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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수다] '레토' 유태오, 소련의 전설 '빅토르 최'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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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funE | 김지혜 기자] 한국계 소련 록가수인 빅토르 최는 키노(KINO)라는 그룹을 결성해 자유가 억압된 당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펑크록에 아름다운 선율, 자유 지향적인 음악은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고, 음반은 밀리언 셀러가 됐다.


영화 '레토'(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풍문으로만 들었던 소련 록의 전설 빅토르 최의 숨은 한 페이지를 엿볼 수 있는 근사한 음악 영화다.


약 30억의 제작비에 7주간의 촬영으로 완성된 영화는 수준급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흑백 화면 속에 1980년대의 주옥같은 록 음악이 흐르고, 매력적인 배우들은 시대의 정서를 머금은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를 연출한 러시아의 거장 키릴 세레브렌니프 감독은 콜라주와 애니메이션 기법 등 재기발랄한 기교로 꿈과 자유를 열망하던 당대 청춘들의 열정을 담아냈다.


배우 유태오와 소련 록의 전설 빅토르 최는 이방인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타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국적으로 세계 무대에 섰다는 점도 닮았다.


유태오가 빅토르 최를 만난 것은 운명이 아니었을까. 수천 명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 관문을 통과한 것은 물론이고, 우연찮게 오디션에 참여하게 된 것부터가 기적에 가깝다.


영화 '레토'는 지난해 5월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전 세계 영화 관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연출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극장 공금횡령 건으로 가택 구금돼 참석하지 못했지만 유태오는 배우들과 함께 씩씩하게 레드카펫 무대에 올랐다.


배우 유태오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오디션 소식을 접하고 연고도 없는 러시아로 향한 것도, 캐릭터를 구축하고 촬영을 준비하기까지 모든 것을 홀로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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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에 찾아온 기회…혈혈단신 러시아로


"'하나안'(2009)이라는 영화를 보고 반해서 영화를 연출한 박 루슬란 감독님에게 연락을 드렸어요. 고려인 4세인데 동갑내기라 금세 친해졌어요. 2017년 4월경 '러시아의 박찬욱' 같은 감독님이 빅토르 최의 어린 시절에 관한 영화를 준비 중인데 소개해줄 어린 배우를 찾는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때 전 농구 예능을 하고 있어서 살이 좀 빠져있었어요. 전화를 받고 난 후 화장실에 갔는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갑자기 낯선 거예요. 그러면서 빅토르 최의 실루엣이 얼핏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함께 있던 친구가 '네 사진을 찍어서 보내보라'라고 하더라고요."


유태오는 빅토르 최가 검은색 의상을 즐겨 입는 것을 참고해 올블랙 의상을 입고 지하주차장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러시아에 보냈다. 일주일 뒤 "모스크바에 오디션을 보러 올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한 장의 비행기 표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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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빅토르 최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레토'는 몇 해 전부터 기획됐으나 주인공을 찾지 못해 표류하던 프로젝트기도 했다. 유태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모스크바에는 정확히 24시간 머물렀어요. 키릴 감독님이 운영하는 극장에서 오후 12시부터 4시까지 오디션을 봤어요. 연기는 영어로 했고요. 어떤 느낌을 낼 수 있는지를 보려는 것 같았어요. 러시아는 극사실주의 연기의 시조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Konstantin Stanislavskii)의 본고장이잖아요. 현대 자유 연기의 시작이고 그게 미국으로 넘어가 메소드(극 중 인물과 동일시를 통한 극사실주의적 연기 스타일)가 된 거예요. 제가 평소 좋아하던 연기 사조의 본고장에서 오디션을 보는 그 마음이 얼마나 설레고 긴장됐겠어요?"


오후 4시, 혼신의 열연을 펼친 오디션을 마친 유태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영화 프로듀서로부터 "너인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언질도 받았다.


"10일 후 연락이 왔고, 2주 뒤에 다시 모스크바로 넘어갔어요. 크랭크인 3주를 앞두고 처음으로 대본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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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살 미완의 청춘 '빅토르 최'가 되다


영화 '레토'는 빅토르 최의 10대 후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대부분의 캐릭터도 실존 인물이다. 극 중 나타샤로 등장하는 인물의 일기를 기반으로 빅토르 최가 전설이 되기 전의 나날을 스크린에 담았다.


"빅토르 최의 첫 앨범은 1982년에 나왔어요. 그가 정말 유명해졌던 시기는 1986년 경이고요. 1981년에 태어난 제가 그의 18살 시절을 연기했네요. 감독님께서는 빅토르 최의 신비한 면모를 부각하기 위해 최대한 감정 표현을 절제하라고 하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것을 살리려고 보이지 않게 노력을 했어요"


노래뿐만 아니라 연주, 작곡에도 능한 빅토르 최를 표현하기 위해 12줄 기타도 연마했다. 핸드 싱크라고 해서 허투루 할 수는 없는 일. 한 달 만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연습을 거듭해 빅토르 최 특유의 힘 있는 기타 연주법을 숙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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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토'에는 유태오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100% 더빙이라 외국어 연기에 대한 부담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태오는 "더빙으로 한다기에 영어로 연기를 하면 안 될까 제안하기도 했는데 감독님이 입이 안 맞으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크랭크인을 3주 앞둔 시점에 러시아어 대사를 완벽히 마스터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일단 최대한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죠."라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러시아 스피치 코치와 함께 시간표를 짜서 시험공부 하듯 언어를 배워나갔다. 수면 시간 5시간을 빼고 하루에 10시간 넘게 쓰고 말하고를 반복했다.


영화에는 빅토르 최의 노래 9곡이 등장한다. 하지만 감독은 9곡뿐만 아니라 빅토르 최의 노래 대부분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유튜브에 있는 빅토르 최의 영상을 비롯해 감독에게 받은 영상, 서적, 신문 기록까지 샅샅이 뒤져 빅토르 최의 모든 것을 습득했다. 영화 내내 담배를 쉬지 않는 빅토르 최를 표현하기 위해 필터도 없는 담배를 수시로 피워대야 했다.


우여곡절이 많은 영화였다. 2017년 6월경 촬영을 시작했지만 8월경 중단되는 일이 발생했다. 키릴 감독의 갑작스러운 가택 구금에 대해 "빅토르 최의 영화를 만드는 것을 러시아 정부가 탐탁지 않아한다"는 말도 파다했다. 남은 4회 차 촬영은 12월에야 재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칸영화제에 출품했고, 5월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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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훌륭한 배우


유태오는 대기만성형 배우다. 1981년생인 그는 한국 나이로 39살이 됐다. 다소 늦은 스포트라이트라고 할 수 있지만 오랜 기간 연기 내공을 갈고닦았고, 글로벌 활동을 통해 다양한 경험까지 쌓았다.


외모의 개성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기술적 역량도 상당하다. 한마디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훌륭한 배우의 등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했던 유태오는 예정된 수순대로라면 체대에 진학해야 했다. 운명은 우연한 계기에 바뀌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체대 진학을 앞두고 1년 동안 쉬었어요. 그때 취미인 영화를 몰아봤는데, 좋아하는 배우의 출신 학교를 찾다 보니 한 곳이 나오는 거예요. 내 길을 정해져 있지만 연기를 짧게나마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뉴욕에 여행 간다고 하고 9개월짜리 비자를 받아서 3개월 코스로 등록했어요. 나머지 6개월은 놀아야지 하고서요. 체육관에서 느끼는 것과 무대 위에서 느끼는 것이 일견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가 관객과 좀 더 다양하고 섬세한 소통을 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뉴욕에 간 지 2주 만에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배우의 길을 가겠다'라고 선언했어요."


아버지를 설득한 한 마디는 "제가 70살이 되어도 배우일 것 같다"라는 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들의 손에 쥐여줬던 카드를 끊지 않았다.


배움을 향한 열정은 미국에 이어 영국에서도 이어졌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2002년에서 2004년 봄까지 미국에서 공부를 했어요. 미국에서 가르치는 연기 기술들은 다 심리학이 기본이에요. 기술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치우쳐져 있어요. 연기의 기술적인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찰나에 친한 선생님이 영국 로열 아카데미를 추천해주셨어요. 3년 프로그램을 압축시킨 3달 코스에 지원했는데 웨이트 리스트에 오른 끝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셰익스피어의 나라잖아요. 캐네스 브래너도 로열 아카데미 출신이고, 2004년 졸업생 선배는 벤 위쇼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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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에서 공부를 마친 유태오는 2009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맨땅에 헤딩'하던 시기였다.


유태오는 파독 광부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나고 자랐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한국어는 모른 채 30년 이상을 살았다.


"제 첫 오디션이 '고지전'이었어요. 그땐 한국어가 익숙지 않아 한 장짜리 대본을 읽는 데만 이틀이 걸렸어요. 비록 탈락했지만 계속 도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어요. 이후 뉴욕 아시아 영화제에 갔다가 이재용 감독님을 만나게 돼 '여배우들'(2009)에 캐스팅됐어요. 그게 제 한국영화 데뷔작이에요. 한국어를 10년째 배우고 있는데 아직도 마스터 단계는 아녜요. 운동선수가 계속 체력 훈련하는 과정과 같다고 생각해요."


유태오는 올해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와 '배가본드', 영화 '버티고'로 시청자,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버티고'는 7년 전 대사 없는 단역으로 등장한 '러브 픽션'의 전계수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다. 그는 "7년 전 단역이었던 제가 남자 주인공이 됐네요. 놀라운 일이죠"라고 기뻐했다.


'레토'는 러시아 말로 여름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여름은 만물이 영그는 시기다. 유태오의 성장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어떤 연기를 보여주고 싶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그런 건 없어요. 자연스레 보일 테니까요. 제 안에 아직 표현하지 못한 다양한 모습이 있어요. 기대해주세요"라고 자신감 넘치게 답했다.


ebada@sbs.co.kr


<사진 = 백승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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