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중의 전설’ 빌 러셀, 그의 위대했던 농구 인생
지난 8월 1일(이하 한국시간). NBA를 대표하는 최고의 전설 중 한 명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무려 11번의 우승을 차지하면 NBA 역대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빌 러셀이 88세의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 러셀은 자신의 아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으며, 그의 사망 소식은 가족들의 발표를 통해서 알려졌다.
러셀은 리그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센터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다. 또한 코트 밖에서는 흑인 선수들을 향한 차별에 정면으로 맞섰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농구 인생을 돌아보자.
보스턴에 오기까지
11차례의 우승(역대 최다)과 12번의 올스타 선정. 여기에 5번의 MVP와 명예의 전당 헌액까지. 빌 러셀은 당대 리그를 주름잡은 최고의 슈퍼스타였으며 여전히 역대 최고의 선수를 논할 때 이름이 항상 거론되는 선수다.
빌 러셀은 이러한 전설적인 커리어를 모두 보스턴에서 이뤄냈다. 1956-57시즌 데뷔 후 1968-69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러셀은 자신의 NBA 선수 커리어를 모두 보스턴에 바쳤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애초에 드래프트에서 러셀을 지명한 것은 보스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러셀은 1956년 드래프트에 참가했는데, 당시 그를 지명한 구단은 보스턴이 아닌 1라운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세인트루이스 호크스(현 애틀랜타 호크스)였다. 그리고 그를 지명한 세인트루이스는 곧바로 러셀을 보스턴으로 트레이드한다. 여기에는 재밌는 일화가 숨어 있다.
NBA 입성 전 러셀은 이미 대학무대를 평정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상태였다.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러셀은 팀을 55연승으로 이끌며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대학 무대에서 3시즌을 활약하며 러셀은 평균 20.7점 20.3리바운드라는 초인적인 기록을 냈다.
그러나 NBA 구단들은 드래프트에서 러셀을 지명하기를 주저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러셀이 흑인이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은 인종차별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이는 NBA 무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공식적인 규정에는 없었지만 구단들은 암묵적으로 팀 내에 흑인 선수는 2명까지만 보유하자는 룰을 지키고 있었다. 1명이 아닌 2명인 이유는 흑인 선수와 백인 선수가 룸메이트가 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즉, 당시 NBA는 인종차별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은 리그였으며 흑인 선수들에게 주어진 자리가 많지 않았던 리그다.
거기다 당시만 하더라도 각 팀들의 스카우팅 시스템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던 시기다. 여기에 TV 중계 역시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러셀의 플레이를 실제로 본 구단들이 거의 없었다. 또한 러셀이 올림픽 대표에 뽑혀 팀에 곧바로 합류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도 구단들이 그의 지명을 꺼리는 이유가 됐다. 이런저런 이유로 구단들은 러셀의 지명을 망설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당시 보스턴의 감독을 맡고 있던 레드 아워백은 러셀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봤다. 당시 보스턴은 뛰어난 공격력에 비해 수비력에 고민을 안고 있었는데 러셀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줄 적임자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보스턴은 신인드래프트 지명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던 상태였다. 당시 보스턴은 지역 연고 드래프트라는 제도를 활용해 탐 하인슨을 이미 지명한 상태였다. 따라서 보스턴이 보유한 1라운드 지명권은 없었던 상황. 아무리 러셀의 재능을 알아봤다고 하더라도 지명권이 없는 상황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고민을 하던 아워백은 묘안을 만들어냈다. 당시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은 로체스터 로열스(현 새크라멘토 킹스)가 가지고 있었고, 2순위는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차지였다.
로체스터는 앞서 언급한 여러 이유로 인해 러셀 지명을 포기했다. 남은 것은 세인트루이스. 아웨백은 곧바로 세인트루이스와 트레이드 협상 테이블을 차렸다.
보스턴의 제안은 에드 맥컬리와의 트레이드였다. 당시 맥컬리는 올스타에 연이어 선정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선수였다. 거기다 세인트루이스가 고향인 맥컬리였기 때문에, 세인트루이스 입장에서도 충분히 구미가 당길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는 맥컬리로 만족하지 않았다. 당시 구단주였던 벤 커너는 맥컬리와 더불어 클리프 헤이건까지 달라고 요구했다. 고심 끝에 보스턴은 이를 받아들였고, 그렇게 두 팀의 트레이드는 성사됐다.
세인트루이스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었던 트레이드다.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미국 내에서도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지역 중 하나다. 이런 가운데 러셀을 팀에 합류시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보스턴이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해왔기에 세인트루이스도 이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러셀 입장에서도 인종차별이 더욱 극심했던 세인트루이스가 아닌 보스턴에 합류하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한 세인트루이스에 합류한 두 선수의 레벨이 결코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맥컬리는 1950-51시즌부터 1956-57시즌까지 7년 연속 올스타에 뽑힌 선수였고, 헤이건 역시 1957-58시즌부터 1961-62시즌까지 5년 연속 올스타 무대를 밟았다. 세인트루이스는 이들과 함께 1957-58시즌 우승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로체스터는 시휴고 그린을 지명했다. 이어 세인트루이스가 러셀을 지명한 후 약속한 대로 보스턴과의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보스턴의 위대한 전설은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그 첫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전설을 쓰다
그렇게 보스턴 가든(당시 보스턴의 홈구장 이름)을 밟을 수 있게 된 러셀. 그러나 러셀의 보스턴 데뷔는 다소 늦춰져야 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러셀이 멜버른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참여하면서 팀 합류가 늦어졌기 때문. 당시에는 올림픽에 프로 선수가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러셀은 보스턴과의 정식 계약 역시 올림픽 이후로 미뤄야 했다.
러셀의 데뷔는 크리스마스를 눈앞에 둔 1956년 12월 23일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러셀의 데뷔전 상대는 공교롭게도 자신을 트레이드 한 세인트루이스. 이날 경기에서 보스턴은 95-93의 승리를 따냈지만, 러셀은 6점 16리바운드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적응기를 거친 러셀은 점차 매서운 기량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보스턴은 44승 28패라는 호성적을 거두며 동부 선두에 올랐다. 이어 보스턴은 시라큐스 내셔널스를 꺾고 파이널 무대에 올랐고, 결승에서는 또 한 번 세인트루이스와 맞붙었다.
러셀의 첫 파이널은 치열했다. 보스턴은 세인트루이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승부를 펼쳤다. 7경기 중 2점차 이내 접전 승부가 4차례나 나왔을 정도로 두 팀의 격차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그러나 러셀이 맹활약한 보스턴은 7차전을 125-123으로 잡아내며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그렇게 러셀은 데뷔 시즌부터 팀을 정상에 올려놓으며 전설의 탄생을 예고했다. 당시 정규시즌에서 러셀은 평균 14.7점 19.6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플레이오프 무대에서도 13.9점 24.4리바운드의 괴물 같은 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우승에 큰 힘을 보탰다.
이후 러셀의 커리어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2년차 시즌이던 1957-58시즌 첫 올스타에 선정된 러셀은 은퇴할 때까지 12시즌 동안 한 차례도 올스타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다. 또한 우승 트로피는 밥 먹듯이 들어올렸다.
13시즌을 NBA 무대에서 보내는 동안 러셀은 무려 11개의 반지를 손에 넣었다. 1957-58시즌과 1966-67시즌을 제외하면 모든 시즌에 팀을 우승시켰다는 의미다. 1958-59시즌부터 1965-66시즌까지는 무려 8시즌 연속 우승이라는 역대 최초의 업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여기에 러셀은 감독으로서도 보스턴을 이끌었다. 선수 생활 말년이던 1966-67시즌부터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흑인’인 러셀이 감독이 된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된 러셀은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며 2차례 우승을 더 거머쥔다.
마지막 시즌이던 1968-69시즌에도 평균 출전 시간이 무려 42.7분에 달했을 정도로 러셀의 코트 지배력은 엄청났다. 그렇게 보스턴의 위대한 전설이 된 러셀은 통산 963경기에 출전해 평균 15.1점 22.5리바운드의 엄청난 기록을 남긴 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 빌 러셀의 위대한 업적 *
- 우승 11회, 올스타 12회, 리바운드왕 4회, MVP 5회, ALL-NBA 팀 11회 선정
- 정규리그(963경기) : 15.1점 22.5리바운드 4.3어시스트
- 플레이오프(165경기) : 16.2점 24.9리바운드 4.7어시스트
평균 득점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러셀은 공격력이 뛰어난 선수로 분류하기는 힘들었다.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56.1%에 불과할 정도로 슈팅에도 능한 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가치는 수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러셀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수비력으로 리그를 지배했다.
러셀의 신장은 208cm로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평범한 센터 축에 속했다. 그러나 러셀은 무려 224cm에 달하는 초인적인 윙스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육상 선수 출신이었던 그는 신장 대비 말도 안 되게 빠른 스피드와 더불어 엄청난 점프력까지 보유하고 있던 선수였다.
이를 활용한 러셀의 최대 강점은 바로 블록슛이었다. 상대팀들은 공격을 할 때면 어김없이 자신들의 슛을 쳐내는 러셀의 수비에 크게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러셀이 활약하던 당시에는 NBA가 블록과 스틸 수치를 공식적으로 집계하지 않던 시기라 러셀의 블록슛이 수치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NBA는 러셀의 은퇴 이후인 1973-74시즌부터 블록슛을 공식적으로 집계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블록슛과 관련된 각종 기록에는 러셀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전설 중의 전설, 가족들 품에서 잠들다
코트 위에서의 러셀이 지배자의 모습이었다면, 코트 밖에서의 러셀은 위대한 인권운동가였다. 러셀은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언제나 인종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호텔, 식당 등에서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쫓겨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또한 러셀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자신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자신의 우승 트로피와 벽 등을 때려 부수는 끔찍한 사건을 겪기도 했다.
러셀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을 향한 인종차별에 항변하며 메시지를 전달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1년 세인트루이스와의 시범경기를 앞두고 벌어진 보이콧 사건이다.
당시 러셀은 흑인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의 식당을 방문했다. 그러나 식당 측은 이들이 흑인이기 때문에 식사를 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 이에 분개한 러셀은 아워백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가겠다고 통보했다.
당시 다른 업무로 인해 선수단과 동행하지 못했던 아워백 감독은 곧바로 식당 사장과 통화해 식사를 약속받았지만, 이번에도 오픈된 자리 대신 사장의 개인 방으로 장소가 정해졌다. 결국 러셀은 동료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러셀은 훗날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에게 흑인들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러셀은 흑인 선수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섰다. 그 결과 NBA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은 점차 사라져갔다. 만약 러셀의 이러한 행동이 없었다면 마이클 조던, 르브론 제임스와 같은 슈퍼스타들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러셀은 지난 8월 1일 눈을 감았다. 러셀의 가족들이 그가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SNS를 통해 전했다. 러셀은 자신의 아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은 것으로 알려졌다.
러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아담 실버 총재는 성명문을 발표하며 그를 애도했다. 다음은 실버 총재의 성명문 전문.
“빌 러셀은 모든 팀 스포츠를 통틀어 최고의 승리자였다. 11차례의 챔피언십과 5차례의 MVP 수상 등 보스턴 소속으로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러셀이 우리 리그와 지역사회에 남긴 엄청난 임팩트의 시작점에 불과했다. 러셀은 스포츠보다 더 위대한 것들을 위해서도 싸워왔다. 평등과 존중 등의 DNA를 리그에 심었다. 커리어 동안 그는 시민들의 권리와 사회 정의를 위해 싸워왔다. 그리고 이는 러셀이 밟아온 전철을 따르는 NBA 선수들에게 훌륭한 유산이 됐다. 수없이 많은 조롱과 위협들 속에서 러셀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었고, 모든 사람이 존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러셀이 첫 흑인 감독으로 눈부신 경력을 마친 후 거의 35년 동안, 우리는 그가 파이널 MVP에게 빌 러셀 트로피를 수상했던 파이널을 포함한 모든 주요 NBA 이벤트에서 러셀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난 그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겼고, 러셀이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을 때 감격했다. 나는 종종 그를 농구의 베이비 루스라고 부르곤 했다. 러셀은 궁극적인 승리자이자 완벽한 동료였고, NBA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영원히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그의 아내와 가족, 러셀의 많은 친구들에게도 깊은 애도를 표한다.”
또한 리그는 빌 러셀이 현역 시절 달았던 6번의 등번호를 30개 구단 모두에서 영구결번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NBA 역사상 최초의 일.
이번 결정에 따라 이미 6번을 쓰고 있던 선수들을 제외하면 새롭게 6번을 달고 뛸 수 있는 선수들은 없게 됐다. 이번 결정을 통해 다음 시즌 모든 선수들은 오른쪽 어깨에 러셀의 등번호 6이 새겨진 패치를 달고 뛰게 된다. 또한 모든 경기장의 코트에는 클로버 모양의 6번 로고가 달릴 예정이다.
* 등번호 6번의 현역 선수들(지난 시즌 기준) *
르브론 제임스(레이커스),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워싱턴), 하미두 디알로(디트로이트), 멜빈 프레지어(오클라호마시티), 루 윌리엄스(애틀랜타), 니켈 알렉산더-워커(유타), 캐년 마틴 주니어(휴스턴), 브린 포브스(덴버), 알렉스 카루소(시카고), 제일런 맥다니엘스(샬럿)
NBA가 현재와 같은 위상과 저변을 만들어내는데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냈던 러셀이기에 행해질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렇게 러셀은 영원한 전설이 되어 우리의 곁에 남아 있을 예정이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