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 10선
지난 10년 간 수많은 영화가 나왔다. 그중엔 몇 번을 다시 볼 만큼 사랑에 빠진 영화도 있고, 안 본 눈을 사고 싶을 만큼 잊고 싶은 작품도 있다. 관객의 큰 사랑을 받으며 전무후무한 흥행 기록을 세우거나, 작품성 하나로 온갖 상을 휩쓴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모두 “영화 산업”에 의미 있는 작품이진 않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 10년을 정리하면서 영화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 영화 10선을 선정했다. 이 영화들은 할리우드와 전 세계 영화 산업의 판도를 바꾸거나, 우리가 알지 못했던 소비자들을 수면에 끌어올리거나, 할리우드의 구조적 변화를 촉발했다.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원문은 The 10 Most Influential Films of the Decade (and 20 Other Favorite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American Sniper, 2014)
이미지: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네이비씰 저격수 출신 크리스 카일의 회고록에서 영감을 얻은 전쟁 영화다. 2014년 크리스마스에 북미 시장에서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는데, 프랜차이즈나 시리즈 영화, 또는 디즈니 영화가 아닌 작품이 흥행 1위를 기록한 작품이었다. 사실과 픽션이 뒤범벅되어 있지만 전쟁 영웅의 활약을 다루고 총과 군대에 우호적인 시각 때문에 관객의 호불호가 크게 갈렸지만,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거두며 자유, 진보적인 의견만 있는 것처럼 보인 할리우드에 보수적 시각도 존재함을 보여줬다. 크리스 카일은 영화 각본 작업이 진행되던 2013년 2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는 전직 해병의 치료를 돕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어벤져스 (The Avengers, 2012)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어벤져스]는 영화 산업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속편’의 속성을 바꿨다. [어벤져스]의 성공 이후 속편은 전편보다 더 길고, 출연진도 많으며, 그만큼 “사운드가 비는” 순간이 없도록 제작됐다. 디즈니에 인수된 마블 스튜디오의 첫 작품으로서, [어벤져스]는 소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문을 활짝 열었다. 11년 동안 영화 23편이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지만 그만큼 다양한 영화에 돌아갈 기회를 빼앗았다는 비판을 많다. 여러모로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주고 지금의 영화 배급·상영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한 건 사실이다.
블랙피쉬 (Blackfish, 2013)
출처: Magnolia Pictures |
미국 최대 규모 시월드 파크에서 범고래 ‘틸리쿰’이 갑자기 조련사를 공격해 죽였다. 이 사건을 추적하며 시작된 [블랙 피시]는 틸리쿰과 다른 범고래들이 불법 포획되고 학대받는 모습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수십억 달러 규모의 해양공원 산업의 어두운 이면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다큐멘터리는 당연히 큰 파장을 일으켰고, 동물권에 대한 대중과 기업의 인식과 법률을 바꿨다.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 (Bridesmaids, 2011)
이미지: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
지금까지 남자 친구들이 함께 파란만장한 모험을 겪는 코미디 영화는 국적 불문하고 많이 나왔지만, 여자 배우들이 단체로 등장해 우정과 질투, 웃음과 눈물(슬퍼서 나오는 것만은 아님)이 범벅된 작품이 흥행한 적은 없었다.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여성 캐릭터 중심 코미디가 박스오피스에서 흥행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크리스틴 위그나 마야 루돌프 등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출신이나 로즈 번, 엘리 캠퍼 등 연기 잘하는 배우들도 맹활약했지만, 영화가 낳은 최고의 스타는 멜리사 맥카시다. 이 영화 이후 [스파이]를 거치며 맥카시는 21세기 대표 코미디 배우로 거듭났고, [날 용서해줄래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겨울왕국 (Frozen, 2013)
출처: Walt Disney Animation Studios |
[겨울왕국]은 엘사 드레스와 ‘Let It Go’만 남기지 않았다. [겨울왕국]은 그동안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온 여성 관객의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안데르센의 동화를 ‘자매애’에 기반해 완전히 재해석한 영화는 여성 관객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북미 뿐 아니라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동화의 21세기 해석을 두려워하지 않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도전이 성공한 것이다. [겨울왕국]은 역사상 가장 흥행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되었고,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작품상과 주제가상을 받았다. 6년 만에 공개된 [겨울왕국 2] 또한 진일보한 비주얼과 성숙한 스토리로 그동안 성장한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전 세계 박스오피스 수익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겟 아웃 (Get Out, 2013)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
[겟 아웃]은 여러모로 놀라운 작품이다. 호러를 중심으로 여러 장르를 과감하게 섞었고,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인종 차별 유형을 그리며 백인들의 위선을 풍자했다. 예산 450만 달러 영화로 전 세계 2억 554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2017년 흥행작 반열에 올랐고,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다. 이제 영화 팬들은 조던 필을 ‘키 앤 필 걔’가 아니라 할리우드의 ‘다음’을 책임질 천재 감독으로 기억한다. 올해 개봉한 [어스] 또한 ‘도플갱어’ 컨셉을 과감하게 해석하고 강렬한 연기와 비주얼을 얹은 수작이다. 21세기에 걸맞은 호러 영화를 창조하는 그의 차기작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The Hunger Games: Catching Fire, 2013)
이미지: (주)누리픽쳐스/롯데엔터테인먼트 |
‘연기 잘하는 배우’ 제니퍼 로렌스는 [헝거게임] 시리즈로 글로벌 스타가 되었다. [헝거게임] 또한 [겨울왕국]과 마찬가지로 여성 관객의 지지를 받으며 여성 중심 영화의 흥행 역사를 다시 썼다. 또한 영화 개봉 후 미국에서 양궁 열풍이 일고 양궁을 배우는 여성이 늘어났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총 네 편이 제작됐는데, 2편 [캣칭 파이어]가 선정된 건 여성 주연 영화로는 정말 오랜만에 2013년 북미 박스오피스 흥행작 10위 안에 안착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박스오피스 성적도 8억 6500만 달러로 시리즈 중 가장 높다.
문라이트 (Moonlight, 2016)
이미지: 오드 |
흑인이자 성소수자인 소년의 푸르도록 시린 시간들을 그린 [문라이트]는 할리우드가 변화의 열망을 동력 삼아 방향을 전환한 순간의 중심에 있었다. 터렐 앨빈 맥크러리의 희곡에 바탕을 둔 영화는 더욱 극심한 차별에 시달린 주인공의 내밀한 감성을 관찰하는 데 집중한다. 인물의 감정선을 스타일리시한 화면과 아름다운 음악으로 따라가는 것을 보면 유럽과 아시아 시네마의 영향이 느껴진다 (배리 젠킨스 감독이 직접 왕가위 등 유럽, 아시아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문라이트]는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감독의 영화로는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하며 수십 년 간 구조적인 인종 차별을 일삼는 할리우드에 변화를 가져왔다.
옥자 (Okja, 2017)
이미지: 넷플릭스 |
봉준호 감독이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건 새로운 시스템에 대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7년 당시 A급 크리에이터들이 외면한 넷플릭스와 과감히 손잡고 [옥자]를 만든 것도 한 예다. [옥자]가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계가 ‘영화와 플랫폼’을 고민하게 된다. 결국 칸 영화제는 넷플릭스 영화의 경쟁부문 진출을 금지했고, 넷플릭스는 칸 영화제 보이콧으로 맞불을 놓았다. 베니스 영화제는 이때를 노리고 넷플릭스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넷플릭스는 작년 [로마]로 황금사자상을 받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개 부문을 수상했다. 2년이 흐른 지금, 봉 감독은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넷플릭스의 [아이리시맨], [결혼 이야기] 등과 함께 아카데미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Star Wars: The Force Awakens, 2015)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디즈니 제국의 일부가 된 루카스 필름은 [스타 트렉] 시리즈로 ‘리부트 영화’에 재능을 보인 J.J. 에이브럼스에게 [스타워즈]의 새 시작을 맡겼다. 2015년 연말 개봉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오리지널 3부작의 에너지와 매력을 잡아내면서 [스타워즈] 세계에 여성과 비백인 캐릭터의 자리를 찾고자 했다. [깨어난 포스]는 4편 [새로운 희망]과 비슷하다는 비판은 있지만 21세기 관객을 위한 [스타워즈]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변화에 대한 백래시도 만만치 않았다. 2017년 개봉한 속편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는 팬덤 수면 아래에 있던 추한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만들었다. 켈리 마리 트랜에 대한 “일부” 팬의 무자비한 인신공격은 영화뿐 아니라 팬과 팬문화 또한 성장이 필요함을 일깨웠다.
글 서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