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삼이 꿈꾸는 제2의 인생 “좋은 어른,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the STAR]
과거 전자랜드의 프랜차이즈 선수이자 인천 농구를 대표하는 선수였던 정영삼이 지난 2021-2022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 30여년 가까이 해왔던 농구를 멀리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는 쿨하게 농구와의 이별을 선택했다.
은퇴를 선택한 그지만 오히려 이후의 삶은 더 분주하고 바빠졌다. 못했던 남편과 아빠 노릇도 해야했고 틈틈이 농구 꿈나무들을 위한 재능 기부도 이어가고 있었다. 은퇴 후 한동안 미디어에 보이지 않던 영삼이 형을 만나고 왔다.
정영삼을 만난 곳은 인천 청라의 한 카페였다. 그의 집이 있는 부평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곳. 은퇴 전 마지막 한 시즌을 고향인 대구에서 보냈지만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인천을 대표하는 농구선수였다. 이런 그를 인천에서 인터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대부분의 은퇴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밝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은퇴를 한지 대략 3개월 정도 지난 시점. 그는 모처럼 쉬는 시간을 가지며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아닌 가족이 우선인 삶 살고 있죠
“지금은 이런 표현이 이상하긴 하지만 일반인의 생활을 만끽하고 있어요. 선수 생활을 할 때는 어떻게 보면 항상 모든 것과 시간이 제 위주로 맞춰져서 돌아갔던 것 같아요. 제 훈련과 경기가 우리 가족들 중에 최우선된 부분이 있죠. 아내나 가족들이 이해해줘서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고요.”
“그래서 은퇴한 이후부터는 제 위주가 아닌 가족들이 우선이 됐어요. 우선 순위는 아이들이 첫 번째고 아내가 두 번째에요. 요즘 하루 일과가 아내 잔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나고 아침에는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주는 게 주 업무가 됐어요.”(웃음)
그는 선수 시절 자신을 대신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던 아내가 힘들다고 하면 ‘그게 뭐 힘드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직접 해보니 이렇게 세상 힘든 게 없었다고.
중학교 2학년생인 첫째 딸은 집 근처의 학교에 다니는 관계로 현관에서 인사만 나누고 보낸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집에서 거리가 있는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정영삼이 아침마다 운전을 해서 등교를 시켜야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왕복 1시간 정도 되는 거리. 직접 해보니 너무 힘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 전 아들에게 “아들, 내일도 학교 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는 그다.
“제가 직접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하다보니 그동안 아내에게 큰 잘못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둘째가 초등학교 6학년인데 엘리트 농구를 하고 있어요. 전자랜드 유소년클럽에서 농구를 하다가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힘들고 후회할 거라고 만류를 했죠. 그래도 지금까지 씩씩하게 잘 다니고 있어요. 대견하죠.”
“농구 실력이요? 완전 못하죠. 말도 안 되게 못해요.(웃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아직 어리니까요. 저도 중학교 때까지는 잘 못했어요. 잘하면 좋겠지만 못하는 것도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 당장의 실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농구에 대한 흥미와 재미가 안 떨어지게 즐겁게 다녔으면 좋겠어요.”
은퇴한 선수들, 그중에서도 결혼한 선수들이 가장 유념하고 신경써야 할 부분은 바로 집안일이다. 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아내의 비위를 잘 맞추는 데 있어 집안일을 거드는 것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평소 안 하던 청소와 빨래, 설거지에 익숙하고 도사가 돼야 하는 시기가 이때다. 정영삼 역시 이런 법칙(?)을 잘 알고 순리대로 임하고 있었다.
“이게 말을 잘해야 하는데. 아내가 이야기해요. 어쩌다 한두번 하는 것 가지고 나가서 생색내지 말라고. (이후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저 진짜 집안일 많이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아내 입장에서는 은퇴 후에 지금 잠깐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물론 맞는 말이지만, 제 딴에는 저도 많이 하고 있어요. 이 기사를 읽으면 아내가 또 생색내지 말라고 할 텐데, 이것은 제3자인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길게요.”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일 청소기를 돌리면서 청소를 하고 빨래도 매일 한다. 청소기를 이틀에 한 번 돌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 또 설거지는 하루 3번 중에 나름 씻어야 할 그릇이 많은 저녁에 자기가 눈치껏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선수 시절에도 시간을 내 아내와 강화도의 카페에 다녀오는 등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며 잉꼬부부로서의 금슬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은 좀 달라졌다고 한다.
“예전이 좋았던 것 같아요. 선수 때는 가끔 집에 와서 차 마시고 하면 아내가 만족을 느꼈는데 지금은 매일 집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저에 대한 문제점이 하나둘 발견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아침에 아들 등교시켜야 하는데 제가 자꾸 침대나 소파에서 꾸물대다가 늦는 거죠. 아들이 엄마랑 학교에 가면 시간 여유가 있는데 아빠랑 가면 항상 아슬아슬하게 가서 힘들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웃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생각보다 게을러요. 부지런은 한데 뭔가 일을 하면 좀 남겨두고 다른 일을 한다고 할까요? 빨래를 널고 있다가 잠깐 놔두고 갑자기 청소기를 돌려요. 그리고 청소기를 다 돌린 뒤에 빨래 너는 걸 마무리하죠. 이러다보니 아내 눈에는 안 차는 거예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동안 아내가 저를 위해 맞췄으니 이제는 제가 아내에게 맞춰야죠.”(웃음)
정영삼 선수. 이건 아내가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스타일이 조금 문제인 듯합니다. 이 기회에 고쳐보시죠.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전자랜드
정영삼은 프로의 시작을 전자랜드에서 시작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전자랜드에서 보냈다. 전자랜드는 KBL 10개 구단 중 유독 부침이 많은 팀이었다. 시즌 도중 모기업이 운영 포기 의사를 밝혀 KBL로부터 지원금을 받기도 했고 여러 차례 매각 이야기가 나오는 등 경기 외적인 구설수가 많았다.
이런 팀에서 그는 프로선수로서 사실상 모든 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보통 선수가 팀을 떠나는 것과 달리 팀을 먼저 은퇴시킨 것도 그다. 전자랜드 구단이 매각 의사를 밝힌 후 인터뷰에서 “전자랜드라는 팀을 멋지게 은퇴시켜줘야죠”라는 가슴 뭉클한 말을 한 것도 정영삼이다.
“지금에서야 밝히는 것이지만, 다들 알다시피 은퇴를 앞둔 시점에 회사가 바뀌었어요. 그 시기에 엄청 고민을 했죠. 계약기간이 1년밖에 안 남았고 좀더 뛰고 싶은 마음도 사실 없었어요. 나에 대한 확신이 안 섰고 만족스런 몸 상태가 아니라면 은퇴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회사가 바뀌는 과정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걸 아내와 아이들도 싫어했어요. 아내는 계약기간이 1년 남았지만 회사와 좋게 이야기해서 은퇴하라고 하기도 했죠. 새로운 팀(한국가스공사)보다는 그래도 오래 몸담은 전자랜드 소속으로 은퇴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계약기간이 1년 남았고 마침 연고지도 제 고향인 대구로 바뀐다기에 간다고 했어요. 초중고를 대구에서 나왔는데 당시 오리온 농구를 보면서 ‘내가 프로선수가 돼서 대구실내체육관에서 꼭 뛰겠다’는 상상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아내에게도 남은 1년 잘 마무리하고 올라오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가스공사의 유니폼을 1년 입고 정영삼은 은퇴를 결정했다. 매각 의사를 밝힌 전자랜드를 인수해 후배들이 농구선수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가스공사에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는 그지만, 그래도 가스공사보다는 전자랜드가 더 친근하고 푸근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전자랜드가 가고 싶어도 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없어진 팀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말 그대로 친정팀이 없어진 거잖아요. 이게 참 슬프고 애매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가스공사 사무국 분들도 있는 동안 잘 챙겨주셨지만 그래도 전자랜드 시절 분들이 더 각별하고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은퇴를 결정하고 얼마 안 되서 고려용접봉 홍민철 회장님한테 축하 화환을 받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셈인데, 그때 눈물을 좀 많이 흘렸어요. 전자랜드 시절에도 농구단에 애정과 관심을 많이 주신 분인데, 이렇게 뜻밖의 선물을 받을 줄 몰랐거든요. 구단주셨던 홍봉철 회장님께서도 전화로 은퇴 후의 인생을 위해서 어떤 걸 하면 좋을지 이야기해주시더라고요. 이미 떠난 회사인데도 끝까지 챙겨주는 마음에 감사함이 너무 느껴졌어요.”
“영업 부서에 계신 김성헌 국장님과는 얼마 전에 만나서 식사를 했어요. 유신철 버스기사님하고 (서)정희 누나랑 같이 보기도 했고요. (최)정용이 형은 일정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 아직 보지 못했는데 그래도 가끔씩 연락은 주고 받아요. 얼마 전에는 고려용접봉에 인사를 갔는데 홍 회장님이 안 계셔서 최희암 부회장님께만 인사드리고 식사를 같이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한결같이 고마운 분들이에요.”
(이후 김성헌 국장과 최정용 차장은 데이원스포츠 농구단의 사무국장과 차장으로 농구계에 컴백했다. - 기자 주)
최희암 감독과의 만남, 그리고 부상
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 나왔던 건국대 출신의 가드 정영삼을 선발한 것은 당시 전자랜드의 사령탑을 맡고 있던 최희암 감독이었다. 현재 고려용접봉 부회장인 그는 과거 연세대 농구의 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인 동시에 모비스와 전자랜드 등 프로팀 감독으로도 활약했던 지도자다.
그리고 이런 최희암 감독을 만나면서 정영삼의 농구 인생도 전환점을 맞았다. 신체 능력만 믿고 돌파만 하던 선수에서 외곽슛을 장착한 선수가 됐기 때문이다.
“전자랜드에서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것이 기억나는 데 그중에서도 첫 번째를 꼽으라면 역시 최희암 감독님을 만난 거예요. 감독님을 만나면서 제 농구인생이 180도 바뀌었거든요. 사실 그 전까지는 저는 슛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어요. ‘슛을 왜 던져야 하지?’, ‘그게 왜 필요하지?’라는 생각이 컸거든요.”
“사실 슛에 진짜 자신이 없었어요. 누가 봐도 최악이라고 말할 정도였죠. 농구의 길도 몰랐던 때고요. 그냥 무조건 1대1로 부시고 들어가서 한 명 제치고 다른 선수가 오면 또 제치면 되지라는 생각 뿐이었어요. 돌파는 자신 있었거든요. 그게 대학에 오면서 조금 막히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통했기 때문에 그냥 밀고 나갔던 것 같아요.”
하지만 프로에 와서 쟁쟁한 선배들과 같이 비시즌 훈련을 하면서 그는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다양한 공수 전술에 대해 이해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여러 가지를 할 줄 알아야 1분이라도 출전시간을 부여받을 수 있겠다는 절실함이 자기도 모르게 생겼다.
“그때는 드래프트 시기가 지금과 달라서 4~5개월 정도 같이 비시즌 훈련을 한 뒤 데뷔 무대를 갖는 때였어요. 형들과 훈련을 하는데 여기서는 농구의 길도 알아야 하고 슛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최희암 감독님이 슛을 많이 잡아주셨어요. 그리고 농구의 길도 알려주셨죠. 같이 경기 비디오를 보면서 스터디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때 농구의 길에 눈을 뜬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 배워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최희암 감독의 지도 속에 프로에서의 첫 시즌을 마친 그는 국가대표팀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이제부터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던 것 같은 찰나에 그는 어깨 부상을 당했다. 프로 데뷔 두 번째 시즌에 당한 부상. 오른쪽이 아닌 왼쪽 어깨를 다쳤지만 주로 쓰는 오른손 외에도 왼손 레이업을 자주 구사하던 터라 그 타격이 생각보다 컸다.
처음 겪는 큰 부상에 오랜 기간 재활을 거치다보니 기존에 갖고 있던 순발력과 스피드가 떨어졌다. 그나마 이때는 잘 넘겼지만 상무 복무 시절 파워를 늘리려는 마음에 무리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다가 허리 부상을 입었다. 어깨와 허리 부상. 정영삼이 선수 생활을 통틀어 가장 크게 느끼는 두 가지 부상이 바로 이것이다.
“마음 먹은 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다보니 조급해졌어요. 불안한 마음도 생겼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을 고쳐 먹었죠. 여기서 그냥 고개 숙이고 좌절할 것이냐. 원래 하던 게 안되면 뭔가 다른 것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피드가 줄고 쓸 수 있는 힘이 줄어들었을 때 할 수 있는 플레이에 대해 연구하고 뭐가 필요한지를 생각하고 갈고 닦았어요. 어찌보면 이런 생각의 전환이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 같아요.”
“부상을 겪으면서 많은 걸 경험했어요. 처음에는 주전으로 뛰었다가 식스맨으로, 거기서 다시 벤치 멤버까지 밀리는 등 여러 가지를 경험했죠. 이건 지금 돌아봤을 때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아요. 선수로서 여러 상황을 겪다보니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그동안 제가 느껴왔던 농구나 후배들을 대하는 법,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배웠던 것 같아요. A급 선수로만 있다 보면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보게 된 거죠.”
“경기를 뛰는 주전들의 마음, 그리고 식스맨들의 마음, 아예 경기를 못 뛰는 선수들의 마음까지 헤아리게 됐어요. 그러다 D리그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계기도 됐죠. 나름 뜻깊은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했다고 생각해요.”
제2의 삶?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어
정영삼은 초등학교 5학년부터 농구를 시작했다. 12살부터 시작했으니 햇수로만 28년을 해온 셈. 그를 비롯한 1984년생들은 이른바 황금세대라고 불리는 멤버들이다. KGC인삼공사의 양희종과 KT의 김영환, 현대모비스의 함지훈을 비롯해 김태술, 이영현, 임휘종, 이광재 등 대학농구와 프로농구를 주름잡던 선수들이 즐비하다.
“저희 동기들이 정말 다 농구를 잘했어요. 프로까지 온 친구들 외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따지면 훨씬 많았죠. 이런 선수들과 경쟁을 하면서 살아남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어요. ‘야! 정영삼, 너 정말 잘했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다만 동기들 중에 가장 늦게 은퇴하고 싶었는데 그건 이루지 못해서 아쉬워요. 지금 현역으로 (함)지훈이, (양)희종이, (김)영환이 셋이 남았는데 다들 부상없이 잘해서 오래오래 뛰었으면 좋겠어요.”
3개월이라는 휴식기를 가진 그는 슬슬 제2의 삶을 준비 중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정한 것은 없지만 지인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어떤 것을 하면 좋을까 알아보고 있다.
“딱히 뭘 생각한 건 아니지만 뭐 재미삼아 하나 해볼까 생각 중이예요. 송충이가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그래도 농구를 했으니 지도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선수 생활하면서 나중에 은퇴하면 지도자가 되어야 겠다라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고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쭉 선수 생활을 하고 프로 와서도 운이 좋아서 오랜 기간 하다가 은퇴했는데, ‘좋은 지도자의 기준이 뭘까?’라는 생각을 하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다만 저도 제가 이때까지 직접 겪고 보고 배웠던 것 중에 나쁜 것들은 걷어내고 좋은 것들만 농구를 하는 꿈나무들과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가르쳐주고 심어주고 싶어요. 좋은 어른,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은 게 꿈입니다.
“선수 생활하면서 다행인 게 팬분들에게 그렇게 많이 욕은 안 먹었던 것 같아요. 사랑도 많이 받고 명예도 얻었고 돈도 벌만큼 벌었죠. 이제부터 살아갈 제2의 인생은 적당히 욕도 좀 먹고 살아야 할 것 같아요. 또 조금은 힘들게 살면서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 농구를 배우는 학생이나 아이들한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요.”
사진 = 강정호 기자, KBL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