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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飮)과 음(音)의 하모니

배순탁의 끄적끄적 뮤직

그러니까, 어제도 나는 마셨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방송될 새벽 3시 45분까지 버터야한다는 결기는 온데간데 없고, 음악에 취해 흥에 취해 마시고 또 마셨다. 뭐랄까.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 이자카야에서 사시미 모리아와세와 닭꼬치를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술이 들어갈 구멍이 남아있다니 말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나는 소주나 양주를 즐기지 않는다. 타겟은 오로지 맥주 뿐.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다. 맥아 비율이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래서 ‘보리맛 탄산 음료’라거나, 심하게는 ‘말오줌맛’이라는 얘기까지 듣는 국산 맥주 따위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맥주라면 마땅히 맥주다운 품격이 있어야 하는 법. 어제는 보스턴의 자랑인 라거 맥주 ‘사무엘 아담스’를 대략 10병 정도 해치운 것 같다. (그나저나 ‘말오줌맛’이라니, 정말 말오줌을 마셔봤다는 말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술과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맥주라면 환장하는 내가 더 많은 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은덕은, 단언컨대 음악이라는 뮤즈의 존재 덕분이었다. 나는 아주 나쁜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이제 거의 다 포기했는데, 술만 마셨다하면 어떻게든 ‘음악 바’에 가서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매우 기괴한 강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곤 한다. “아니, 매일 음악을 듣는 게 직업인데 지겹지도 않냐?”

 

사정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간단하게, 집에서 술 마시며 듣는 음악이 바에서 듣는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선 방음장치 하나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집에서 음악을 감상하다보면 무엇보다 사운드의 크기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술의 양과 소리의 볼륨은 정확하게 정비례하는 까닭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헤드폰이라는 대안이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헤드폰을 오래 쓰다 보면 귀가 아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나는 게임을 할 때도 헤드폰을 쓰고 하고, 길을 걸을 때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데, 내 귀의 컨디션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변명이다. 그냥 나는 술 취하면 음악이 듣고 싶고, 그 음악을 빵빵한 사운드로 즐기고 싶을 뿐이다. 뮤직비디오까지 틀어주면 금상첨화다. 요즘에는 뮤직비디오 자체가 예술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 중에서도 내가 최근에 뻑 간 뮤직비디오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쳇 페이커(Chet Faker)라는 호주 출신 뮤지션이 DJ이자 프로듀서인 플럼(Flume)과 함께 발표한 ‘Drop the Game’이라는 곡이다. 일단 뮤직비디오를 먼저 보고, 계속해서 이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아아, 어떻게 이런 뮤비를 보고 술을 안 마실 수가 있다는 말인가.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대략 새벽 1시경에 내 단골 바에서 이 뮤비를 보고 그만 홀라당 반한 나는 이 애정을 바탕 삼아 다시금 사무엘 아담스를 주문하고 목구멍 속으로 들이켰다.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하고, 고소하면서도 풍성한 맥아와 홉 향이 입안에 맴돌면서 코에까지 전해져 나를 천상으로 인도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아직 조금 부족하다. 조금 더 강력한 뮤비로 맥주에 대한 나의 욕망을 활활 태워야 할 시간이다. 그래. 맞다. 이 뮤비가 있었지. 주문을 외워 그들을 소환해본다. 라디오헤드(Radiohead)여, 나와라. 얍!

이것은 완벽한 라이브다. 오른편에 자리한 관련 영상들까지 한번 쭉 감상해보라. 흠결 하나 없는 것은 기본이요, 인위적으로 기운 자국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위대한 서정의 성채 같은 라이브다. 2012년 지산밸리록페스티벌에서 영접했던 그들의 아우라가 마치 눈 앞에 현현한 것만 같다. 맥주 1병 추가는 필수다.

 

아, 그들하면 떠오르는 ‘Creep’은 여기에 없다. 솔직히 ‘Creep’ 따위 나는 애초부터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라디오헤드가 다가온 건 2집 [The Bends](1995)부터였다. 이후 3집 [OK Computer](1997)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걸작을 창조해낸 그들은 [Kid A](2000), [In Rainbows](2007), 그리고 최근의 [A Moon Shaped Pool](2016)에 이르기까지, 음반마다 혁신적인 면모를 선보이면서 거물급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까방권’ 밴드가 되었다.

 

이제 집에 가야할 시간이다. 시간은 새벽 3시를 향해가고 있고, 아침까지 음악으로 숨쉴 것만 같던 사람들은 어느새 하나둘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드디어 마지막 단 한곡의 신청만이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신중해야 한다. 이 한곡에 따라 집에 가는 길의 기분 자체가 달라질 것이니까. 아이팟의 음악 목록을 죽 살펴본 뒤에 내가 들이민 신의 한수에 주인 형이 웃음 짓는다. “그럼 그렇지. 이 곡을 왜 신청 안하나 했다.” 싶은 얼굴이다. “사무엘 아담스 한 병 더요.” 가게 문 닫을 시간이건만 형은 아무 말 없이 병을 하나 더 내준다. 이게 오늘 나의 마지막 병이라는 걸 경험으로 체득한 덕분이다.

지난 주에 있었던 M83의 내한공연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입에서 절로 욕이 나올 정도로 끝내주는 라이브를 보여주고 바람처럼 사라져간 그들의 음악이 바의 스크린 위에 영화처럼 펼쳐진다. 이 곡에서 색소폰이 터져나올 때 내 심장은 그야말로 폭격 당했다. 안되겠다 싶은 나는 이 곡을 끝으로 바를 나와 택시를 잡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남아있는 필스너 우르켈 맥주 캔을 따고, 턴테이블 위에 LP를 올려놓는다. 내일은 모처럼의 휴일이다. 이렇듯 나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음악에 대한 애정을 술을 연료로 삼아 확인하는 건,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이런 주말이 계속되기를 그저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이걸로 족하다. 

 

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청춘을 달리다’ 저자, SNS 냉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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