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막 터지도록 맞고 반복적 성폭행도"···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피맺힌 증언
한국판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그날의 학대를 기억하고 있다. 피해자 절반은 퇴소 후에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시 형제복지원 피해자 실태조사 연구용역’을 맡은 동아대 산학협력단이 지난 24일 최종보고회에서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1972년부터 1987년까지 형제복지원에 수용돼 있던 피해자들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기억을 트라우마로 지니고 있었다.
‘면접 참여자 21’은 초등학교 2학년 때쯤 친구와 옆 동네에 놀러 갔다 형제복지원에 들어갔다. 형제복지원 단속반은 그를 구타한 뒤 복지원으로 끌고갔다. 그는 “아동 소대에 소속됐다. 제식훈련 때 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밥을 늦게 먹고 방망이로 맞곤 했는데, 맞다가 죽는 사람도 직접 목격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개금분교에서 수업을 듣기는 했지만 “교과 내용보다는 박인근 원장 일대기 같은 내용을 주입식으로 배우고 그랬다”고 기억했다. 이어 “자기 전 점호를 틀리면 반복하고 때리고 하다가 중대장이 나가면 그 안에서 또 구타가 시작됐다”며 “소대장이 성폭행을 많이 했다. 그 사람 말고도 성폭행하는 분대장, 소대장, 조장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면접 참여자 2’는 열차를 잘못 타 부산역에 내렸다 형제복지원 단속반에 잡혔다. 그는 수용 기간 중 맞아서 고막이 터지고 지속적 성폭행에 시달렸다. 부산역에서 오빠를 기다리다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게 된 ‘면접 참여자 15’도 비슷한 진술을 했다.
어린 나이에도 키가 크다는 이유로 여성소대로 분류된 그는 “여자들에게 브래지어를 지급하지 않았고, 생리대도 천만 4개 지급했다”며 “허벅지가 터지도록 매 맞고 정신병동에서 몇 개월 일하게 됐는데, 거기서 강간당하는 사람들과 낙태 수술을 하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형제복지원에서 성폭행을 당해 아이까지 출산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양이 돼버렸다.
탈출을 위해 소대장이 됐던 ‘면접참여자 4’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연구팀에 따르면 박인근 일가 외 거의 직원이 없었던 형제복지원에는 ‘악마의 수용소’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생매장을 했던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며 “글을 쓸 수 있었다면 기억이 선명했을 때 거기서 벌어진 일들, 억울하게 생매장당한 사람들의 위치 등을 적어서 남겨놓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자신이 한스럽다”고 호소했다.
박인근 원장이 원생 폭행이나 살인에 가담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전기기술자였던 ‘면접 참여자 13’는 1980년 사업차 부산에 갔다가 싸움에 휘말려 수용됐지만, 전기기술자라는 직업 탓에 박 원장 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원장실은 사무실 옥상 위에 따로 지어 놨는데 그 안에 야구방망이처럼 깎은 몽둥이 열댓 개, 대장간에서 만든 수갑 30개가 걸려 있었다”며 “하루는 원장이 불러서 가 보니까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고 진술했다.
연구용역팀이 조사한 전체 피해자 149명 중 수용자들은 당시 15세 이하가 74.5%로 가장 많았다. 열 명 중 여덟명(79.7%)은 납치 또는 강제 연행으로 수용됐다고 말했다. 끌려간 경위는 경찰(56.4%)이나 공무원(3.4%)에 의한 수용이 과반을 차지해 수용 과정에 위법이 엄연히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성학대도 빈번해 성추행(38.3%), 강간(24.8%) 등을 당했다는 응답이 과반을 넘었으며, 이들은 강제 노역으로 자상(67.2%)을 비롯해 평균 4.7개 신체부위를 다쳤다고 답했다. 수용 기간 동안 시설 내에서 사망자를 보거나 직접 들은 경험은 83.2%에 달했고, 3.4%는 사망자 처리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고 답했다.
퇴소 후에도 절반(51.7%)이 1회 이상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한편 부산시는 지난해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과 피해 생존자 지원을 위한 조례를 제정하고 지난해 7월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이번 조사는 1987년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진 뒤 행정기관 차원의 사실상 첫 공식 조사다.
조예리기자 sharp@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