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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의 마지막 날

열풍을 넘은 신드롬, 비틀즈

1980년 12월 8일은 월요일이었다. 뉴욕의 고급 아파트촌, 늦은 밤 11시경 귀가하는 한 쌍의 남녀가 차에서 내렸다. 여자는 동양인, 남자는 앵글로 색슨계 백인. 발걸음을 재촉하는 커플에게 누군가 다가섰다. 당시 나이 스물다섯의 젊은이였다. 그는 커플 중 남자를 잘 아는 듯 정중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미스터 레논!”

레논이라고 불린 남자가 젊은이 쪽을 돌아보자마자 젊은이의 손에 든 총이 불을 뿜었다. 다섯 발. 한때 기독교 광신도였고 신경 쇠약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한 경력이 있으며 바로 몇 시간 전 ‘미스터 레논’에게 사인을 받으며 환호했던 젊은이는 같은 사람에게 다섯 발이나 되는 총알 세례를 안겼고… 20세기 대중문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을 이름, 존 레논의 생명은 그렇게 끊기고 말았다.

존 레논의 마지막 날

세계 어디나 다 이랬다.

영국인들이 대서양을 향해 나아가던 발판이었던 도시 리버풀이 낳은 비틀즈와 존 레논,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 4인방의 전설을 일일이 읊을 생각은 없다. 하여간 대스타였다. 팬들은 비틀즈가 밟고 간 잔디를 뜯어 손에 쥐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이 행차하는 어디든 괴성을 발하는 군단이 운집하여 해당 지역 경찰의 식은땀을 쥐어짰다.

 

유럽을 정복한 그들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가공할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존 레논이 으쓱거릴 만도 했다. 이 덕분에 교황청을 비롯한 기독교인으로부터 배척받기도 했지만 비틀스의 인기 앞에서는 ‘그까이 꺼’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해체 이후, 존 레논의 진보적 행보

비틀스는 오랜 세월 함께 하지는 못했다. 존 레논의 새로운 부인 오노 요코의 존재와 레논-매카트니의 음악관 차이 등 여러 이유로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그룹은 해체됐다. 하지만 레논은 그 안에 깃들어 있던 또 다른 진가를 발휘한다. 물론 원래부터 끼(?)는 있었다. “뜻하지 않은 성공에 마주한 영국 노동 계급 젊은이(교황청이 2008년 존 레논을 ‘용서’하면서 쓴 표현)”로서 그는 1966년 미국이 월남전에 전면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다.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계속 권좌에 머무는 것, 그리고 진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그의 발언은 점차 수위가 높아졌고 그 끝은 점점 날카롭게 버려졌다.

“나 같은 성장 환경을 가진 사람에게는 엉뚱한 곳에 사람들 데려다 놓고 목숨을 잃게 만드는 군대 따위를 경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건 노동 계급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존 레논의 마지막 날

오죽하면 이런 영화도 나왔다.

조금 생뚱맞게 떠오르는 것은 비틀스로부터 1500년쯤 전 자기 나라 황제의 야심 때문에 고구려 땅에 끌려갔다가 숱한 희생을 치렀던 중국인들의 노래다. “요동 땅으로 가서 헛되이 죽지 마라.”는 ‘낭사요’가 그것이다. 그 노래는 하늘 같은 황제에 대한 반역의 상징이었다. 배 만드느라 물에서 나오지 못해 허리 아래 구더기가 슬어도, 농토를 돌보지 못해 처자식이 굶어 죽어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라는 황제를 향해 쳐들었던 거역의 선동이었다.

 

존 레논의 노래 또한 그랬다. 물론 백 배는 더 아름답고 천 배는 더 훌륭했지만. 통렬함, 분노, 그리고 ‘내 귀에 캔디’보다 더 달콤한 멜로디에 실린 치명적인 속삭임까지.

그들은 가정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학교에서는 당신을 매질한다. 당신이 똑똑하면 증오하고 바보일 땐 무시한다. 그래서 당신은 돌아버려 그들의 규율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것이다.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
수백만 노동자가 아무런 대가 없이 노동을 한다. 너희들은 그들이 실제로 가져야 하는 것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거리로 나갔을 때 우리는 너희를 끌어내릴 것이다.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세요. 당신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욕심부릴 일도 배고플 이유도 없는 한 형제처럼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상상해봐요. 〈이매진(Imagine)〉

가수를 넘어 위대한 운동가, 존 레논의 죽음

존 레논의 마지막 날

잉글랜드인이면서도 북아일랜드의 유혈 사태에 분노하여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인에게 맡기고 영국인들은 바다 건너 돌아가라”고 절규하고 “우리는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고 말한다. 친구가 되기엔 세상 물정 너무 모른다고 한다.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라며 까발리면서 존 레논은 그의 재능을 사회적 자산에 내맡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물론 자본주의 시대의 스타로서 누릴 것을 죄다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최소한 자신이 누리는 부의 모순을 알고 있었고, 그를 공격하는데 자신의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그의 ‘성장 환경’이었던 노동 계급들은 그를 알아주었다. 영화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에서 악기값을 마련하기 위해 얼치기 삐에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광부가 이렇게 외쳤던 것 기억하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분장한 얼굴을 흘러내리던 비통한 눈물과 아울러.

“존 레논도 데려가고, 에인즐리 탄광의 광부 셋이나 데려가더니, 내 아버지마저 데려가려 하면서, 왜 마거릿 대처는 살려두는 거야? 하나님이 있기나 한 거야?”

존 레논이 갔다.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 폴 매카트니의 말처럼 “존 레논은 예술, 음악 그리고 세계평화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지대한 공헌으로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인물“이었던, 그가 숨을 거뒀다.

필자 산하 (블로그)

마흔 넷의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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