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과학기술계의 적폐들
얼마 전 연구원에서 일하는 한 지인을 만났다. 시시콜콜한 잡담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정치 얘기로 넘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찍을 후보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두 명 중 한 명인데 아직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했다는 거다. 그러면서 “A는 큰 틀에서 과학을 보는 것 같고, B는 세부적으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이쪽을 조금이라도 더 잘 아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정부출연연구기관 종사자이니 아무래도 과학기술 정책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정책으로 후보를 판단하겠다는 그의 생각을 당연히 존중한다. 모름지기 내가 찍을 후보는 그렇게 선택해야 한다. 반면 아이돌에 열광하는 10대처럼 ‘팬심’으로 지지하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하지만 ‘과학기술계를 조금이라도 더 잘 아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겠냐’는 그의 말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소모적인 논쟁이 될 것 같아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낫지 않겠냐”는 두리뭉실한 말로 대화를 마쳤지만, 그때 더 강하게 설득하지 못한 걸 지금도 후회한다.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과학기술계 인사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진은 2013년 과학기술인 신년인사회. 출처: 뉴시스 |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탄생을 축하했던 그들
나는 과학기술 분야 커뮤니티의 리더를 자처하는 한 인사가 지난 대통령 선거 직후 썼던 칼럼을 지금도 기억한다. ‘최초의 이공계 대통령을 맞는 과학자들의 자세’. 제목부터 거창한 그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체계적 이공계 수업을 받은 최초의 이공계 대통령이 탄생하게 됐다.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자가 주인공이다. 이전에도 이공계 성향의 대통령이 있기는 했다. 군인 출신의 대통령은 반(半) 이공계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체계적인 이공계 수업을 받은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문제는 차치하자. 군인 출신을 반 이공계로 분류하는 기상천외한 논리도 그냥 넘어가자(이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매년 100만 명의 반 이공계 병사를 양성하고 있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공계 출신 대통령이 나왔다고 연구자들이 대통령에게 바라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게 이 글의 요지였다. 나름 자신이 과학기술 분야에 10년 넘게 있어봐서 잘 안다는 분위기도 슬쩍 내비쳤다. 내가 알기론 이공계 출신 대통령이 나왔다고 뭔가 바랐던 사람은 본인을 포함해 일부였다. 대부분 연구원은 대통령이 이공계 출신이든 인문계 출신이든 별 관심이 없었다.
과학기술 분야를 잘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대체로 두 부류다. 우선 내부의 원로 그룹. 대부분 박정희 시절 해외에서 유학했거나 연구원이 된 사람들이다.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가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다른 분야의 ‘박정희 향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시절에서 벗어나게 해줬다는 것처럼 과학기술도 그렇다. ‘그렇게 가난했던 시절,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와 같은 레퍼토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다음으로 이들과 친하거나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외부 그룹.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가 정부출연연의 연구자들을 폄훼한다. 그들이 보는 연구자는 이런 사람들이다. 연구 열정은 식었고, 국민의 세금으로 연구한다는 책임감도 없다.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도 없다. 급기야 정부출연연을 없애야 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말은 그러면서도 과학기술계 기관장이나 리더와는 끊임없이 관계를 유지한다. 그곳에서 돈이 나오고, 그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방송 토론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는 후보들. 출처: 뉴시스 |
차라리 “잘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낫다
당연히 그 분야를 잘 아는 사람이 그 분야의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하지만 국정의 최고 책임자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스스로 ‘나는 잘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만약 지금 한국의 과학기술 분야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에 빠졌다면 이렇게 잘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의 책임이 크다. 우리는 이미 지난 시절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즐겨 말했던 지도자의 독선과 실정(失政)을 경험했다. 여전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과학기술계를 잘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을 믿지 못한다. 오히려 ‘잘 모르니 가르쳐 달라, 더 듣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신뢰한다. 우리나라에도 과학기술 부흥기가 있었다면, 그 시절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그런 사람들이었다(어쩌면 박정희도 포함해서).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운운하며 용비어천가를 불렀던 사람들이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들은 무엇인가 하려고 할 것이다. 과학기술계에도 적폐가 있다면 바로 그들이다. 물론 그들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필자 김형석 (블로그)
기자 생활 접고 콘텐츠스토리 회사 SCOOP을 차렸다. 직원은 단 두 명. 회사 일보다 책 읽고 글 쓰는 일로 더 바쁘다. 블로그와 페이스북 페이지 '책방아저씨'를 운영중이다. http://www.booksboos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