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나든, 똥물 날라오든 우리는 무조건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최근 국정감사가 열리며 국회가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국정감사 기간 동안 각 상임위별 피감기관 관계자들과 국회의원들은 각자 준비한 자료를 놓고 전쟁을 치르는 듯한데요. 한바탕 설전이 펼쳐지는 국회에서 누구에게도 주목받진 않지만, 소리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국회의원들의 발언 내용을 기록하는 '속기사'인데요. 단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만큼 국회에서 겪은 각종 애환도 많다고 하죠. 오늘은 국회의 현장을 역사로 기록하는 직업, 국회 속기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현대판 사관', 국회 속기사
속기사란 직업이 생소하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속기사는 빠를'속'에 기록할'기'라는 한자 뜻풀이 그대로 어떤 사안에 들은 바를 있는 사실 그대로 빠르고 신속하게 받아 적어 내리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국회 속기사들은 국정감사는 물론이고, 청문회와 본회의, 상임위원회, 특별위원회 등의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죠.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만든 회의록은 국회 회의록 시스템을 통해 국민들에게도 공개됩니다.
이 때문에 국회 속기사들은 '현대판 사관'이라고도 불리는데요. 국회 회의를 속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 시기는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1차 회의부터입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초기 국회부터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인데요. 당시에 작성한 속기록을 통해 우리는 71년이 지난 지금 제헌국회의 모습을 생생히 알 수 있죠.
컴퓨터 속기 시대의 개막
국회 속기사는 크게 수기 속기사와 컴퓨터 속기사로 구분합니다. 1995년 9월 4일 컴퓨터 속기사를 처음 채용한 후 수기 속기사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데요. 2017년 기준으로 국회사무처 소속 속기사는 약 124명으로 이중 컴퓨터 속기사는 86명, 수기 속기사가 38명입니다. 원래 수기 속기사와 컴퓨터 속기사를 같이 뽑던 국회는 2000년부터 컴퓨터 속기사만 채용하고 있죠.
이들의 속기는 일반인이 컴퓨터 타자를 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데요. 컴퓨터 속기는 일반 컴퓨터의 키보드 모양으로 생긴 특수 컴퓨터를 이용합니다. 이 컴퓨터 1대의 가격은 무려 400만 원이 넘죠. 수기 속기와 달리 컴퓨터 속기는 기호를 글자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 없고, 3벌식 배열로 초성과 중성, 종성의 조합을 한 번에 입력해 더욱 빠른 속도로 타자를 기록할 수 있죠. 보통 1분에 320자 정도의 속도를 내는 식인데요. 여기에 휴대용 속기 컴퓨터도 많이 보급되고 있어 수기 속기사들이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물부터 재떨이, 명패 투척까지
과거 국회 속기사들은 단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작업을 하는 만큼 돌발상황을 겪는 일도 많았습니다. 특히 속기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화는 1966년 국회 오물투척 사건인데요. 당시 야당인 김두한 의원은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사건'을 은폐하려는 박정희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본회의 도중에 인분들 단상에 투척했죠. 당시 이 인분은 정일권 국무총리와 장기영 부총리는 물론 속기사들이 함께 뒤집어쓰기도 했습니다.
국회에서는 말다툼과 몸싸움 등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1970년대 국회에는 재떨이가 상시 비치됐는데, 국회의원들이 몸싸움을 하다가 재떨이를 던지는 통에 속기사들의 안전을 위협했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후에 재떨이는 안전을 고려해 유리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뀌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금연 문화까지 도입됐는데요. 의원 명패 역시 이동식이었으나, 여야 간 격돌 시 이들을 위협하는 무기로 변질되며 붙박이 명패로 바뀌었죠.
국회 속기사의 남모를 애환
어떻게 보면 그저 컴퓨터로 남의 말을 옮겨 적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국회 속기사는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선 속기사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발언자의 알아듣기 힘든 발음과 작은 목소리라고 하는데요. 한 국회 속기사는 "마이크가 꺼진 후에도 한 의원이 계속 발언을 해 입 모양을 쳐다보며 기록을 하는데, 회의가 끝난 후 행정실 직원이 '왜 의원님을 째려보느냐'고 했다"고 전하기도 했죠. 의원들 특유의 말투나 사투리까지 그대로 기록해야 하므로 기록의 오류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도 간단치 않습니다.
속기록에 남기길 원치 않는지 일부러 입을 가리고 말하거나, 마이크 옆에서 작게 말하는 국회의원들도 있다고 하는데요. 임시 회의록이 나온 후 속기사에게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삭제해달라", "왜 내가 한 말을 넣지 않았느냐"고 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고 하죠.
역사를 기록하는 중요한 역할 때문에 육체적인 직업병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중요 회의는 2인 1조, 25분 간격으로 계속 팀이 교체되면서 속기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보통 한 조가 10번 이상 들락거리며 속기록 작업에 참여하는데요. 이런 작업환경 때문에 속기사들은 주로 디스크로 고생합니다. 긴장한 상태에서 기록을 하다 보니 허리와 목 디스크에 많이 걸리고 손목 관절 등에도 무리가 많죠. 안구질환과 이명을 호소하는 속기사도 적지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주5일 근무이지만, 주말과 휴일에 회의가 있으면 국회 속기사들은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는데요. 명절과 크리스마스에 가족들과 보내지 못할 때도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속기사로 근무하는 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죠. 물론 장점도 있습니다. 우선 "국회에 일하며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고 합니다. 그들이 기록한 게 전부 책자로 발간돼 보관되며, 역사로 남기 때문이죠. 승진도 빠른 편인데요. 속기사 임용시험에 통과되면 처음 9급으로 채용되어 6년~10년 정도면 대부분 속기사들이 6급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국회 속기사 연봉은?
이쯤 되면 이들의 연봉도 궁금해집니다. 국회 속기사들은 공무원 급여 기준에 따라 임금을 받습니다. 2019 공무원 봉급표에 따르면 9급 공무원 1호봉의 월급은 1,592,400원인데요. 이 기본급에 특별수당, 자녀수당 등 별도의 수당이 더해지면 더 높아집니다. 여기에 근속 연차와 승진으로 호봉이 높아지면 속기사들이 받는 연봉은 더욱 늘어나겠죠.
국회 속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시행하는 한글속기 3급 이상의 자격증을 취득해야 합니다. 채용은 결원이 있는 경우 매년 12월경에 다음 연도 국가 공무원 임용시험 시행계획을 공고하게 되는데요. 매년 6~7월 국회사무처가 시행하는 국가공무원 임용시험에 합격하면 됩니다. 2016년 기준 속기사의 경쟁률은 대략 77:1였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