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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이 젊음의 은빛 등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볼 영화가 없고 읽어 볼만한 책이 없고 들을만한 노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속도에 지쳐서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익숙한 것을 다시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미 본 그러나 본 지 10년 이상이 된 영화, 책, 음악을 다시 들어보면 그때 느끼지 못한 부분을 찾게 됩니다.


같은 영화와 책이지만 영화와 책을 보는 내 영혼이 지난 10년 동안 성장했고 지식과 경험도 늘어서 당시 느끼지 못한 장면이나 다른 시선으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15년 만에 다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였나?

15년 전에 본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마녀의 마법에 걸려서 폭삭 늙어버린 주인공이 다시 마법을 풀리는 과정을 담은 애니로만 기억되네요. 물론 하늘을 걷는 명장면은 유튜브에 수 없이 많이 올라와서 가끔 다시 보고 '히사이시 조'의 뛰어난 왈츠 풍 음악은 수 없이 들었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는 잘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럼에도 이미지 하나는 남아 있습니다. 좀 과장된 이야기?


넷플릭스는 지브리 스튜디오 영화를 2조 이상의 돈을 내고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를 모셔왔습니다. 틈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보고 있는데 이번 주에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봤습니다. 그런데 이 애니를 다시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애니였나? 내 마음 속의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 순위에서 5위권 바깥에 있던 이 애니가 순간적으로 3위 안으로 치고 올라왔습니다. 정말 매혹적이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애니입니다.

1차 세계대전과 마법이 함께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브리의 심장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입니다. 이 애니는 하야오 감독의 특징이 잔뜩 담겨 있습니다. 시대 배경이 1차 세계대전 전후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건 아니고 등장하는 시대 배경이 딱 1차 세계대전입니다.


아버지를 잃고 모자가게에서 일을 하는 소피는 동네를 걷다가 병사들의 추행에 어쩔줄 몰라합니다. 이 위기에 한 꽃미남 남자가 다가오더니 소피를 구해줍니다. 이 남자는 소피를 번쩍 들어 올려서 하늘을 함께 걷게 합니다. 이 남자가 움직이는 성의 주인인 하울입니다.


시대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지만 마법사가 있는 세상입니다. 마법사들이 직접 전쟁에 참여해서 상대국가를 초토화하는 무기처럼 사용됩니다. 당연히 하울도 이 무의미한 세계대전에 참가해서 하고 싶지 않은 전쟁에 참여합니다. 소피는 하울과 함께 공중을 걷던 첫 만남을 가진 그날 마녀가 모자가게를 찾아와서는 소피에게 못된 마법을 걸어 버립니다. 마법에 걸린 소피는 한순간에 70대 노인으로 변합니다. 마녀는 소피에게 하울을 찾아가 보라고 말합니다.

늙어서 불편한 것보다 좋은 점을 말하는 소피

보통 사람이 한 순간에 노인이 되면 매일 같이 울면서 하루하루 보내다가 골방에 박혀 있을 겁니다. 소피는 자신이 노인으로 변한 것을 믿겨하지 않다가 다음 날 짐을 싸서 하울이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찾으러 나섭니다. 하울을 찾는 길에 만난 순무 모양의 허수아비를 도와줍니다. 소피는 천성적으로 마음이 착합니다. 순무의 안내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찾은 소피는 돼지우리 같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깔끔하게 청소를 합니다.


소피는 하울의 조수 마르크와 금방 친해지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엔진인 불꽃 캘시퍼의 약점까지 알아내서 캘시퍼까지 꽉 잡습니다. 하울은 소피가 캘시퍼를 한 번에 다스리는 걸 보고 소피 할머니의 능력을 알아보고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소피는 노인이 된 것에 대해서 불만과 불평을 토로하기 보다는 좋은 점을 말합니다. 노인이 되니 경험이 많아서인지 잘 놀라지 않은 것과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두려운 것이 없다는 점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노인의 삶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소개하고 장단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인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말합니다. 소피의 말에 공감이 갑니다. 저도 계속 늙어가다 보니 몸이 점점 불편해지는 대신 정신은 계속 맑아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잦아들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복잡한 마음을 가진 20,30대였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경험이 많다 보니 하지 않고도 선험적으로 미리 예측 가능하고 어떠한 돌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차분함을 계속 가지게 됩니다.


소피는 이런 차분함으로 혈기 왕성한 하울이 흔들리고 괴로워할 때 두려움을 이겨내고 하울을 돕습니다. 이는 소피가 하울을 사랑하기 때문도 있지만 수 많은 좋은 어른들이 청년들을 다독일 수 있는 건 먼저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70대 소피는 청년 마법사 하울이 전쟁 도구로 활용되고 힘들어할 때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습니다.

반대로 외모에 치중하는 하울을 통해서 겉모습이 전부인 젊음을 은유적으로 비유합니다. 꽃미남을 유지해야 전쟁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하울은 온통 외모에만 신경을 씁니다. 뭐 다들 그렇지만 외모는 나이들수록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그 의미가 생각보다 크지 않음을 알게 되어서 덜 신경 쓰게 됩니다. 그렇다고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고 외모보다 중요한 것들이 세상에 더 많다는 것을 나이라는 경험이 알려줍니다.


수많은 꼰대들이 '나 때는 말이야'로 젊음을 훈계합니다. 그러나 그런 훈계는 조롱만 당할 뿐입니다. 배려심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충고는 꼰대의 회초리일 뿐이죠. 소피는 젊어서 방황하는 하울에게 은빛 등대가 되어줍니다. 경험에서 나오는 강인함과 결단력으로 쓰러져가는 하울을 퍼 올립니다. 늙어가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할머니가 아닐까요?

무의미한 전쟁 도구로 활용되던 하울, 가족을 만나다

소피는 하울의 조수 꼬마 마법사 마르크와 함께 바닷가 시장에 갔다가 전투함이 항구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합니다. 사람들은 대파된 전투함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항구에 포탄이 떨어지자 전쟁을 실감하게 됩니다.


애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무의미한 살육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을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가장 잔혹한 전쟁 중 하나였던 1차 세계대전은 열강들의 무의미한 전쟁이었습니다. 애니에서도 왜 열강들이 싸우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간단한 명분도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셀리반이라는 마법부 장관이 실세 느낌까지 들 정도로 마법사들이 참여하는 마법사 전쟁 느낌도 납니다.


소피는 누가 우리편이냐는 말에 하울은 누가 우리 편이든 피해는 모두가 본다면서 이 전쟁으로 인해 피해받는 국민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야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일본 전투기 제로센을 설계한 지로를 주인공으로 한 <바람이 분다> 제작 발표회에서 하야오는 일본 제국에 대해서 비판을 했습니다. 그의 애니들을 보면 대부분의 애니가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제 미화라고 오해를 받은 '반딧불의 묘'도 일제에 피해를 당한 일본인들의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가해국의 피해자를 담았다는 시선이 곱게 볼 수 없긴 하지만 지브리 애니들이 반전 메시지를 담은 애니들이 많은데 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이런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하울은 마법사 학교 졸업 조건으로 국가에 충성한다는 맹세 때문에 이 무의미한 전쟁에 참가해서 전쟁에 참여합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화약 냄새와 탄 철의 냄새를 묻히고 들어오는 지친 하울을 보고 소피 할머니는 안타까워합니다.

보다 못한 소피 할머니는 자신이 직접 마법부 장관을 만나서 하울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울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소피 할머니와 소피 할머니가 데리고 온 순무 허수아비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무의미한 전쟁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싸우는 이유는 간단명료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 간단하지만 강력한 이유가 총을 들고 생면부지의 적을 죽입니다. 하울은 가족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찾자 가족 보호를 위해서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이전에는 무의미한 전쟁에서 심장이 없는 사람처럼 건조하게 살던 하울이 가족이라는 심장을 찾고 온기 있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또 가족애가 주제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수 많은 영화들 특히 감동을 주는 영화들이 인간 삶의 원형질 같은 가족애를 담고 있는 건 그만큼 모든 사람들의 누군가의 아빠 엄마의 자식이듯 가족은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감동 코드 때문에 많은 영화들이 가족애를 주제로 합니다.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 바람과 주변 캐릭터 묘사력과 작화력은 만랩

'미야자키 하야오'는 비행사가 꿈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비행기에 관심이 많아서 그의 애니에는 다양한 비행선과 비행기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잠자리 같은 날개를 가진 비행기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도 잠자리 같은 비행선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비행기를 띄우는 바람 묘사력도 뛰어납니다. 많은 애니 감독들이 지브리 스튜디오의 바람 묘사력은 세계 최고라고 극찬을 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나 치마나 머리카락 흩날리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지브리 애니 중 잘 된 작품들의 특징은 수 많은 주변 캐릭터들이 자기 목소리를 잘 내고 있고 특징들이 명확합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소피와 하울뿐 아니라 꼬마 마법사 마르코와 순무 허수아비는 물론 불꽃인 캘시퍼까지 생동 넘치는 캐릭터로 만듭니다. 사람과 동물도 아닌 불꽃도 주인공 못지않게 많은 자리를 내줍니다. 보고 있으면 지브리니까 가능한 캐릭터가 캘시퍼가 아닐까 할 정도로 캘시퍼는 아주 흥미롭고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심지어 강아지까지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여전히 지브리는 악인이 나오지 않지만 소피가 자신에게 마법을 건 마녀까지 보듬어주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집니다. 뭐 이런 천사 같은 성품이 마녀까지 녹이긴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네요. 물론 지난 15년 동안 악독한 사람들과 일상 속에서 만나는 악마들을 더 많이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지브리는 작화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런데 그 절정은 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정점이 아닐까 합니다. 마법사가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하늘을 걷는 장면이나 마법과도 같은 장면들이 숱하게 나옵니다. 흠 잡을 데가 없는 작화력에 동공이 저절로 커지네요. 너무 아름다워서 <하울의 아름다운 성>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히사이시 조'의 음악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치트키 같은 사람이 '히사이시 조'입니다. 지브리 애니에 영혼을 불어넣을 정도로 감미롭고 뛰어난 선율이 애니의 터보 엔진을 달아줍니다. 스토리는 휘발되었지만 이 노래만큼은 지난 15년 동안 수 없이 들렸습니다. 정말 좋은 노래입니다. 하늘에서 소피와 하울이 마치 왈츠를 추는 듯한 명장면은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없었다면 음악 없는 댄스였을 겁니다.

마음을 찾은 하울, 젊음을 찾아가는 소피

보통 마녀의 마법에 걸린 주문을 멋진 왕자님 같은 마법사 하울이 주문을 외워서 날려 버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피는 자신이 마법에 걸린 것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피는 다시 젊어지려고 애원하지 않습니다. 70대 노인의 삶도 장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소피가 점점 젊어지고 가끔은 젊은 모습으로 나옵니다.


소피가 다시 20대 아가씨로 돌아갈 때는 하울을 사랑하는 감정을 보일 때만 아가씨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 사실을 소피는 잘 모릅니다. 소중한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을 희생하게 되고 사랑할수록 소피는 젊어집니다. 그렇게 소피는 다시 젊음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상징색인 은색의 머리는 별처럼 빛이 납니다. 나이 들어서 얻은 삶의 지혜를 안고 젊은 몸으로 사는 소피는 우리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몸과 마음이 모두 밝은 시절이 됩니다.


심장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던 하울에게 마음을 찾아주며 몸이 왜 이리 무겁냐는 말에 '마음은 무거운 법이야'라는 말도 대답해 줍니다. 마음은 무겁죠. 그 무거운 마음을 가지려면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그래야 묵직한 영혼, 세상의 밝히는 불빛 같은 마음이 됩니다. 소피는 은색의 불꽃을 가진 선한 사람 그 자체입니다. 이런 소피는 주변의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만듭니다.


지브리 애니 중에서 TOP3로 선정하고 싶은 애니입니다. 참고로 1위는 '이웃집 토토르', 2위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3위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애니입니다. 후반 결말 부분이 약간 오글거리고 왜 전쟁을 하는지도 왜 쉽게 또 멈추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만 빼면 노래, 작화, 스토리, 액션 모두 완벽에 가까운 애니입니다.

  1. 별점 : ★★★★☆
  2. 40자 평 : 늙음이 슬픔이 아닌 누군가의 은빛 등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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