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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봄을 알리는 자연의 몸짓은 단연 꽃이다. 따뜻한 햇살 아래 빨갛고, 노랗고, 하얀 꽃망울이 터지면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남도의 봄을 대표하는 여수는 어떠한가. 이른 봄부터 동백꽃이 만발하고, 뒤이어 벚꽃과 진달래가 지천이니 웃음꽃까지 피어난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빗방울 사이로 여수 시가지가 보인다. 어린 시절을 보낸 여수는 참 많이도 변했다. 전깃줄이 마구 엉켜 있던 조그만 골목은 어느새 깔끔한 교차로가 되어 있고, 북적거리던 재래시장은 커다란 쇼핑몰로 바뀌었다. 혹시 길을 가다 아는 이를 만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가능할 리 없다. 커버린 내 모습만큼이나 여수는 발전해 있었다.

오동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오동도 동백나무 숲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연분홍 매화

봄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도 꽃이 활짝 피어나는 걸
- 시인 용혜원 ‘봄꽃 피는 날’ 중에서

오동도에 가까워지자 붉은 꽃을 피운 동백나무가 마치 ‘따라오시오’라고 말하듯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방파제로 연결된 작은 섬까지 동백열차를 타고 갈 수도 있으나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푸른 바다와 갈매기도 보고, 짭짜름한 바다 냄새도 맡을 수 있으니 기분이 좋다.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동백꽃은 3월부터 4월 중순까지 붉은 빛깔을 뽐낸다 / 오동도로 연결되는 방파제

어릴 적, 친구들의 손을 맞잡고 소풍을 가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걸어 들어간 곳에는 달라진 오동도가 자리해 있었다. 쓸모없이 넓기만 했던 공간은 어느새 근사한 공원으로 변했고, 여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거북선과 다양한 조각 작품들을 전시해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게다가 공원 중앙에 설치된 음악 분수는 매시간 재미있고 경쾌한 분수쇼를 진행하는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물줄기가 흥을 돋운다.

 

오동도 산책로에는 누가 동백섬 아니랄까봐 붉디붉은 동백꽃이 지천으로 깔렸다. 이른 봄부터 피기 시작한 동백꽃은 4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데, 장관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이곳에서 둥지를 틀었는지, 몸체가 거인 같은 동백나무들도 하나의 거대한 터널을 만들고, 숲을 이룬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동백꽃이 흐드러진다.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용굴, 코끼리바위, 거북바위, 코끼리바위 등 갖가지 기암괴석과 만난다

오동도에 얽힌 전설도 재미있다. 고려 공민왕 때 봉황새가 오동 열매를 따먹으러 오동도에 날아들었는데, 이를 고려 왕조의 멸망으로 풀이한 신돈이 봉황새의 출입을 막고자 오동나무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실제로 오동도는 오동잎 모양의 섬 안에 오동나무가 많아 불리게 된 이름이지만 전설처럼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버려서인지 현재는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슬픈 전설도 함께 전해온다. 옛날 이곳에 한 부부가 살았는데,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쫓기던 여인이 결국 바다에 몸을 던져 정조를 지켰다. 이를 슬퍼한 남편은 오동도 기슭에 여인의 무덤을 지었고, 그해 겨울부터 무덤가에는 동백꽃이 피어나고 푸른 정절을 상징하는 신우대가 돋았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 없지만 아무렴 어떠랴. 동백꽃이 저리 아름다운걸. 세월이 지날수록 더 울창해질 동백꽃이 기대될 뿐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돌산대교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밤이 되어야 진가를 발휘하는 오색 빛깔 돌산대교

걸음을 재촉해 돌산으로 향했다. 여수 시내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돌산은 큰 산 8개가 연결된 섬으로 국내에서 9~10위를 다툴 만큼 규모가 크고, 돌산공원과 송림숲, 방죽해수욕장, 향일암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여수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 그 시작점이 바로 길이 450m, 너비 11.7m의 돌산대교다. 돌산과 여수를 잇는 대교를 지나면 아름다운 여수항과 돌산대교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돌산공원을 꼭 들러야 한다. 자동차가 없는 뚜벅이 여행자라면 오동도 자산공원에서 1.5km 길이의 해상케이블카를 타고 바로 돌산공원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푸른 바다와 거북선대교를 발밑에 두는 짜릿한 경험도 가능하다.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크고 작은 횟집들이 북적거리는 돌산대교 초입 풍경 / 자산공원에서 해상케이블카를 타고 돌산공원으로 이동할 때 만나는 여수 시내

향일암으로 가는 일정을 내일로 미루고 잠시 게으름을 피워 돌산공원에 머무르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쉼 없이 달려온 여정에 심신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돌산대교의 멋진 야경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뉘엿뉘엿 해가 지면서 돌산대교는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햇살을 받아 시원해 보이는 대교에서 붉게 물드는 노을빛을 담은 대교로 변신하고, 곧이어 파랑, 초록, 노랑, 분홍, 빨강 등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한밤의 조명쇼까지 이어진다. 어디 그뿐이랴. 짙은 어둠이 깔린 밤, 돌산대교 너머로 집집마다 불이 켜지면 여수의 아름다운 야경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향일암이 있다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동백꽃 만발한 여수의 봄

향일암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풍경 / 큰 바위 사이 작은 동굴을 통과해야 모습을 드러내는 관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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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왓장 위에 곱게 핀 동백꽃 / 큼지막한 바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야 향일암의 속살을 볼 수 있다

이른 아침, 돌산 끝자락에 위치한 향일암에 올랐다. 새해가 밝을 때마다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곳. 새해는 아니지만 이곳을 찾는 발걸음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해를 향해 바라보다’라는 의미의 향일암은 신라 원효대사가 수도하며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장소다. 양옆으로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는 계단을 오르고, 한 명밖에 들어갈 수 없는 비좁은 바위틈을 지나면 우여곡절 많은 대웅전이 등장한다. 작고 아담한 대웅전은 오래되어 보수공사를 한 뒤 황금빛으로 장식했지만 얼마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되었고, 3년의 복원 과정을 거쳐 2012년에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완성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웅전 옆에는 어린 시절, 어느 스님께서 “눈을 감고 마음으로 걸어보라”라고 말씀하셨던 작은 바위 동굴이 있다. 동굴을 통과해야 관음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야말로 향일암의 ‘꽃’이다. 만개한 동백꽃과 푸른 망망대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린다. 흐린 날씨 탓에 해돋이는 볼 수 없었지만 전혀 아쉽지 않다. 오래전 추억과 고요한 산사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여행의 기쁨은 차고 넘친다.

 

글·사진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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