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연평균 2,069시간 근로,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
회사 생활을 하면서 종종 드는 의문은, 주판으로 계산하고 삐삐로 연락하던 까마득한 과거 시절의 회사원들이 도대체 어떻게 일을 했을까다. 그리고 그 직후에 드는 의문은 ‘엑셀, 전자결제 시스템 등 기술의 진화에도 왜 원시시대의 회사원보다 내가 더 일을 많이 하는 걸까’ 하는 점이다.
기술은 발전했는데 여가는 왜 그대로…? |
바야흐로 서기 2018년. 기나긴 노동의 역사 끝에 한반도는 주 52시간 근무 시대에 접어들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24*7-52=116이므로 최소 일주일에 116시간은 내 것, 평일 기준 최소 13.6시간은 자유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부푼 마음으로 일과를 마치고 나니 나에게 남은 건 어째 쥐똥만큼의 시간뿐이다. 나의 116시간은 누가 다 훔쳐 간 것일까? 지금부터 개미핥기처럼 내 시간을 빨아먹는 세 가지 직장인 유형을 알아보도록 하자.
1. 퇴근 후 카톡으로 업무 지시하는 이 과장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맞이한 금요일. 가시밭길 같은 일과를 뚫고 나와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주린 배와 노곤한 몸이 고단하지만 곧 치맥 파티가 있기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지하철 등받이에 기대 맥주의 시원함과 ‘반반 무 많이 치킨’의 바삭함을 미리 음미한다.
그런데 아, 침이 고이는 순간 카톡 알람이 울린다. 싸늘하다. 심장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손이 벌벌 떨리고 발가락이 오므라든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금요일인데… 하얗게 질린 채 폭탄해체반처럼 휴대폰을 열어 보니…
이 과장: “간단한 거니까 이것도 마저 처리해줘~^^” |
약 올리는 건지 격려하는 건지 애매모호한 이모티콘과 함께 ‘간단한’ 업무 파일 수십 개가 랜섬웨어인 양 카톡방을 점령했다. 울분이 치솟는다. 막힌 혈이 터지듯 입에서 욕이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간단한 거면 퇴근 전에 얘기하든가 스스로 간단히 해결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진짜 간단한 건 이 시간에 카톡 보내는 과장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거고요.
전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답장을 보냈다. “네넵!” 결국 이번 주말도 치킨 없는 노예의 삶이다. 다만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던 인간의 면상을 꼭 한번 보고 싶을 뿐이다.
ⓒ조선일보 |
차라리 카톡이 없었다면 행복했을까? 책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에 따르면 퇴근 후 SNS 업무 지시를 받은 경험은 한국이 어느 국가보다 높다. 눈부시게 발전한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는커녕 퇴근 이후의 시간마저 노동시간으로 오염시킨 탓이다. 이제 노동자는 작업장을 벗어나도 업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덕분에 우리는 맛이 간 갤리선 노예처럼 물에서도 육지에서도 밤낮없이 노를 젓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발견한 의외의 사실은 퇴근 후에 SNS로 지시를 받아 업무를 처리했음에도 그 업무를 ‘업무’로 보지 않는 인식이 퍼져 있다는 것이다. […] “간단한 거니까 좀 처리해줘.”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냐?”라는 말과 함께 업무를 건네받으면 욕이 나올 만큼 스트레스를 받아도 거부권을 행사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 131쪽
2. 아무리 퇴사해도 신입 안 뽑아 주는 박 부장
해맑고 순박하던 최 사원은 주말 내내 이어진 카톡 업무 지시를 견디지 못했다. 나날이 수척해지던 그는 어느 날 미라의 형상으로 나타나 짐을 싸고는 홀연히 떠났다. 참고로 그와 나는 같은 업무를 분담하던 각별한 사이였다. 이 말은 그의 퇴사 후 터진 물 들어오듯 내 업무량이 두 배로 증가했다는 의미다.
덕분에 며칠째 과로에 시달리던 나는 오아시스를 찾듯 하염없이 새 인력을 기다렸다. 그러나 열 밤만 자면 올 줄 알았던 신입직원은 오다 도망을 간 건지 애초에 올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도통 소식이 없었다. 참다 못해 회식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인력 보충 계획을 물었다.
하하, 부장님 죄송한데 신입은 도대체 언제 들어오는 겁니까?
그런데…
박 부장: “인원 보충은 무슨 인원 보충? 혼자 충분히 커버할 수 있잖아?” |
라는 대답과 함께 인원 대신 소맥을 보충해주는 부장님. 순간 부장님의 턱에 나의 주먹을 보충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간 사람 커버하는 건 그쪽이 아니라 전데 왜 부장님이 파이팅 넘치시는지?
ㅂㄷㅂㄷ |
결국 이번에도 보충되는 건 인원이 아니라 잔뜩 밀린 서류뿐이다. 기업은 최소비용 최대이윤을 추구한다. 한 명을 쥐어짜 두 사람 몫을 해낼 수 있다면, 굳이 고용하지 않는다. 더욱이 포괄임금제가 홍역처럼 만연한 이 나라에서 일을 더 한다고 그만큼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다.
참고로 한국인들의 휴가 일수는 8일이다. 여행사 익스피디아가 조사를 시작한 이래 6년 연속 꼴찌를 차지했다. 이에 비해 전 세계 평균 휴가 일수는 20일.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빡빡한 업무 일정과 대체 인력 부족 때문이다.
현실에서 추가 고용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세 명이 해야 할 일을 두 명이 짊어지거나 한 명이 떠안는 기형적인 구조가 계속되고 있다. 기업은 언제나 비용 부담을 이유로 최소 인력을 빡빡하게 배치한다. 그래서 한 명이라도 빠지는 경우 나머지는 ‘죽어나게’ 된다. 이것이 반복적인 야근과 특근으로 채워진 살인적 장시간 노동의 핵심 이유다. - 139쪽
3. 가장 먼저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김 대리
사랑하는 동기 김 대리는 오늘도 가장 먼저 출근해 제일 늦게 퇴근한다. 물론 나 역시 정시보다 30분 먼저 출근해 규칙적으로 야근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새벽같이 출발해 사원증을 찍어도 붙박이 가구처럼 책상 앞에 붙어있는 김 대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대다수 동료는 그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나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사실 나는 그가 일하다 죽은 지박령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도 뭐 여기까진 괜찮다. 좀 오싹하긴 하지만 스스로 일에 미쳤다는데 별 수 있나.
하지만 괜찮지 않은 순간이 온다. 존경하는 상사님들이 그를 칭송하며 나의 칼퇴와 연차 소모에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차는 순간이다.
“요즘 것들 빠져가지고… 김 대리 봐. 얼마나 성실해? 이래야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오르는 거야!” |
“퇴근 안 하면 되잖아요…” |
2016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평소 야근 비율은 81.3%, 야근은 하루 평균 3.7시간, 주당 평균 3.6회다. 이런 상황에서 ‘근면한’ 김 대리와 ‘철없는’ 나는 비교당할 수밖에 없다. 퇴근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후 껐던 컴퓨터를 다시 켤 수밖에… 연차를 쓰고 칼퇴를 하면 개념 없는 직원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평가를 잘 받으려면 결국 내 엉덩이는 의자와 더 친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법이 어떻게 바뀌든, 스스로 야근을 해야만 하는 구조다.
근면 신화가 집약된 《개미와 베짱이》 《소가 된 게으름뱅이》《토끼와 거북이》 등의 이야기들은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의 성공 스토리로 각색된다. […] 근면 신화가 재현하는 이상적 노동자상은 근면에 대한 강박을 만들고 헌신을 유도한다. 감내 메커니즘을 통해 착취를 은폐하는 문화 이데올로기다. 근면 신화의 선악 이분법은 여유를 게으름과 나태, 이기심, 부패, 낭비, 비윤리적 소모로 연결 짓는다. 그리고 다시 저발전, 저성과를 실패, 무질서, 위기의 원인으로 잇는다. - 148~149쪽
지금까지 우리 시간을 잡아먹는 직장인에 대해 알아보았다
전국의 수많은 이 과장, 박 부장, 김 대리들 덕분에 늘어난 한국인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무려 2,069시간. OECD 평균에 비해 306시간이나 길다. 쉽게 말해 1년에 한 달을 더 일하는 셈이다. 또한 주당 60시간 이상 일하는 장시간 노동자 비율은 22.6%. 41개국 가운데 2위에 달하는 수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래도 우리는 평균이에요!” “그래도 이게 어디야, 옛날에는 말이야~”라고 되뇌며 오늘도 소처럼 밭을 간다. 장시간 노동의 근본적 원인은 경쟁과 승진 같은 보상 체계, 사내 문화와 분위기를 통해 스스로 일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시스템에 있다. 장시간 노동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거나 승진의 발판이라며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 52시간 근무제가 의미 없는 이유다.
제도나 인식 개선만으로 바뀌지 않는 장시간 노동 구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김 부장들은 계속 죽어 나갈 수밖에 없을까? 오늘도 야근이지만 내년의 오늘은 분명 달라야 한다는 다짐이 있다면, 장시간 노동 탈출의 해법이 궁금하다면, 지금 『과로 사회』 저자의 신작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를 펼쳐 볼 때다.
‘장시간 노동’이라는 리듬은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자연스러운 질서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장시간 노동 사회에서 우리는 시간 빈곤에 허덕이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장시간 노동이라는 악취에 무뎌질 대로 무뎌져 얼마나 고약한 냄새인지 알지 못하는 저인지 상태에 놓여 있다. - 39쪽
필자 조태홍
전 '직썰' 에디터. 비 오는 날과 밤 산책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