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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로드프레스

한강도 바라보고 숲길도 걷고-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그들의 세계路]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⑤

“원래 이 코스의 이름이 <서울 내부트레킹>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으로 강제 개명을 시켰어요.”


“왜요?”


“이름을 서울내부트레킹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감을 못 잡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감을 잡나요?”


“그건 모르겠는데 최소한 예전보다 장사는 좀 되네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와요.”

남산성곽길은 봄이면 더욱 아름답다

트레킹 코스도 이름을 잘 지어야한다. 해당 명칭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 수 있는 무언가를 전달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은 예전 명칭인 <서울 내부트레킹>보다는 훨씬 더 낫다. 적어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었으니까.


그렇다고 서울 내부트레킹이라는 이름이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본 코스는 ‘서울숲 – 남산’을 연결하여 걷기 때문이다. 서울의 내부를 가로질러 가기 때문에 예전에 저런 네이밍을 했던 것이다. 한편 서울의 내부를 가로질러 간다는 설명에 참가자들 일부는 이런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서울 내부에서 트레킹을 할 수 있는 데가 있긴 있어요?”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지하철 5,6호선 청구역이다. 청구역에서 첫걸음을 뗀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 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작은 산이다.

매봉산 팔각정

사냥감을 노리는 ‘매’서운 눈빛이 사라진 매봉산이지만 그곳에 올라서면 눈이 크게 떠지게 된다. 시원스럽게 한강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강을 가깝게 전망할 수 있는 곳은 매봉산 팔각정이다. 이 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흐르고 있는 한강의 동쪽편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한강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한강은 예전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아리수’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역적으로 다른 이름을 가지기도 했는데 경기도 여주 지역은 ‘여강’이라고 불렸고, 임진강과 합수되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이라고 불렸다.


매봉산 팔각정 앞에 있는 동호대교는 ‘동호’라는 옛날 그 지역의 명칭을 따서 지었다. 동호는 서울의 동쪽 지역 한강을 일컫는 말이다. 한강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게 보인다고 하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매봉산 팔각정에서본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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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정에 올라서면 강남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한강의 역동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부근까지 조망할 수도 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춰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동행한 사람들과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해볼 수도 있다. 필자도 동행한 트레킹팀과 함께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했다. 결과는? 비밀!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이다.

봄꽃이 화사한 버티고개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전 한 밤 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다. 안전한 생태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된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간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 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다.

장충단공원의 가을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년 9월경이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년)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다.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것이다.


장충단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된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된다. 마치 ‘종묘사직’ 할 때의 ‘사직단’이,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다.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년)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 그냥 폭사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다.

정치집회 장소로 쓰였던 장충단공원

광복 이후 장충단 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다. 1971년 4월 18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해 4월 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와중에 행해진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에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다.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었다. 장충단 공원에 모인 100만 가까운 인파들 앞에서 저런 ‘센세이셔널’한 내용들이 확성기를 타고 퍼져나갔으니 당시 집권세력은 얼마나 긴장을 했겠는가?

청계천 복원의 핵심, 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년(1441)의 일이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이다.

수표교의 고색창연한 모습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다.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다.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영조 36년(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이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이 된 지금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다.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

한강도 보고, 버티고개도 넘고, 장충단도 탐방하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그렇게 서울 내부를 가로질러 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들을 탐방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울창한 숲길에 매료되게 된다. 오죽했으면 어떤 분이 내게 이런 말을 했을까!


“여기 서울 같지가 않아요. 서울 내부에 이런 곳이 있었어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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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코스: 금호산 ▶ 매봉산팔각정 ▶ 버티고개 ▶ 한양도성 ▶ 장충단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5,6호선 청구역
  6. Out: 장충단공원(지하철3호선 동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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