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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최동원, "길을 밝혀주는 별 되고 싶어"…'나'보다 '우리'가 먼저였던 대투수

세상의 모든 최동원을 위하여.


2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대투수 최동원의 그날을 조명했다.


1970년대 고교야구 열풍이었던 시절, 경남고의 최동원은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이라는 한국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혜성같이 등장했다.


고교 야구 최고의 특급 에이스 최동원, 그의 등장에 한국 야구는 더욱 성장했고, 그런 그를 메이저리그에서도 탐냈다. 고교 최고 투수를 영입하려던 팀은 바로 현재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의 소속팀인 토론토 블루 제이스. 하지만 최동원은 메이저리거가 될 수 없었다.


당시 민심을 잃었던 정권은 3S 정책으로 국민들의 눈길을 돌렸고, 그 중심에 스타플레이어 최동원이 서 있었던 것. 결국 최동원은 메이저리그가 아닌 한국 프로 야구에 발을 들였다.


그는 고향 부산이 연고지인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고교 야구 최고 투수가 아닌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성장했다.


무려 한 시즌의 반 이상의 경기에 출전한 최동원은 연투를 마다하지 않고 팀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그런 그의 덕에 1984년 롯데 자이언츠는 한국 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전력상 상대인 삼성 라이온즈는 버거운 상대. 이에 감독의 목표는 1승이었다. 그럼에도 롯데는 승리를 위해 1,3,5,7차전 선발로 최동원을 내보내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에 최동원 또한 무리라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팀을 위해 흔쾌히 무리한 계획을 수락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로 나선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최초의 완봉승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어진 3차전에서는 무려 삼진 12개를 잡아내며 완투승을 거둔다. 그러나 5차전은 아쉽게 완투패를 당했다.


6차전 결과에 따라 7차전 진출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6차전의 롯데 선발 투수는 예상외의 선전을 펼쳤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교체가 불가피한 상황. 이때 마운드에 오른 것은 바로 5차전 선발 최동원이었다.


스스로 연투를 자처한 그는 6회 중간 계투로 투입되어 팀의 승리를 지켜냈다.


7차전 선발 투수로 내정되어 있던 최동원. 하지만 이대로 7차전까지 던진다면 3 연투로 누가 보아도 무리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최동원은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선발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기적같이 7차전 당일 폭우가 쏟아졌고, 이에 경기는 하루 연기되며 최동원에게는 하루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하루 휴식 후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은 초반부터 흔들렸다. 2회부터 실점을 허용했고 6회에는 피홈런까지 맞았다.


한계에 다다른 최동원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무너져갔다. 제발 바꿔줬으면 하고 바라던 그때 최동원은 감독에게 "한 회만 더"를 외쳤다. 포기하지 않는 그는 갈 데까지 가보자고 했고 그런 그의 마음이 닿은 것일까? 7회 초 롯데 타자들의 방망이가 신들린 듯 터졌다.


3대 4까지 추격에 성공한 롯데. 승기를 눈앞에 둔 그 순간부터 최동원의 투구도 달라졌다. 마치 새롭게 교체된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온듯한 착각을 할 정도로 이전까지 와 완전 다른 투구를 선보인 것.


7회 말 최동원의 무실점으로 다시 기회를 얻은 롯데는 8회 공격에서 3점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9회 말 마운드에는 여전히 최동원이 있었다. 한국 시리즈 우승까지 아웃 카운트 하나만 남은 상황에서 최동원은 역투를 펼쳤고, 이는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이 되며 롯데 자이언츠는 한국 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우승의 순간 "자고 싶어요"라고 소감을 전한 27살의 에이스 최동원은 그렇게 팀의 한국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한국 시리즈 7경기 중 5경기 등판해 무려 4번의 완투, 4번의 승리 투수가 된 최동원은 이후에도 매년 성장해나갔다.


프로 야구 최고의 스타가 된 최동원, 하지만 그는 나 보다는 우리를 생각했다. 이에 최동원은 프로 야구 선수들의 처우 개선과 비주전급 선수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연봉 하한선 제도와 연금 제도를 제안하며 선수 협의회를 창설했다.


140명이 넘는 프로 야구 선수들이 함께한 선수협의회의 결성에 구단들은 즉각 반응했다. 선수협에 소속된 선수들과 계약을 하지 않겠다며 강경 대응에 나선 구단들. 이에 결국 선수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뜻하지 않는 상황에 후배들에 미안함만 남은 최동원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최동원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평생 고향 팀에서 야구가 하고 싶다는 그를 고향팀인 롯데 자이언츠는 삼성 라이온즈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를 한 것. 이는 사실상 방출이자 보복성 트레이드였다.


그렇게 고향 팀을 떠난 최동원은 더 이상 롯데의 최동원이 아닌 삼성의 최동원이 되었고, 더 이상 예전의 강철 어깨가 아닌 그저 평범한 선수로 변해버렸다. 이는 모두 그 간의 혹사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았고, 대투수 최동원은 32살의 나이에 은퇴식도 없는 은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은퇴 후 15년이 흐른 2005년, 그는 한화 이글스의 지도자가 되어 특급 에이스를 키워냈다. 최동원은 류현진의 진가를 먼저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에 최동원은 이후 한화 이글스의 2군 감독으로 후배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대장암에 걸린 최동원은 결국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경기장에 나타난 그는 이전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병원에서도 말린 외출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야구 유니폼이 입고 싶어서였다.


그토록 야구를 사랑했던 최동원은 프로야구 중계를 지켜보며 숨을 거두었다. 자기 자신보다 팀을 우선시했던 야구 바보 최동원. 그는 야구공을 손에 꼭 쥔 채 2011년 9월, 쉰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몇 달 전 친한 기자에게 질문을 했던 최동원. 그는 "선수 시절 내가 쫓아다닌 것은 공이 아니다. 우리가 쫓은 건 별이었다"라며 "별은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되어야 진짜 별이다. 야구계를 위해 나도 뭔가를 하려고 한다. 최동원 이름 석 자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별을 쫓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그런 별이 되고 싶다"라며 끝까지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뭉클함을 자아냈다.


그가 만들고 싶던 선수협회는 2001년 후배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에 최저 연봉도 오르고 선수들의 처우도 개선되었다. 특히 선수 보호 가이드라인도 생겨 선수들 스스로가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됐다.


희생이라는 말을 유일하게 사용하는 스포츠에서 최동원은 야구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희생하며 공을 던졌고, 끝까지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삶을 살았다.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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