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은퇴하면 임계장? 잡초처럼 잘리는 인생 2막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단지 경비원 김준호(63·가명)씨 일과는 오전 5시 50분쯤 시작된다. 다음날 오전 6시까지 24시간 꼬박 근무하고 다음날 하루 쉰다. 이렇게 격일제로 근무해 받는 월급은 실수령액 기준 198만원 남짓. 휴가는 1년에 하루씩 생긴다. 그 이상을 쉬고 싶으면 대체 인력 일당인 13만원을 월급에서 공제해야 한다. 하루만 쉬어도 월급의 6.5%가 날아가니 휴가는 언감생심이다. 김씨는 “어디 아프려면 휴무날에 아파야 한다”면서 웃었다. 그도 한때는 ‘사업가’였다. 각종 쇠붙이를 가공해 납품하는 대기업 하청업체를 20년 가까이 운영하다가 한순간 사기를 당했다.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어 지난해 재취업을 결심했지만 평생 쇠붙이만 알던 김씨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송파구의 한 민간어린이집 조리사인 조성은(가명·60·여)씨도 결혼 전에는 국내 유명 백화점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베테랑’ 매장관리자였다. 하루에 4~5시간씩 주5일 일하고 매달 받는 돈은 약 89만원. 왕년 월급의 3분의1밖에 안 된다.
‘누구나 결국은 비정규직이 된다’를 쓴 나카자와 쇼고(전직 언론인)는 자신의 책에서 “고령자는 기업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만큼 (이직이나 재취업을 위해) 들여야 할 수고가 청년에 비해 몇 배다.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고령자는 밭(노동시장)에 난 잡초다. 방해만 되니까 베어서 버린다”고 현실을 차갑게 고발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5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국내 취업자 약 2693만명 중 만 60세 이상 취업자는 512만 1000명(19.0%)이다. 만 60세 이상 전체 인구 1187만 5000명의 약 43.1%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서 일하고 있을까.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만 50~59세 임금근로자의 35.5%, 60세 이상 임금근로자의 71.6%가 비정규직이다. 일하는 노인의 대부분은 저임금을 받는 단순 노무직에 종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는 자조 섞인 신조어가 화제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우리나라의 66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OECD 국가 평균치인 17.8%를 훌쩍 뛰어넘는 43.8%다. 압도적 1위다. 상당수의 노인 근로자들이 평생을 몸담아 온 분야의 경력을 살리기는커녕 언제 대체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일자리를 움켜쥔 채 빈곤에 시달리거나 ‘갑질’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매달 관리비에서 월급이 나오다 보니 하인 부리듯 하는 주민들도 종종 있다”면서 “갑질을 당하면 그냥 때려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언제 다른 곳에 경비원 자리가 날지 모르는 데다 자발적 사직을 하면 실업급여를 받지 못해 참는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조씨도 “중장년층 일자리는 정식으로 채용 공고를 내기보다 지인 소개나 고용주 추천으로 검증을 받아야 다음 일자리가 연결되는 형태”라면서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한번 소문나면 소개가 끊기기 때문에 최대한 잡음이 안 나게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적 불안정과 불안한 근무 여건은 우울증으로도 이어진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2020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2018년 연령대별 자살률(인구 10만명당 명)은 80세 이상(69.8명), 70대(48.9명), 60대(32.9명), 50대(33.4명) 순서로 높았다. 칠레와 멕시코를 제외한 OECD 회원국 자살률에서도 우리나라는 70대와 80세 이상 연령층에서 1위를 차지했다.
노동시장 사각지대에서 ‘노인 비극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퇴직 후 경력이 단절돼 비연속적으로 일을 지속하는 집단의 비율은 한국(18.41%), 미국(11.58%), 독일(10.96%) 순서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고령 노동자들의 은퇴 전에 이미 재취업 조치가 정부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조 교수는 “단순히 보조금을 뿌려서 노인일자리를 일시적으로 늘리기보다 평생 해 온 직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종 개발을 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재량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도 “고령 노동자가 본래 직장에서 이탈하는 것을 늦추고 경력을 살려 연착륙할 수 있게 하려면 임금을 낮추거나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데, 전자는 임금피크제 도입 등의 조치가 취해지는 반면 후자에 대한 투자는 부족하다”면서 “국가가 개입해 생애 주기별 직무역량 지원 등 노인 일자리 생태계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생 2모작을 ‘고민할 수 있는’ 고령자와 불안정한 고용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생계형 고령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혜지 서울여대 사회복지학 교수는 “은퇴 시점과 그 후를 잇는 가교적 일자리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노동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라면서 “기초연금, 국민연금 등 노후소득만으로도 생계가 보장될 수 있도록 근본적인 보장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