독님은 기본안주에 소맥 너댓병을 너끈히 비웠다. 화려한 기교보다 기본에 충실하라는 평소의 성격이 음식에도 투영됐는지 기본안주에 집착을 했다. 집착이라고 하면 기본안주의 정통성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취향에 의해 기인된, 조미 김과 땅콩에 대한 집착이었다.


조미 김과 땅콩은 소맥 안주로 좋다. 조미 김은 소주 안주로 좋고 땅콩은 맥주 안주로 좋다. 고로 소맥의 안주로 먹기에는 두 가지만한 것이 없다. 조미 김과 땅콩을 둘 다 주는 술집은 드물지만,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40대 이상의 오너가 있는 5년 이상의 업력을 가진 이자카야다.

밥도 거르고 술집에 둘러앉아 시나리오에 대한 합평을 진행하면서 술자리가 시작되면, 둔탁하게 바스라지는 땅콩 껍질 까는 소리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는 김이 사그라드는 소리가 교차되고, 그 사이로 영화 현장의 에피소드를 비롯해서 각종 영화 지식의 공유와 논쟁이 교차했다. 조선 시대에 있었던 선비들의 시계(詩契)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김은 희석식 소주를 중화시키지 못해도 기름칠은 했다. 땅콩은 기름칠 한 자리를 밀도로 채웠다. 헛 배부르게 소맥이 가득 찬 배에 김과 땅콩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취기가 올랐다. 취기라고 하면 객기인지 구분이 안가는 경우도 많았는데 외국어를 비롯한 언어가 유창해지면 취기의 기준이고 유명 배우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면 객기의 기준으로 넘어 온 것이다.


기본 안주가 술자리를 장악하면 허용되는 안주는 오뎅탕 정도다. 유명 어묵이 들어가고 쑥갓이 듬뿍 들어간 어묵탕에 가까운 탕이 아니라 서비스로 받아도 무리가 없는, 전분오뎅이 성의없이 엎어져 있고 국물은 지나치게 달큰한 만 오천원 미만의 오뎅탕이다. 조미 김과 땅콩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은은하게 술자리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는 그 정도 오뎅탕이 좋았다. 결코 맛이 좋아서 솟아오르는 영감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고,  맛이 없어서 술 맛이 떨어지면 안된다.


영화의 영감이 오가고 자리는 무르익고 식기를 반복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자리가 끝날 즈음, 식탁 위에 수북이 쌓인 땅콩 껍질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빈 땅콩 껍질과 마주하기 위해 술자리를 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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