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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내가 아는 사람

오직 하나뿐인 그대 '혜원 신윤복'

조선의 화가 혜원 신윤복이 나를 꼬집는 이유.

 

치콘느 유스Ciccone Youth. 1986년에 록 밴드 소닉 유스 멤버들이 결성해 앨범 한 장 달랑 내고 끝내버린 프로젝트. 조선 화가 혜원 신윤복을 떠올리면서 뜬금없이 치콘느 유스를 들먹이는 이유는 뒤로 넘기고 우선 몇 해 전 종로구 동산방화랑에서 혜원의 그림을 보던 날로 간다. 전시명은 <조선 말기 화조도전 – 꽃과 새, 풀벌레, 물고기가 사는 세상>. 혜원의 그림은 2층에 있었다. 1809년에 그렸다는 정확한 기록이 있어 더욱 값진 <화조도첩>은 총 10폭의 그림이 수록된 화첩으로, 전시를 위해 한 폭씩 떼어 놓은 참이었다.


흑고니 두 마리가 물살을 가르는 그림이 첫 번째였다. 두 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엄치는데 뒷놈은 고개를 위로 꺾었다. 먹이를 삼키느라 그랬는지 다만 습관이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쓱쓱 길게 그린 물살이며 수면 아래로 살짝 보이는 휜 발로 짐작하건대, 제법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놈들의 눈을 봤다. 혜원의 그림에서 눈을 찾는 건 불가결한 일이다. 나는 보았다. 앞놈의 눈이 나를(화가를) 쏘아보고 있음을. 고개를 쳐든 뒷놈 또한 시선만큼은 나를(화가를) 향하고 있음을. 말하자면 혜원은 흑고니 두 마리가 한가로이 노니는 장면을 멀리 떨어져서 본 게 아니다. 방심하고 헤엄치다가 갑자기 인간과(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 1초도 안 될 타이밍을 낚아채듯 그렸다. 다음 장면은 뭐였을까? 돌연 나타난 인간에 혼비백산한 흑고니 두 놈이 난리를 피우며 수면을 박차는 걸까? 혜원이다. 당신이군요. 떨렸다. 좋아서 웃었다.

혜원, 내가 아는 사람

혜원 신윤복 '흑고니' 1809, 종이에 수묵담채, 28.2 x 44cm

혜원의 그림에서 눈을 찾는 이유는 시선을 따라가기 위해서다. 그림 속에서 서로 오가든, 그림 밖으로 뻗어 나오든 그 시선을 잇다 보면 회화라는 평면성이 어느새 입체로, 영상으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가 눈동자를 찍는 순간은 언제일까? 혹시 맨 마지막은 아닐까? 유치한 줄 알면서도 호기심은 꿀처럼 달라붙었다.


다섯 번째 그림이 눈앞에 놓였을 때 나는 머리칼이 곤두서고 말았다. 중앙에 매가 한 마리 있다. 매는 나뭇가지에 앉았는데, 뒷발톱이 슬쩍 들려있다. 먹잇감을 발견한 모양이다. 무게중심은 응당 앞으로 기울었고, 눈동자는 뚫어져라 표적을 겨누고 있다. 놈은 지금 몸을 내던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데 혜원의 시선은 어디인가? 매보다 위다.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표적을 내려다보는 매보다 더 높은 곳에 그의 눈이 있다. 개구린지, 들쥐인지 매의 표적은 그리지 않았다. 그건 매나 볼 수 있는 것. 표적과 매와 화가를 잇는 선이 대번 생겨난다. 그것은 직선이다. 황홀할 정도로 빠른 직선이다. 그리고 이파리들을 보았다. 일정한 방향으로 쏠려있는 연두색 선들. 마치 카메라로 움직이는 피사체를 장노출로 찍을 때 생기는 잔상 같은. 그것은 곧장 사진적 표현이었다. 오직 사진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미동도 없는 매와 바람에 가늘게 떠는 이파리, 전혀 다른 속도인 두 사물을 동시에 한 화면에 담으면서 혜원은 아예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전이었던 때, 혜원은 무엇을 어떻게 왜 상상하고 있는 걸까?

혜원, 내가 아는 사람

혜원 신윤복 '수양버들과 개구리매' 1809, 종이에 수묵담채, 28.2 x 44cm

혜원의 그림에 대해 말할 때면 나는 ‘꼬집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그의 그림엔 아름답다, 맑다, 부드럽다가 아니라 본다, 끓는다, 떨어진다 같은 말이 제격이다. 그 중 대표로 뽑은 말이 ‘꼬집다’다. 혜원은 정말이지 그렇게 그린다. 본 것이든, 상상한 것이든, 둘을 합친 것이든, 그는 꼬집는다. 여기저기 아무 데나 꼬집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급소다. 


이미 호되게 꼬집혀 넋이 나간 내가 마지막 그림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소나무가 있었다. 굽이치듯 줄기가 휘었고 가지는 멋대로 뻗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끝났다는 어떤 안도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달이 있었다. 그 달은 잘려 있었다!


잘린 달이라니, 행여 ‘옛 그림’이라는 말로 에두를 수 있는 수많은 회화 중에서 잘린 달을 그린 그림이 있었나? 더구나 조선의 화가가 먹으로 그린 그림에서. 코앞에 놓인 잘린 달. 맙소사, 그건 고안된 ‘프레임’이었다. ‘줌’이었고 ‘크롭’이었다. 어느 보름날 밤 혜원은 소나무 아래서 달을 기다렸다. 이윽고 달이 소나무 가지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자 ‘줌’으로 확 당겼다. 그리고 ‘크롭’으로 싹둑 잘라버렸다. <화조도첩>은 그렇게 끝난다.


그날 동산방화랑을 나와 수표교 쪽으로 걸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인가를 했는데, 그 결을 지금 기억하진 않는다. 다만 사진과 카메라는 그 후 혜원의 그림을 접하는 내 호기심과 시선을 철저히 지배하게 되었다. 사각 프레임, 에너지, 낯설음, 겨누기…. 나는 왜 혜원 신윤복을 좋아하는가, 아니 나는 왜 혜원 신윤복만 따로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에 꼬집듯이 자신에게 (그리고 혜원에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두 사람만의 일.

혜원, 내가 아는 사람

혜원 신윤복 '달과 소나무' 1809, 종이에 수묵담채, 28.2 x 44cm

혜원, 내가 아는 사람

치콘느 유스, 1988, 블라스트 퍼스트 레코드

이제, 치콘느 유스에 대해 말할 차례일까? 나는 동산방화랑에서 본 <달과 소나무>와 치콘느 유스의 앨범을 나란히 놓는다. 그러고는 좋아서 웃는다. 그 앨범을 틀면 기이한 드럼 소리가 난다. 서울에서 그걸 듣는다. 혜원이 살았던 도시다.


글. 장우철('GQ KOREA' 피처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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