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하지만 사랑스러운 나
배순탁의 끄적끄적 뮤직
수많은 음악을 들어왔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들어보려 했으나 언제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장르를 한정해버렸다. 팝, 록, 가요. 딱 이 세 가지만 파자. 재즈의 영토는 탐험하기에 너무 광대했고, 클래식까지 뻗어나가기에는 나의 역량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하긴, 대중음악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일단 팝, 록, 그리고 케이-팝이라 불리는 가요 아닌가. 이렇게 위안 삼으면서 근 25년을 음악의 바다 위에서 보냈다.
그렇다고 내게 다른 취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나는 이른바 코믹스라 불리는 일본 만화의 팬이다. 집에 대략 3000권이 넘는 만화책을 보유하고 있는데, 만화책이 책보다 많은 작가(라 불리는 경우)는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자랑은 아니다.) 나는 게임광이기도 하다. 저 먼 옛날 전설이 되었던 패미컴을 시작으로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 플레이 스테이션 1,2,3,4로 이어지는 ‘골든 로드’를, 게임을 우습게 보는 주변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걸어왔다. 최근 나는 < 언차티드 4 >라는 타이틀을 구매했는데, 한정판을 따내기 위해 광클릭을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나는 축구를 대단히 좋아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5월 15일 일요일 밤 9시. 2시간 뒤면 축구 중계를 봐야하기에 나는 지금 불꽃 같은 의지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하는 중에 있다. 비단 TV 시청뿐만이 아니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답게 매년 최소 3회 이상 K-리그 클래식 경기를 ‘직관’하고 있으며 이런저런 인연을 통해 알게 된 축구 해설가들과 만나 축구에 대해 떠들고 가끔씩은 축구 게임인 < 위닝 일레븐 >도 함께 플레이한다. 물론, < 위닝 일레븐 >은 내가 제일 잘한다.
간단하게, 나는 얄팍한 인간이다. 음악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것도 깊게 파지 못하고 넓게 벌리는 걸 선호하는 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은 한 분야의 마니아들에게 속된 말로 뽀록나기도 하지만, 뭐랄까, 나는 이런 내가 참 좋다. 스피노자도 이런 나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지 않았나.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고.
게임으로만 한정해서 굉장히 단순하게 설명해보겠다. 몇 년 전 나는 < The Last of Us >(2013)라는 위대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이거 음악이 범상치 않은데?”라고 느꼈다. 이후 엔딩을 보고 크레디트를 훑어보니, 아뿔싸, 이 게임의 음악을 영화음악팬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거장이 만들어낸 게 아닌가. 그 주인공은 바로 구스타보 산타올라야(Gustavo Santaolalla). 바로 영화 < 바벨 >(2006)과 < 브로크백 마운틴 >(2005)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2번이나 석권한 분이다. 과연 내가 게임을 하지 않았다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영화 전문 잡지에 글을 기고할 수 있었을까?
< 배트맨 아캄 나이트 >(2015)라는 게임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오프닝 시퀀스에는 전설적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I’ve Got You Under My Skin’이라는 곡이 삽입되었는데, 이 곡은 다름 아닌 배트맨과 조커 간의 관계를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홀딱 반했어요.”라는 의미를 지닌 이 곡으로 영화 < 다크 나이트 >(2008)에서 조커가 배트맨을 향해 했던 명대사 “You Complete Me.(너는 나를 완성해줘.)”를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어디 이뿐인가. 나는 축구 경기를 보면서 흘러나오는 모든 음악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고, 그때마다 “대체 이 곡이 왜 쓰였지?”라는 추리와 함께 더 나은 선택지가 없을지도 고민해본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과정들이 별 쓸모 없어 보이겠지만, 이런 유의 즐거움이 없다면, 글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게임이 얼마나 심심해질까 싶은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잡설이 길었다. 다만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감은 서로 다른 분야가 어떤 우연한 순간에 겹침으로써 찾아오는 게 아닐까 싶다는 점이다. 물론 서로 다른 영역이기에 편하지 않다라는 느낌은 때때로 필연적이다. 그러나 되새겨보건대, 뭔가 편하지 않다는 것은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만한 문턱에 도달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람 사이도 그렇지 않은가. 나와는 너무 달라 처음에는 불편하게 여겨졌던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든 지속적으로 만나보면, 그 사람으로부터 어떤 배움이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우, 다들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차승원씨가 유해진씨를 평가하면서 “나랑 근본적으로 너무 다른 사람인데, 그래서 도리어 배우는 게 많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때때로 체험은 체험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원(原)체험은 다른 영역에서 주어진 자극과 만나야 비로소 스파크가 이는 순간을 만들어내고는 한다. 무엇보다 음악평론가라는 인간이 게임과 축구를 통해 음악과의 연결점을 언급하고 있는, 지금 이 글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글을 마무리를 지으려 시계를 보니 정확히 밤 10시 55분이다. 음악 이외에 여러가지 것들을 ‘두루, 그리고 ‘함께’ 살피면서,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오늘 밤 11시부터는 일단 축구다. 손흥민 파이팅.
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청춘을 달리다’ 저자, SNS 냉면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