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재미있다

어릴 때 나는 책을 참 많이도 읽는 아이였다

여기서 어릴 때라고 하면 초등학교–고등학교 시절을 통칭한다. 일단 책이라고 하면 뭐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고, 그럴수록 책 읽는 속도도 빨라져서 하루에 한 권씩 뚝딱뚝딱 읽는 일도 다반사였다. 일찍 자라고 엄마가 책을 못 읽게 하는 밤이면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작은 손전등을 켜고선 읽었다. 그 버릇이 남아 고등학생 때는 자습 시간 내내 문제집 아래 소설책을 숨겨놓고 몰래 읽기도 했다.

소설책이 주를 이루기는 했지만 딱히 장르를 가리지도 않아 가끔은 뜬금없이 위인전이나 자기 계발서도 읽었고, 들고만 있어도 똑똑해 보이는 비문학 서적을 부러 집어 들기도 했다. 굳이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책에 한정되지도 않아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뭐 내용이나 이해했을까 싶은 책도 (아마 멋 부리려고) 많이 읽었다.

어쩌다가 책을 그렇게 좋아하게 됐는지 그 시작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어릴 적부터 자기 전이면 동생과 나를 양쪽 옆구리에 끼고 누워 이런저런 동화책을 읽어주셨던 엄마 덕분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 어른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칭찬하시니 유난히 인정 욕구가 높은 편이던 어린 나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다. 습관을 잘 들여야 한다며 거실에서 TV를 아예 치우고 대신 그 자리에 책장을 짜 넣으셨던 부모님 덕에 정말 습관이 들어버린 건지도.

아마 그 모든 것이 조금씩 영향을 미쳤겠지만, 다 떠나서 나는 정말 책 자체를 좋아했던 것도 같다. 오롯이 책만 놓고 보면, 어린 내게는 책이 바깥세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망원경과도 같았다.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고,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밖으로 나서는 것보다 안락한 침대에 앉아 책을 통해 세상을 아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최근에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 시절 책은 내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방종의 세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을 사는 일에 있어서 부모님은 내게 무한한 자유를 주셨다. 부모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은 ‘책 사는 데 돈 아끼지 마라’는 거였고, 실제로 책을 사겠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만 원짜리 몇 장을 턱턱 꺼내 주셨다.

책을 많이 산다거나 쓸데없는 책을 산다는 이유로 한 번도 눈치를 주시지 않았고 나도 책을 살 때만큼은 굳이 허락을 구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래 봐야 책 몇 권 사는 게 큰돈은 아니었겠지만 10살 남짓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골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환상적이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 달콤한 자유를 즐기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자주 광화문의 교보문고를 들락거렸다. ‘나 서점 갔다 올게’ 하고선 엄마가 준 1만 원짜리 몇 장을 딸기가 그려진 지갑에 탁 넣고 길을 나설 때면 이미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포부도 당당하게 교보문고로 들어서서 그 안에 있는 책이 다 내 것이라도 되는 양 흐뭇하게 돌아다니곤 했다.

나름 전문적인 척을 하며 꼼꼼히 표지도 보고 앞면 뒷면 찬찬히 읽어보고 휘리릭 책장도 넘겨가며 어른들 틈에 껴서 신중히 오늘 살 책을 고르는 멋진 시간. 나만 한 애들이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겨우 참고서 같은 걸 사는 걸 보면 괜히 어깨가 으쓱으쓱했다. 너는 아직 엄마랑 같이 서점에 오는구나, 나는 이제 다 커서 내가 사고 싶은 책은 맘대로 살 수 있는데. 뒤늦게 깨달았지만 아마 그것이, 내가 끊임없이 책을 사고 읽던 가장 근원적인 달콤함이었지 싶다.

성인이 되고 독서량은 아주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못해도 일주일에 서너 권을 읽던 것을 대학 때는 일주일에 한 권을 읽을까 말까, 취직하고 나서는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마치 평생 읽는 책의 총량이 정해져 있고 나는 이미 대부분을 어릴 때 채워버려서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글쎄 물리적으로 여유시간이 줄어든 것이 하나의 변명이 되어주기는 할 테다.

하교만 하면 완전히 자유였던 시절과는 달리 나의 사회생활은 점점 비중이 커졌고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늘었다. 그러나 그 바쁜 고3 수험시절, 남들 다 한 문제라도 더 풀기 위해 시간을 쪼갤 때 몰래 숨어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같은 뜬금없는 책을 넘겨보던 주제에… 시간이 없다고만 변명하기는 조금 면구하다. 언제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책을 읽었던가. 없는 시간을 쪼개고 부러 구석으로 숨어들어선 기를 쓰고 한 장이라도 더 읽으려던 애가 아니었나.

조금 더 이유를 들여다보면 아마 세상을 접하는 경로가 너무 많아져서가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스스로에게 선물할 수 있는 유일한 자극은 책 읽기밖에 없었는데, 대학 신입생이 되니 선배들이 늘 떠들던 ‘새로운 세상’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잔뜩 만났고 새로운 관계와 룰에 적응했으며 새로운 놀이와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딱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이폰이라는 신문물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두둥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건 기존의 핸드폰으로 할 수 있던 것보다 백 배는 무궁무진했다. 가끔 시간이 남아도 나는 책 대신 아이폰을 집어 들었다. 영상매체의 종류도 많아지고 접근성도 높아져서 각종 예능이며 드라마며, 굳이 책을 통하지 않고도 더 넓은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변화다. 어쩌면 그냥 자연스러운 변화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책 읽는 일이 그렇게나 많이 줄었음에도 책 사는 습관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예전에는 책을 사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이 거의 동일한(적어도 연속하는) 행동이었지만 요즘에는 아니다. 장난처럼 내 취미는 책 읽기가 아니라 책 사기라고 얘기하고 다닐 정도로 그 격차가 점점 벌어진다.

다섯 권을 사서 아직 한 권밖에 안 읽어놓고 또 다섯 권을 주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다섯 권인 이유는 보통 알라딘 굿즈 때문…) 재작년쯤 장만한 이북리더기 덕에 이북은 이북대로 주문하고 종이책은 종이책대로 주문해서 오히려 두 배로 책을 사는 꼴이 되기도 했고.

어린 시절의 달콤한 자유, 그 기억이 그대로 각인이 되었는지 책 쇼핑은 여전히 내게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다. 물론 일정한 수입이 생긴 뒤로 나는 모든 종류의 쇼핑을 즐겨오긴 했지만, 내가 지금 너무 많이 사는 것 아닌가, 굳이 필요 없는 걸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양심의 가책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단 하나, 책뿐이다.

여전히 서점에 가면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이것저것 들었다 내려놨다 한참을 고민해가며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긴다. 나이가 든 만큼 취향은 조금 더 확고해져서 나름 좋아하는 작가도 생기고 싫어하는 장르도 생기고 했지만 그 새로운 바운더리 안에도 여전히 너무 많은 책이 나를 기다린다. 읽고 싶은 책은 아직 너무 많은데 이제 나의 읽는 속도는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책은 읽는 것보다 사는 게 훨씬 재미있다

아직 안 읽은 책이 쌓였으면 책 쇼핑을 조금 미뤄도 될 텐데 기어코 사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 한 권 두 권 손에 들고 만다. 정 안 되겠으면 왠지 이 책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을 찾아내 뜬금없이 책 선물을 하기도 한다. 책이 그렇게 좋은 선물이 아니라는 조언들은 깡그리 무시하고서. 한 예능 프로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하신 말씀은 이런 내게 엄청난 안도를 선사하기도 했다.

출처: tvN

맞아요 작가님, 책은 원래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죠? 아직 안 읽은 책이 잔뜩 있는데도 또 읽고 싶은 책을 사는 게 저만의 나쁜 버릇은 아닌 거죠? 이 말이 맞는 말이든 틀린 말이든 요즘의 나는 이 문장을 거의 격언처럼 받들고 살며 시시때때로 중얼거린다. 그러지 않으면 내 유일한 자유의 세계에 ‘그래도 이건 좀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니냐’는 양심이 쿡쿡 침범해 들어올 것 같으니까.

넷플릭스에 빠져 사는 동안에도 책을 사는 건 까먹지 않아서, 또다시 내 방에는 책이 쌓였다. 당장 읽을 것처럼 신나게 사서는 막상 아직 한 장도 넘기지 못한 책이 잔뜩. 그래도 나름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책상 위에 간이 책꽂이를 하나 만들어놓고, 새로 사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은 그 위에 둔다. 다 읽어야만 정식 책장으로 넘어가는 시스템이랄까. 간이 책꽂이에는 몇 권밖에 꽂을 수 없으니 적어도 한 권을 다 읽고 옮겨야만 한 권을 새로 사자는 결심도 했건만, 이미 결심을 어긴 지 오래라 책상 위며 침대 옆에도 책이 수 권씩 쌓여간다.

이 와중에도 그저 빨리 다 읽고 또 책 사러 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다니. 어릴 때는 내 방을 빙 둘러 이중 책장(주로 만화방에 있는 슬라이드 책장)을 놓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확실히 그때부터 나는 책을 읽는 것보다 소유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중 책장의 꿈은 버렸지만 책 욕심은 버리지 못해 여전히 내 방은 책으로 매번 뒤덮이는 중이고.

읽지는 않고 켜켜이 책을 사두기만 한다는 고백이 영 민망하지만- 이것은 내게 마치 태곳적부터 내려온 본능에 가깝다. 아주 어릴 때 처음으로 접한 방종의 세계인만큼 뼛속 깊이 그 쾌락의 단맛이 새겨졌달까. 그러니 감히 말하건대 나는 아마 앞으로도 책을 꽤 많이 사들일 것 같다. 책을 사서 손에 드는 순간 이미 반쯤은 그 책을 다 읽은 것 같은 충족감이 몰려오는데 뭐 어쩔 도리가 있나. 집에 쌓여있는 책일랑 잊고 우선은 사고 싶은 책을 다 사는 수밖에.

이렇게 오늘도 주섬주섬 변명을 주워 삼기며 아직 읽지 못한 새 책들에 둘러싸여 잠을 청한다. 비록 오늘은 또 넷플릭스에 빠져있었지만 내일은 꼭 저 책을 마저 읽어야지, 그리고 (혹시 다 읽지 못하더라도) 일단 또 새로운 책을 사러 가야지. 아, 역시 책은 읽는 것보다 사는 게 훨씬 재밌다니까.

필자 소화 (블로그)

소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