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캐슬’이 막장으로 끝난 이유
드라마 〈스카이캐슬〉 결말에 대한 비판(비난)들은 이미 충분히 쏟아져 나왔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한 지적은 아직 못 본 것 같아 굳이 적어 본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스카이캐슬이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서 시청자들은 ‘막장’과 ‘파국’을 원했기 때문에 그 행복한 결말에 분노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기사를 많이 봤다.
딱 봐도 훈훈해 보이는 결말 / 출처: jtbc |
나는 그런 분석을 보면서 몹시 당혹스러웠는데 ‘막장’과 ‘파국’은 시청자가 원한 게 아니라 (기이한 결말을 통해) 작가가 성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파국을 맞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20회에 걸친 이 드라마는 파국을 맞았다. 서사물의 성공은 등장인물의 행복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다. 행복한 인물들을 본다고 해서 시청자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365일 행복하고 밝고 힘찬 인물들이 날마다 삶을 찬양하는 대사를 읊는 드라마를 요구하면 될 일이다.
사실 이야기를 제대로 끝내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한 번이라도 소설 비슷한 걸 끄적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할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쉽다. 중간에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집어넣는 것도 쉽다. 하지만 그럴듯한 결론으로 이걸 마무리하는 것은 어렵다. 그 펼쳐놓은 인물과 사건들과 갈등을 종결지을 ‘출구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서사물을 평가할 때 결론에 주목하는 것은 그곳이 종결에 뒤이어 의미가 생성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의미를 제시하면서 종결하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야구의 마무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9회까지 5:0으로 이기고 있으면 뭐하나. 마무리 투수가 6점을 내줘서 5:6으로 역전패를 당한다면 그 경기는 진 경기다. 서사물은 인생보다는 야구와 더 비슷하다.
인생에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서사물에는 그런 의미를 부여할 과정이 없다. 오직 결말이 중요하다. 서사물의 의미 자체가 마무리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결말이 엉망인 서사물에 대해 ‘그래도 그전까지 이야기를 끌고 온 솜씨는 훌륭했어’ 하고 평가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렇게 긴장감 있게 잘 끌고 온 이야기를 왜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짓지?’ 하고 분노한다. 당연하다. 서사는 곧 마무리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정말 훌륭했는데… / 출처: jtbc |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 〈스카이캐슬〉 결말의 가장 큰 문제는 혜나를 그저 희생당한 불쌍한 존재로 그려냈다는 데 있다. 혜나는 드라마의 중후반부에 가장 핵심적인 갈등을 담당하고 있던 캐릭터다. 드라마 중후반부는 혜나라는 캐릭터의 힘으로 굴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혜나는 알다시피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주 약한 존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를 모두 잃고 진실을 숨긴 채 친부의 집에 더부살이 중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캐릭터가 한서진이라는 어른과 맞서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스카이캐슬은 혜나를 그런 약자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리지 않고 한서진과 팽팽하게 맞서게 만듦으로써 커다란 긴장감을 생성해냈다.
그때 많은 시청자는 혜나의 당돌함을 가증스러워하며 마음속으로 한서진을 응원했다. 어떤 사람은 혜나가 욕을 먹는 것이 안타까워 작가를 욕했다. 흙수저 혜나를 왜 저렇게 나쁘게 그려서 욕을 먹게 만드느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혜나가 시청자들의 일방적인 ‘동정’을 받지 못하고 무언가 무서운 사람으로 다가왔던 그 장면은 이 드라마의 한계가 아니라 차라리 작은 성취였다.
거기서 적어도 혜나는 ‘안타고니스트’로서의 카리스마와 긴장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혜나의 냉철함과 침착함이 한서진의 두려움과 불안과 교차하면서 생성되는 긴장이 드라마 후반부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두 캐릭터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드라마는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출처: jtbc |
작가는 결국 혜나를 강준상과 한서진의 잘못으로 인해 희생된 가여운 존재로 그림으로써 서사의 붕괴를 가져온다. 이것이 서사의 붕괴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에 김주영 쓰앵이 한서진에게 당신도 공범이라고 추궁하는 대목이 충격적이기는커녕 생뚱맞고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김주영과 한서진의 대화 장면은 혜나의 죽음 이후 가장 큰 클라이막스였다.
아마 작가는 그 대화를 통해 한서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반성하는 장면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는 거기서 이상한 오글거림과 함께 고개를 힘껏 돌릴 수밖에 없었다. 김주영 쓰앵의 힐난에 도무지 동의하기 어렵게 드라마가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한서진은 혜나와의 관계에 있어 일방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극 내내 혜나가 사람들의 동정을 이끌어냈던 캐릭터였으면 모를까 극에서 혜나의 캐릭터는 그런 스테레오타입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혜나의 죽음에 패배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혜나에 대해 한서진의 죄책감에 우리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서사는 가지 않은 길을 무수히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것은 곧 기회비용의 포기를 의미한다. 혜나를 그런 캐릭터로 그렸다면 한서진의 반성은 포기했어야 했다. 둘 다 가지려고 한다면 하나도 제대로 손에 쥘 수 없다.
스카이캐슬은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순간적인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혜나라는 캐릭터는 분명 이제껏 본 적 없는 서늘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그런 입체적이고 서늘한 캐릭터를 처리하는 데 있어 이 드라마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건 역설적으로 그 캐릭터들의 입체성에서 비롯한다.
출처: jtbc |
단면적이고 단순한 이야기는 마무리하기 쉽다.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하고 끝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입체적이고 흥미진진할수록 마무리하기가 어렵다. 그 인물들이 시청자들 안에서 자율적으로 운동하기 때문이다. 스카이캐슬은 입체적이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갑자기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하고 끝낸다. 인물들의 자율적인 운동을 감당할 수 없어 그냥 팍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꼴이다.
사실 이건 이 드라마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드라마(를 비롯한 서사물)이 가진 고유한 약점이다. 정답 찾기 교육을 오래 받은 탓인지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끌고 가는 법에 미숙하다. 그래서 결국 안전한 클리셰에 기대 마무리를 짓는다. 이건 ‘악’을 그리는 철저함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한국의 드라마에서는 ‘악역’은 존재하지만 ‘악’은 없다. 악역은 클리셰에 기대 연기할 수 있지만 ‘악’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캐릭터 자체를 입체적이고 중층적으로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스카이캐슬’에 열광한 것은 그 드라마가 ‘악의 평범성’을 예리하게 보여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평범한 선’으로 마무리되었다.
고3 학생이 시험지 던지고 교실을 나오는 것을 ‘전복’이라고 받아들일 시청자는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려야 존재한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영화가 언제 나왔더라). 혜나의 모험이 결국 그 자신마저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그 혜나의 선택은 스카이캐슬이라는 상징계를 찢고 실재와 접속하는 것일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만휘인 줄 시험지를 휘날리네” / 출처: jtbc |
하지만 결국 드라마는 혜나의 충동을 가족이라는 상징계 내부로 회수함으로써 그러한 실재와의 대면을 회피한다. 시청자들은 그 안온하고 기만적인 해결책에 분노했던 것이지 무슨 개막장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결말의 파국이 ‘막장’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눈에는 그리스 비극 역시 먼 나라의 막장 드라마로 보일 것이다.
〈스카이캐슬〉은 처음에는 정말 그리스 비극처럼 보였고 그 비극적 요소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영재 엄마는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와 닮아 있지 않은가. 사실 〈스카이캐슬〉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부모는 눈먼 부모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눈을 찌르는 비극의 인물과 달리 개안에 가뿐하게 성공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훌륭한 안과의사의 자질이지 결코 작가의 자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비극이 비극인 이유는 그 인물들의 충동과 운명을 끝 간 데 없이 밀어붙이는 냉철함에 있는 것이지 따뜻하고 행복한 결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될 때 그 비극은 비로소 막장이 된다. 스카이캐슬이 결국 막장 드라마로 끝나고 만 이유다.
필자 진짜한량
한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