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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태안 솔향기길 1코스

파도를 깨닫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파도소리에서 훌륭한 타악기 연주자의 음악을 발견한다.

무심히 해송 숲길을 걷다가 문득 파도 소리를 깨닫는다.


어느 바다, 어느 육지를 돌아 예까지 와서 두런두런 속삭이는지 그 이유야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갯바위에 부딪치고 또 부서지는 그들의 끈질김은 어느 순간 박자를 갖추고 일정한 리듬을 타는 훌륭한 타악기 연주자의 음악이 된다.


조금은 떨어져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의 진면목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사실일 것이다. 아득히 귓전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그러했다. 눈이 아닌 귀로 파도를 깨닫는 것은 눈이 보여주는 것,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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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여행자의 발길을 붙든다.

그래서였을까. 걷는 어느 중간 나무 등걸에라도 기대앉아 가만히 머물며 파도소리에 취해보고도 싶었다. 어떤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고, 내 안의 빈자리에 충만이 넘치게 된다더니... 어쩌면 여행의 목적이 그러할 것이고, 지금 이 순간 파도소리의 유혹 안에서 깨닫는 바도 그렇다.


가끔은 풍경마저도 소리로 다가와 자신 안에서 증폭되며 여행의 이유가 되기도 하나보다.

'용난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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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바위 어느 틈에 용난굴이 있다.

숲길을 벗어난 길은 바닷가를 에둘러 갯바위를 지난다.


이정표는 머지않은 곳에 '용난굴'이 있음을 알려준다. 용난굴은 이름 그대로 '용이 나와 승천한 굴'이란다. 밀물일 때는 바다의 차지였다가 썰물일 때라야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는 동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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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난굴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용난굴에 들어서면 굴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아주 오래전 이 각각의 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할 날만을 기다리며 오손도손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웬걸... 두 마리 중 한 마리만이 승천을 하게 되고, 남아 있던 한 마리는 끝내 승천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 울분을 이기지 못한 용은 피를 토하고 죽어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바위가 된 용은 아직도 용난굴 앞에서 제가 살았던 굴을 지켜보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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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바위가 용난굴을 굽어본다.

하지만 승천하지 못한 용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된다. 10여 년 전 '태안 기름 유출 사고'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게 된 것이다.


2007년 12월 7일, 이곳 태안의 앞바다에 홍콩 선적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 호'와 '삼성 1호'가 충돌하면서 유조선 탱크에 있던 약 8만 배럴의 원유가 태안 인근 해역으로 유출돼 태안 앞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이고 말았던 것이다.

참여를 통해 재난을 극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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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 현장

당시 태안 앞바다는 삽시간에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말았다.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쓴 새들이며, 기름범벅이 된 아름다웠던 해안의 갯바위들, 그리고 수많은 생명들의 보고였던 갯벌은 더 이상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그들의 땅이 아니었다. 한 순간의 실수에 의해 빚어진 재앙은 그곳을 터전으로 사는 인간과 수많은 생명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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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을 극복한 바다는 그저 고요하다.

하지만, 재난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힘의 모으는 인간의 노력은 위대했다. 약 123만 명에 이르는 자원봉사자들이 이곳 태안의 바다를 살리기 위해 달려왔고, 그들은 기어이 죽어가던 바다를 살려냈던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이 해변이 10여 년 전 기름으로 얼룩졌던 그 해변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소생된 그 모습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상처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다 아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바다 속의 생태계는 그날의 아픔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땅의 사람들은 힘을 모았고, 그렇게 모인 한 명, 한 명의 손길이 태안의 앞바다를 이처럼 다시금 찾아와서 보고, 느끼고, 걸을 수 있는 곳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참여의 손은 위대한 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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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자들이 다니던 길이 도보여행길이 되었다.

그리고 123만 명에 이르는 자원봉사자들이 해안으로 이동하기 위해 오고가던 그 길이 지금은 도보여행길이 되었으니, 지금 걷고 있는 솔향기길 1코스가 그 길이다. 솔향기길에는 아픔과 희망이 교차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 그곳이 곧 길이라 하더니 자원봉사들의 수많은 발걸음은 길을 만들었고, 그들의 열정과 도움의 손길은 역사라는 길의 한 페이지가 된 것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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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기길에는 아픔과 희망이 교차한다.

바닷가 갯바위를 벗어난 길은 다시 해송 숲으로 이어진다.


바람이 분다. 얼굴을 스치며 지나는 바람 속에서 험난한 생을 살아온 그들만의 뜨거운 땀 냄새를 맡는다. 고달프지 않은 삶이야 어디 있으랴마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삶에는 아픔과 땀이 배여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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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삶에는 아픔과 땀이 배여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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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크기는 걸은 만큼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먼 바다를 헤쳐 온 바람마저도 제 기나 긴 저만의 여정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바람이 그러하듯, 성장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며, 길은 언제나 우리가 걸은 만큼 우리를 풍성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삶은 길 위에 누군가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 보물찾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순례자>의 작가인 코엘료의 혜안이 다시금 마음에 와 닿는다.

영화에서 길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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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Wild' 포스터

<와일드>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미국의 작가인 셰릴 스트레이드가 4,300여km에 이르는 미 대륙 종단 트레일인 PCT(Pacific Crest Trail)을 도보 여행한 경험을 쓴 와일드(원제:Wild: From Lost to Found on the Pacific Crest Trail)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는 자신의 전부였던 엄마가 갑작스런 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뜨자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로 살던 셰릴이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기 위해 PCT(Pacific Crest Trail)를 걷는 94일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그녀는 1,700여km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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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Wild' 속 장면

그녀는 엄마의 죽음 후 방황한다. 무절제한 삶은 4년간 지속된다. 그녀에게 몰아닥친 슬픔과 분노는 그녀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거리의 여자로 섹스와 마약에 빠져들었고, 그녀는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자포자기의 삶을 살며 그녀에게 닥친 슬픔과 분노를 잊으려 했지만, 슬픔과 분노는 더 큰 슬픔과 분노를 불러올 뿐이다.

어느 날, 그녀를 상담하던 심리상담사가 묻는다.

"본인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당연히 소중하죠"

"그럼 누가 당신을 등한시했죠?"


그리고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엄마가 네게 가르칠 게 딱 하나 있다면, 네가 가진 최고의 모습을 찾으라는 거야. 그 모습을 찾으면 어떻게든 지켜내고."...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까 네가 맘만 먹으면 언제나 볼 수 있으며, 너도 아름다움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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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Wild' 속 장면

그걸 왜 몰랐을까. 그녀가 숱하게 들었던 엄마의 충고를 이해하는데 걸린 시간은 엄마가 돌아가신 지 4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리고 그녀는 거리 가판대에서 우연히 발견한 PCT 안내책자를 계기로 PCT를 알게 되고, 그녀가 가야할 길을 발견한다. 어쩌면 무모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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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Wild' 속 장면

어떤 뚜렷한 목표나 계획도 없이 자신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나선 길 위에는 인생이 그러하듯, 온갖 고난과 환희, 수많은 위험이 그녀를 기다린다. 반복되는 난관 앞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곤 딱 두 가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단순하지만 어려운 선택 앞에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나아가는 길. 그러니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여정만이 남는다.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초월하라"

그녀 앞에 놓인 험난한 여정이 그녀를 쓰러뜨리려할 때 그녀가 그녀에게 당부하던 말이었다.

진정으로 가깝고, 진정 현재에 머물며, 진정으로 내 것인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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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Wild' 속 장면

나아가는 여정은 절대 고독의 시간이었다. 사방이 눈으로 둘러싸인 텐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여우마저도 반가운 여정 속에서 그녀는 자신과 마주한다. 과거의 상처와도 날 것 그대로 만나 비탄과 통곡의 시간을 통해 화해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림으로써 그녀 스스로 사랑받아야 할 존재로서의 자신을 깨닫는다.


그렇게 하루하루 깊어지는 길 위에서 그녀는 널브러져 있던 자신을 곧추세우고, 자신을 망가뜨렸던 과거의 아픔을 떠나보내는 애도와 치유 과정을 통해 자신을 인정하고, 나아가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길 위에는 새롭게 살아가야 할 그녀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영화 'Wild' 속 장면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기도 하고, 더러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목마름과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녀는 나아갔고, 결국 종착지인 캐나다 국경 근처 '신들의 다리'에 도착한다. 출발할 때의 그녀가 아닌 새로운 그녀와 동행한 채로 말이다. 과거의 길을 돌아 현재의 길, 새로운 길로 당당히 걸어 들어온 것이다.

"내겐 지켜야 할 약속과 잠들기 전 가야 할 길이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이자, 그녀가 그녀에게 던지는 숙제이자, 목표가 되는 말이다. 결국 그녀는 지켜야 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고, 가야 할 길을 걸어 과거의 슬픔과 상처와 화해하고 떠나보냄으로써 새로운 자신과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영화 'Wild' 속 장면

최종 목적지인 '신들의 다리' 위에서 그녀는 그녀의 여정을 반추한다.

"엄마가 자랑스러워 할 딸이 되기까지 4년 7개월 하고도 3일이 걸렸다. 슬픔의 황야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숲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아냈다. 종착점에 닿기 전까진 어딘지도 모르고 걸었다. 신들의 다리. 수도 없이 감사하다고 되뇌었다. 길이 준 가르침과 나도 모를 미래에 대해..."


"이젠 공허한 손을 뻗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물속에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내 인생도 모두의 인생처럼 신비롭고 돌이킬 수 없고 고귀한 존재다. 진정으로 가깝고, 진정 현재에 머물며, 진정으로 내 것인 인생.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성적(wild)인가..."

어쩌면 삶은 슬픔을 먹고 자라는 흙탕물 속의 연꽃인지도 모를 일이다. 고난과 슬픔을 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인생이란 가장 슬픈 날 가장 행복하게 웃는 용기를 배우는 것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책 'Wild' 표지

영화의 원작인 셰릴 스트레이드의 책, <Wild>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맞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길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그 길을 완주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가고자만 한다면 길은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제나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가고자만 한다면 길은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더러는 꽃길을 걷고자 하지만, 길을 가려 걸은들 그렇다고 그 길이 얼마나 다를 것인가. 모든 길에는 나름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뿐이다. 그렇게 길 위에서 후회와 연민, 슬픔에 둘러싸인 자신과 화해하고 치유함으로써 우리는 최종적으로 새로운 길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인생이란 가장 슬픈 날 가장 행복하게 웃는 용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걸어야 하는 이유다.


멀리 보이던 여섬이 어느새 눈앞이다.


<태안 솔향기길 1코스... 3편에서 계속>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멀리 여섬이 보인다.

태안 솔향기길 1코스

꾸지나무골해수욕장 → 1.26km → 큰어리골 → 2.2km → 용난굴 → 1.41km → 여섬해변 → 0.93km → 가마봉전망대 → 1.64km → 당봉전망대 → 0.53km → 붉은앙뗑이 → 1.93km → 만대항 (전체 10km 남짓)


태안 솔향기길 1코스 가는 길

대중교통(원점 회귀시) – 하루 7차례 마을버스 운행. 버스 간격은 2시간~2시간30분 간격이므로 버스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함. (부도경로당 – 만대항)

박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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