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배우 최민식이 작품에 임하는 자세
배우 최민식이 영화 ‘파묘’로 돌아왔다. / 쇼박스 |
“배우의 얼굴로 담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되는 묘한 마법.”
장재현 감독이 영화 ‘파묘’로 협업한 배우 최민식을 두고 한 말이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관객을 설득해 내고야 마는 35년 차 연기 베테랑 최민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신이 맡은 배역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며 묵직하게 관객의 마음을 붙잡는다.
최민식이 열연한 ‘파묘’는 거액의 돈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한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담은 오컬트 미스터리다. ‘검은 사제들’ ‘사바하’를 연출한 장재현 감독의 신작으로,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섹션에 공식 초청돼 호평을 받은 데 이어, 지난 22일 국내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극 중 최민식은 40년 경력의 땅을 찾는 풍수사 상덕을 연기했다. 상덕은 누울 자리를 봐 달라는 부탁을 들으면 일단 단가부터 계산하지만 자연과 땅에 대한 철학만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오컬트 장르에 도전한 최민식은 깊이 있는 연기 내공으로 베테랑 풍수사의 면모부터 평범한 가장의 얼굴, 강인한 카리스마까지 완벽 소화하며 관객을 매료한다.
개봉 당일인 지난 22일 <시사위크>와 만난 최민식은 “개봉 날 눈도 오고 예매량이 1위라고 하던데 천지신명께서 도와줬나 싶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배우들 사이 튀지 않는 벽돌 한 장이 되고자 했다”며 작품에 임한 남다른 자세를 전하기도 했다.
‘파묘’에서 베테랑 풍수사 상덕을 연기한 최민식. / 쇼박스 |
-완성된 영화는 어떻게 봤나.
“단순히 재밌게만 만드는 게 아니라 땅에 대한 생각, 신에 대한 생각, 현재 인간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런 것에 대한 어떤 고찰, 그걸 영화적으로 뽑아내는 장재현 감독의 시선이 참 좋고 신선했다. 단순히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무서움을 주는 자극적인 영화가 아닌 감독만의 따뜻한 시선이 녹아있어 좋았다.”
-어떤 마음으로 작품을 택했나.
“장재현 감독이 우리 땅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뽑아내고 약 발라주고 싶다고.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국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땅의 트라우마’라는 표현을 처음 들어봤고 멋있었다. 또 본인은 기독교인데, 종교 외적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그것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도 멋있었다. 편협한 사고에 갇힐 수 있고 자칫 위험하고 고루해질 수도 있는데 그런 확장에 대해 열린 친구였다. 전작을 보더라도 만듦새가 좋잖나.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영화적으로 재밌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게 곧 실력이거든. 너무 띄워주나?(웃음)”-시나리오는 어떻게 다가왔나.
“친근함을 느꼈다. 무섭다 안 무섭다, 오컬트다 아니다보다 무속, 풍수 등 어릴 때부터 늘 옆에 있던 소재라 친근하게 다가왔다. 10살 때 폐결핵에 걸려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디 가서 사주를 보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나온다. 의사들이 다 포기했는데 우리 엄마가 절에 가서 그렇게 기도를 했다. 희한하게 낫다. 그런 신비로운 경험이 있다. 나는 그것이 어떤 신에 대한 감사보다 어머님의 정성이라고 느낀다. 이처럼 우리가 살면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잖나. 그런 정서가 있고 풍습이 지금도 있다. 풍수나 굿, 이런 것들이 친근하고 재밌게 다가왔다. 하나의 공연 같기도 하고 그랬다.”-풍수사 역할이었다. 어떻게 접근했나.
“김상덕은 40년을 땅 파먹고 산 사람이다. 그 세월을 내가 어떻게 메우겠나. 시나리오를 많이 본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하나 표현해 봐야겠다고 느낀 것은 이 사람이 평생 자연을 보면서 살아왔고 자연을 관찰하고 평생 연구해 온 사람이기 때문에 산을 바라볼 때 일반 등산객이 ‘야호’ 하듯 하지 않겠다는 거다. 더 깊이 바라보겠구나. 흙냄새도 맡고 맛도 보고, 산세를 보든 나무 한 그루를 보든, 풀 한 포기를 보든 깊게 바라보는 태도, 그 느낌이 김상덕 캐릭터의 가장 큰 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거 하나는 잡고 갔다.”캐릭터에 실재감을 불어넣은 최민식(왼쪽). / 쇼박스 |
-실제 풍수사를 만나보기도 했나.
“이 작품을 하면서 만난 적은 없고 그 전에 사석에서 어떤 지관 한 분을 만났다. 그때 ‘우리 집이 어딘데 길지냐 흉지냐’ 물어보고 그랬다.(웃음) 그때도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냥 평범한 아저씨였다. 도사처럼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평범함 속에서 땅을 감별하거나 할 때는 전문성이 있는 그런 정도의 느낌이었다.”-평범한 가장이자 아빠의 모습도 담고 있는 있어 더 실재하는 인물처럼 다가왔다. 의도한 부분일까.
“시나리오에 그렇게 나와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상갓집에서도 웃는 사람이 있고 슬프다고 해서 다 슬픈 것도 아니다. 그게 인생이고 삶이다. 감히 건방지게 내가 인생이고 삶이고 할 수 없지만 아주 슬픔 속에서도 웃음은 있고 행복과 유머 속에서도 슬픔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인생이고 그게 김상덕이었다. 그런 부분을 만들어줘서 감독에게 고마웠다.”
-현실감 넘치는 인물을 완성한 배우의 힘이기도 하다. 비결은 무엇인가.
“영업 비밀이다.(웃음) 그게 나의 일이야. 그럴듯하게 사기를 치는 거지. 허구의 인간을 현실에 있을법하게 그리는 게 나의 일이잖나. 노하우는 없다. 감독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김상덕은 이런 인물이다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수백 번 생각한다. 많은 대화를 하고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의 외형과 내면적 조건을 구분한다. 그렇게 데이터를 입력해서 결국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그 인물이 돼있어야 한다. 내가 만든 무형의 인물에 내가 자꾸 다가가야 한다. 얼마나 밀착이 돼 있느냐가 중요하다. 배우가 가장 외로운 순간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나의 작업에 개입이 안 된다. 디렉션은 줄 수 있다. 하지만 나 혼자 감당해내야 할 일이다.”
최민식이 캐릭터 구축 과정을 떠올렸다. / 쇼박스 |
-풍수사, 무당, 장의사까지 팀플레이가 돋보였다. 호흡은 어땠나.
“‘묘벤져스’라고 하더라.(웃음) 지관과 장의사는 한 팀으로 다닌다. 너무나 오랜 세월 같이 일을 한 사이다. 화림과 봉길은 MZ 무당이다. 아주 ‘신빨’ 좋고 영엄하다. 그들이 같이 협업을 하는 거다. 옛날부터 같이 협업한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게 보이는 게 관건이었다. 유해진은 워낙 작품에서 많이 봤다. 일제강점기 때 봉오동에서 싸운 경험(‘봉오동 전투’)도 있고.(웃음) 김고은과 이도현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어색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둘 다 넉살도 좋고 술도 좋아하고 그래서 아주 예전부터 작업을 같이 한 친구들처럼 느껴졌다. 아, 프로구나 싶었다. ‘묘벤져스’를 표현하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믿음이 갔다.”
-직업적인 특징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을 했나.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야 한다는 게 머릿속을 항상 맴돌았다. 무속인도 그렇고 어떤 영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눈빛이 돌변할 때가 있다. 그걸 본 기억이 나거든. 특히 무속인들이 그렇다. 풍수사도 어떻게 보면 반무당이다. 역사책 공부하듯 지식만 갖고 흉지와 길지를 판단하진 않는다. 영적인 교감, 자연과의 영적인 교감을 통해 판단한다. 의뢰가 들어와서 무언가를 볼 때 모드가 달라지는, 세포가 살아나는 그런 느낌을 어떻게든 표현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보다 김고은이 그걸 확 해버리더라.(웃음)”-김고은의 연기는 어떻게 봤나.
“김고은은 ‘파묘’의 손흥민이었다. 이도현은 김민재, 나는 벤치에서 물 떠다 나르는 선수였다. 하하. 배우가 이미지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김고은이) 그런 몹쓸 것에 갇히지 않고 용감하게 도전했다. 아무리 배우라도 무속인 역할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 (김고은이) 스스럼없이 자신을 열고 내려놓고 뛰어 들어가 배우고 몰입돼서 하는 걸 볼 때 선배 입장에서는 너무 대견하고 기특하다. 그런 자세로, 도전 정신으로 대담하게 열어놓고 나아가면 앞으로가 더 기대되지. 김고은의 다른 모습이 얼마나 기대가 되나. 그런 친구들과 작업하면 나도 되게 좋다.”
-스트라이커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었나.
“건축으로 치면 튀지 않는 벽돌 한 장이 되고 싶었다. 내 벽돌이 크거나 튀어나오면 안 된다. ‘파묘’에서는 김고은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었던 거다. 그 퍼포먼스가 돋보여야 한다. 거기서 내가 같이 춤을 춰선 안 되는 거다. 누가 더 돋보이느냐는 연출 라인에서 결정이 되는 것이지 배우 개인의 욕심이 앞서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을 눌러줘야 하는 게 연출의 몫이고 배우가 서로 경쟁할 일은 아니다.”앞으로 배우로서 더 많은 도전을 하고 싶다는 최민식. / 쇼박스 |
-장재현 감독은 어땠나.
“배울 점이 많은 친구다. 이제 상업영화 3편을 찍은 건데 어떻게 저렇게 촘촘하게 구멍도 안 보이는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준비해 나가는 과정, 빌드업하는 과정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중간에 지치기도 하고 그냥 ‘대충 갑시다’ 할 수 있는데 그런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흙 색깔까지도 체크했고 불도 CG가 아니었다. 과학기술은 액세서리냐, 왜 고생스럽게 그걸 만드냐고 했는데 결국 만들더라. 덕분에 촬영할 때 따뜻하긴 했다.(웃음) 장재현 감독이 기독교 집사인데 무속인에 대해 더 많이 안다. 하하. 난 그런 게 참 좋다. 편협되지 않고 다 열어놓고 토론하고 만나고 술도 마시고 그런다. 그런 게 영화감독이지. 참 좋았다.”-40년간 땅을 보며 살아온 김상덕처럼, 35년 동안 배우라는 직업으로 살아왔다. 돌아보면 어떤가.
“얼마 전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왔다. 그분(배우 신구)도 아직 하고 있는데 나는 핏덩이다. 돌아보면 안 된다. 35년이라는 세월을 누가 말해줘서 알지 세고 앉아있지 않는다. 세서도 안 된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은 뒤로 주저앉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왕년에 이랬지 이건 아니다. 그건 배우뿐 아니라 창작을 하는 사람이 가질 태도가 아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연기든 어떤 분야에서 한 획을 긋고 많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예술가로서 존경을 받는 분들을 보면 절대 그런 게 없다. 청년이다 청년. 미친 듯이 작업한다. 그야말로 몸이 말을 안 들어도. 신구 선생님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나도 앞으로 할 게 많다.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작업이 많다. 의욕도 더 생긴다. 내가 만져보지 못한, 접하지 못한 세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작품을 했다고 해서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다 알겠나. 나의 인생도 한정돼 있고 작품도 한정돼 있다. 앞으로 내가 겪어봐야 할 영화적 세상이 더 많다는 거다. 지금까지 한 작품은 빙산의 일각도 안 된다. 그걸 못해보고 죽는 게 얼마나 아쉽나. 어떻게든 다 해보고 싶다.”
이영실 기자 swyeong1204@sisa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