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 김국희 연기를 보면 배가 아프다
배우 김국희 /사진=후앤유이엔엠 |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01년, 연극 동아리가 뭔 공연을 한다기에 시간이나 때울겸 찾은 학교 강당에서 무대에 선 그를 처음 봤다. 소감을 써서 줬더니 와서 꼬치꼬치 반박하는데 여간 귀찮지 않았다. ‘너 잘한다’고 한건데 이거 참···. 기사를 쓸 때 문득 그 생각이 나면 손이 다 떨린다.
김국희. 고등학생 시절 배우한다던 그와 작가한다던 문학청년은 졸업 후 7년 만에 대학로에서 다시 만났다. 반가운데 어색한 뮤지컬배우와 문화부 기자로. 한번은 뮤지컬 ‘빨래’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아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훌쩍 흘러 오늘, 그는 공연계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김국희의 연기는 투박하다. 섬세함과는 정 반대의 매력이 있다. 10대 후반부터 대학로 생활을 하며 연기를 실전으로 배웠다. 움직임과 감정에 대한 이론을 학교에서 배운 뒤 연습공연을 거쳐 대학로에 오르는 ‘수학의 정석’ 같은 정형화된 길이 아니었다. 덕분에 관객의 주의를 한순간에 집중시키거나 웃고 울리는 완급조절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계산하는 대신 성격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연기는 그 인물을 옷처럼 입어버리는 형태로 발전했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캡처 |
덕분에 그는 20대부터 할머니를 많이 연기했다.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나 ‘빨래’ 등 대학로 유명 뮤지컬을 보고 난 뒤 그를 만나면, 공연을 끝낸 배우가 아니라 옆에서 함께 본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특히 ‘빨래’에 함께 출연했던 이정은이 어느정도 포근한 느낌이었던데 반해 ‘꼬장꼬장’한 그의 모습은 두 번 보는 재미를 주기도 했다. 20대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연기력에 관객들이 깜짝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십수년간의 대학로 생활이 영상매체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었다. 일부 배우들은 무대에서 날아다니다가도 카메라만 들이밀면 찰나의 머뭇거림이나 과장된 표현으로 흐름을 깬다. 이 경우 다시 카메라 앞에 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
김국희는 이 결정적인 순간 자신에게 꼭 맞는 캐릭터를 선택해왔다. 인간적인 소시민의 전형적인 모습, 자신의 나이대와 이미지에 딱 맞는 역할들이었다. 영화로는 ‘유희열의 음악앨범’이 주효했다. 작품은 헤어짐과 재회 이야기로 첫사랑을 풀어냈으나, 주연 배우들이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반면 10여년의 나이를 혼자 다 받은듯한 은자가 남편과 의붓딸에게 외면받으면서도 두 주인공을 따뜻하게 품는 순간 순간의 감정이 작품의 간극을 메웠다.
지난해 KBS2에서 방송된 ‘회사가기 싫어’에서는 또 본인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워킹맘으로 등장해 분위기를 전환해야 하는 시기마다 빵빵 터트렸다. 짜증내는 표정에 ‘나도 짜증난다’는 시청자들도 많았다. 아이들에게 ‘엄마’ 목소리로 통화하자 전화 끊는 순간 허스키해지는, 정리해고 1순위가 자신이라는, 시부모 생신과 회사 워크숍이 겹쳤을 때의 공포는···. 회사도 안 다녀봤는데 어디 회사원을 그냥 끌어 앉혀놓은 것 같았다.
KBS2 ‘회사가기 싫어’ 캡처 |
그리고 지난주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통해 그는 특유의 절절한 감정을 쏟아내며 대중의 눈에 들어와 콱 박혔다.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잃고, 암세포가 뇌로 전이된 갈바람. 남편마저 외국으로 일하러 가 병실 지킬 가족도 없는 그녀의 두려움. “가슴 한쪽 없는게 그렇게 신기하냐”며 소극적으로 절규하자 “예뻐서 그렇다”는 할머니들의 대답. 결국 “나 언제 죽냐”라는 말이 “뭐가 예쁘다고”로 바뀌는 찰나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남편과 부둥켜안고 “살고싶다”며 눈물을 쏟아내는건 화룡점정.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늘 그랬다. 할머니, 하녀, 지독하게 버티며 사는 그 누군가. 차라리 울어버리는게 편한데도 어떻게든 참고 웃어보려는···우리 할머니, 엄마들의 모습과 꼭 닮았다. 아주 옛날 방식으로 연기를 배운, 캐릭터의 특성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그래서 더 지독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배가 또 슬슬 아픈것 보니 이 친구, 정말 샘날 만큼 연기를 잘한건 확실한 것 같다.
최상진기자 csj845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