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필름의 새로운 역사 “블랙팬서”
※ 이 글은 영화 <블랙팬서>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글을 닫아 주세요.
블랙팬서는 마블 코믹스 최초의 흑인 슈퍼히어로이다. 1966년 처음 등장하여 현재까지 가장 유명한 흑인 히어로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급진파 흑인 인권운동 단체인 흑표당(BlackPanther Party)와 같은 이름이라는 점에서, 아프로 아메리칸들에겐 잊을 수 없는 영웅과도 같다.
2018년 드디어 영화화된 <블랙팬서>는 최초의 흑인 슈퍼히어로 영화를 표방한다. 물론 <블레이드> 등의 영화가 존재했지만, 2억 달러라는 거대 예산과 MCU라는 거대 프랜차이즈를 통해 제작된 블록버스터로서는 최초임이 틀림없다.
영화가 내세우는 가치는 포스터에서부터 드러난다. 거대 예산의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작품 중 포스터에 이렇게 백인이 없는 영화를 본 적이 있나 생각해본다면 영화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2015년 힙합그룹 N.W.A의 전기영화인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이 깜짝 흥행을 기록하고,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정권이 교체되고, 2017년 <겟 아웃>이 평단과 박스오피스 모두에서 광풍을 일으켰다. <블랙팬서>는 이러한 흐름의 화룡정점으로 남을 작품이다.
영화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직후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와칸다를 이끌던 국왕 티차카(존 카니)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티찰라(채드윅 보스먼)가 블랙팬서의 자리를 왕좌와 함께 물려받는다. 왕좌에 올라선 그는 30년 전 와칸다 국민들을 살해하고 비브라늄을 훔쳐간 율리시스 클로(앤디 서키스)가 부산에서 거래를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내 그는 와칸다의 과학 담당인 동생 슈리(레티티아 라이트)의 도움을 받아, 와칸다의 장군인 오코예(다나이 구리라)와 스파이 나키아(루피타 뇽)와 함께 클로를 잡기 위해 부산으로 떠난다.
우연히 재회한 CIA 요원 에버렛 로스(마틴 프리먼)와 함께 클로를 생포했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에릭 킬몽거(마이클 B. 조던)이 클로를 데리고 사라진다. 티찰라는 와칸다의 사제 주리(포레스트 휘태커)에게 킬몽거가 숨겨진 사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와칸다 내부를 수호하기에도 벅차다는 티찰라와 와칸다 밖 흑인들의 삶을 직접 경험한 킬몽거는 의견 차이로 대립하고, 결국 각자의 방식을 실현하기 위해 와칸다의 왕좌를 사이에 둔 대결이 벌어진다.
영화의 줄거리를 길게 적은 이유는 <블랙팬서>의 줄거리가 북미의 흑인 인권운동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침략으로 인해 자신들의 것을 잃은 흑인들, 남은 것을 지키기 위해 비폭력을 주장하는 자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되갚아줘야 한다는 급진파, 내부의 갈등과 봉합을 통해 미약하거나 혹은 창대하기도 한 희망을 발견한다.
티찰라와 킬몽거의 대립은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의 대립을 연상시키고(이것은 이미 <엑스맨>의 프로패서 X와 매그니토의 대립을 통해 슈퍼히어로 장르 안에서 그려진 적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는 60년대 중반~70년대에 이르는 흑인 인권운동사를 변형한 것으로 느껴진다. 더군다나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간과 장소는 1992년의 LA이다. 1992년은 흑인 소녀에 대한 차별을 계기로 벌어진 LA사태가 발생한 해이다.
영화는 LA에 스파이로 파견된 티차카의 동생 은조부(스터링 K. 브라운)가 LA사태를 지켜보며 급진파 활동에 뛰어드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영화 후반부 킬몽거의 환상에서 등장하는 은조부에 집에는 힙합그룹 Public Enemy의 데뷔 앨범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1988년 발매된 이 앨범은 인종차별과 폭력적인 경찰권력에 대한 날 선 비판으로 호평받았던 작품이다. <블랙팬서>는 이러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아프리카의 국가를 배경으로 한 만큼, 실제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착용한 의상과 문신 등을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 녹여냈다. 흑표범이 등장하는 신화라던가, 부족들 간의 관계 등 역시 아프리카의 역사 속에서 가져온 것이다. 서사적으로는 북미의 흑인 인권운동을 따라가면서 배경과 디테일 안에서는 아프리카라는 뿌리를 잊지 않는다.
이러한 기조는 <샤프트>나 <폭시 브라운> 등으로 대표되는 70~80년대 블랙스플로테이션 영화들로 시작하여 <똑바로 살아라>의 스파이크 리와 <보이즈 앤 후드> 존 싱글톤으로 대표되는 90년대의 영화들, 래퍼들의 전기영화가 쏟아졌던 2000년대와 2015년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과 2017년 <겟 아웃>(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다니엘 칼루야가 와카비 역으로 <블랙팬서>에도 출연한다!)으로 부활한 블랙필름의 계보 속에서도 발견된다.
다시 말하자면 <블랙팬서>는 블랙필름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가면서도 그것을 거대 예산이 투입되는 메이저 블록버스터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켄드릭 라마가 소속된 레이블 TDE가 영화의 삽입될 사운드트랙 앨범을 아예 <블랙팬서> 영화에 영감을 받은 컨셉 앨범으로 제작한 것이나, 북미 개봉 당일 이어지고 있는 매진 행렬 등의 현상은 <블랙팬서>를 새로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앞선 MCU의 영화들보다 한층 진지한 톤으로, 게다가 선악의 구분이 희미해져 그 경계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의 서사는 영화에 더욱 복잡하고 다각적인 결을 부여한다. <블랙팬서>는 노동자 계급을 단순 악역으로 상정해버린 <스파이더맨: 홈커밍>이나, 손쉽게 백인 취향 가부장제 속으로 빨려 들어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빌런을 이해하다 못해 동정하게 되어버린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티찰라와 킬몽거의 입장은 명확하게 전달되며, 마치 <엑스맨>의 찰스와 에릭(공교롭게도 킬몽거의 본명과 이름이 겹친다)의 대립을 보는 것처럼 누군가의 편을 들어줄 수도 없도록 관객을 유도한다.
결국 <블랙팬서>는블랙스플로테이션의 시대에서부터 이어진 블랙필름의 계보를 따르면서도 상업 오락영화로서의 가치도 잃지 않는, 그야말로 MCU의 <라이온 킹>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티찰라가 은조부가 살던 LA를 찾아 그곳에 사회지원센터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장소에는 친구들과 농구를 하던 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연기한 배우는 베리 젠킨스의 <문라이트>에서 리틀을 연기한 알렉스 R. 히버트이다. 이어지는 쿠키영상에서 티찰라는 와칸다가 지닌 기술력과 자원을 공유하겠다고 UN에서 연설한다.
티찰라의 계획의 (아마도) 첫 대상이 될 아이가 <문라이트>에서 빈민층 흑인 성소수자 소년을 연기했던 배우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과잉해석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맞아떨어진 캐스팅인지, 혹은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철저한 계산 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블랙팬서>가 희망하는 것은 흑표당이 결성된 시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종차별의 고리를 자신들의 손으로 끊어내는 미래다.
<블랙팬서>라는 영화 자체가 지닌 몇 가지 결함(가령 부산 장면에서 들려오는 싸이의 ‘Hangover’나 의상과 세팅을 보여주는 카지노 장면 등)이 보이지만, 영화가 지닌 디테일을 통해 라이언 쿠글러의 큰 그림을 만난다면 그저 이 영화가 가져올 반향이 무엇일지 기대하게 된다.
영화 보는 영알못. 영화 블로그에 이런저런 감상들을 써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