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는 변산, 시인의 방
Hideaway of Poet |
문득 변산으로 떠나고 싶어졌다.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윈 눈 딱 감고 떼어낸 채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나면 시시콜콜 가르쳐주지 않아도 몸에다 마음을 비벼넣어 섞는 법이 기억날 것 같아서 비록 오랜 시간 시를 잊은 나일지언정.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 맛 본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안도현, ‘모항으로 가는 길’ 中
작당마을 |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는 직장인에게 소주와 삼겹살 냄새가 심심찮게 묻어난다. 어젯밤 회식의 거한 흔적이려나. 퇴근하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다시 출근하는 삶. 인생의 절반을 욕망의 내부순환로 같은 2호선에 파묻혀 지냈다. ‘3·6·9’에 찾아온다는 직장인 사춘기도 벌써 두 번이 지났다. 읽기와 쓰기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소녀는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읽기와 쓰기를 하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미문(美文)만 읽어도 짧은 것이 인생일진대, 책은 읽되 일에 필요한 책이요 글은 쓰되 내 글이 아닌 탓인가.
‘꽃게가 간장 속에/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로 시작되는 시를 우연히 읽은 것은 출근길의 어느 날이었다. 언제부턴가 지하철 스크린도어마다 시를 한 편씩 써놓은 덕분이다. 간장게장이 될 운명을 받아들인 어미 꽃게가 배 속의 알들에게 ‘저녁이야/불 끄고 잘 시간이야’ 속삭이는 마무리에 영화 <타이타닉>에서 침몰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던 3등실 엄마가 오버랩되며 괜스레 코끝이 울컥했던 아침이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 시가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이란 걸 알았다.
곰삭일 줄 모르는 탓일까. 나는 시를 잘 모른다. 안도현 시인은 더더욱 모른다. 그러니 소주와 삼겹살 냄새 찌든 날 찾아낸 바닷가 나무집이 안도현 시인이 때때로 머물다 시를 쓰는 곳인 것은 우연이고, 부안이 전북인지 충남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기차표부터 끊은 것은 충동이다. 작은 창문으로 댓잎 소리가 들리고, 밀물에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그 방에 가면 잊었던 시(詩)를 찾을 것만 같아서.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中
스테이 변산바람꽃 |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2월, 변산에 하얗고 부끄럼 많은 꽃이 핀다. 변산바람꽃. 변산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꽃이자 ‘시인의 방’이 있는 작당마을 통나무집의 이름이다.
치과의사인 아버지가 설계하고 서울서 대학 다니다 재미없어 돌아온 아들 준규 씨가 운영한다. 네댓 개의 방이 있는 아담한 집이지만 언제부턴가 훌쩍 입소문이 났다. 아들과 아버지가 매일 조금씩 천천히 고치고 꾸며나 가는 손길에 애정이 스며서일까, 한동안 문인들의 레지던스로 운영하며 ‘글쓰기 좋은 곳’이 되어서일까.
안도현 시인은 ‘모항으로 가는 길’, ‘낭만주의’, ‘바닷가 우체국’ 등의 시에서 부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시인이 부안을 사랑한 것이 먼저인지, 준규 씨 아버지와 친구가 된 것이 먼저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겨울이 되면 물메기탕을 먹으러, 때때로 갯벌과 곰소만을 끼고 작당마을에서 모항까지 2km 남짓 걸으러, 방학이 되면 며칠씩 시인의 방에 머물다 갈 뿐. 방은 단출하다. 침대 하나, 독서대가 딸린 널따란 책상 하나, 핸드드립 키트 하나. 문을 열면 대나무 숲이 있고, 창밖으론 도둑게 돌아다니는 바다가 하나 가득이다. 운이 좋으면 준규 씨와 함께 사는 고양이 ‘막시무스’를 만날 수도 있다.
‘쏴르르’ 시원하게 근심을 씻어가는 동해와 달리 서해는 ‘차르르’ 다친 마음을 어루만진다. 작당마을의 바다는 만조에도 강처럼 잔잔해 파도 소리가 요란하지 않다. 차르르르르. 소리가 좋아 창문을 열고 잤더니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5시 37분. 조금 더 잘까 고민하다 창밖을 봤다. 빗물 머금은 갯벌에 물안개가 살짝 오른 풍경이 걸작이다. 밤늦게 잠깐 내린 비 때문일까.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는’ 밤은 없었지만 대신 다른 걸 얻었다. 하나, 둘, 셋, 넷. 어젯밤 애써 세어낸 별네 개와 함께.
(좌)절대 할퀴지 않는 낭만고양이, 막시무스 (중)기타도 치고 가구도 만들고 글도 쓰고 커피도 볶고 요리도 하는 재주 많은 준규 씨 (우)글 쓰고픈 충동을 도저히 못 이겨낸 이들은 시인의 방에 놓인 ‘문장노트’에 각자의 문장을 쏟아냈다. |
(좌)오롯이 사색에 빠지기 좋은 책상과 창밖 (중)어제 볶은 원두로 곱게 내린 커피와 샌드위치를 대접받았다. 서해를 배경으로 먹는 아침이라니, 이런 호사도 없다 (우)한 바퀴 돌아보는데 채 10분이 안 걸리는 작당마을, 둑 무너진 양식장에서 망둑어가 제멋대로 뛰놀고 갯벌 나온 도둑게가 기웃거린다 |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짓밥 먹다가 석삼 년 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 안도현, ‘모항으로 가는 길’ 中
세상에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너는 마치 고장난 엔진처럼 툴툴 거리겠지 - 안도현, ‘낭만주의’ 中
내소사 |
재래시장에는 남의 집 빨래 더미를 훔쳐보는 것 같은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 안도현 시인이 극찬한 물메기탕이 궁금하기도 하고, 변산의 사생활을 훔쳐보고자 부안상설시장에서 늦은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반질한 백합이며 생물 갈치, 반쯤 말린 서대까지 기분 좋은 짠내가 풀풀 풍겼다. 막 시작한 생선 경매를 목격한 건 행운이었다. 인근 식당에서 나온 아주머니 서넛이 입 대신 뒷짐 진 손으로 암호를 교환했다. 가격이 같으면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봤다. 가위를 낸 아주머니가 퍼덕이는 상어를 맨손으로 잡았다.
안도현 시인이 단골이라는 ‘변산횟집’은 경매장 바로 앞이었다. 한 꺼풀 벗어난 골목에 숨어 있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진짜배기다.
이곳에서는 메뉴를 보지 말고 오늘은 뭐가 제일 맛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물메기는 제철이 아니어서 서대탕을 먹었다. 하얗고 야들야들한 속살이 양은냄비 속에서 펄펄 끓는다. 고슬고슬한 쌀밥에 황석어젓갈 조금, 갑오징어 껍데기를 넣은 고추조림을 툭 얹어서 삼켰다. 행복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
300번 버스를 타자마자 버스 기사가 알은체를 한다. 변산횟집 옆 테이블에서 점심을 드셨단다. 격포로 가려다 기사님 추천으로 곰소에 내렸다. 정수리에 꽂히는 뙤약볕을 고스란히 느끼며 쪼그려 앉아 염전을 구경했다. 소금은 언제 미느냐 물으니 원래 해 뜨기 전 새벽이나 한밤중에 미는 거란다. 한낮에는 소금이 여물어야 하는데, 그때 밀면 정신 나간 짓이라나. 삼칠일을 자연에서 제대로 여물어야 쓴맛 없이 고소한 소금이 된다며. ‘8부 염전 노랑머리 삼촌’의 말솜씨에 홀려 내 돈 주고 처음 소금을 샀다. 모항보다 더 고즈넉했던 궁항, 전나무숲길을 가로지르던 수만 마리의 개미 떼, 내소사 보리수나무 꽃의 은근한 내음, 밀물과 썰물이 전혀 딴판이었던 채석강의 반전, 길마다 피어 있던 분홍달맞이꽃…. 가방은 5kg 더 무거워졌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반짝거리기만 했다. 고작 하루 반 동안 위를 보고 아래를 봤을 뿐인데도. 시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
(좌)‘밥심’이란 이런 것이다 (우)채석강 앞에선 모두가 겸손해진다 |
(좌)지극히 오래 본 사이끼리의 ‘밀당’ (우)곰소염전의 이글이글한 한낮, 소금이 익는 시간 |
글 이현화 사진 문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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