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해서 인정받는 시대는 끝, 직장인도 기업가도 나를 홍보해야 살아남는다
『팔리는 나를 만들어 팝니다』 박창선 대표 인터뷰
15년간 어떻게든 나를 팔아야만 했던 남자의 이야기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창선: 브랜드디자인 회사 ‘애프터모멘트’ 대표이자 『팔리는 나를 만들어 팝니다』 저자인 박창선입니다. 작년까진 잘 됐는데, 올해는 코로나로 1–3월까지 한 푼도 못 벌었네요.
박창선 대표. / 출처: 채널예스 |
리: ‘나부터 나를 영업하자’면서 책을 내셨는데, 얼마나 본인을 팔아보셨어요?
박창선: 어릴 때부터 좀 사회 경험이 많아요. 대학 1학년 중퇴하고 군대 다녀온 후 바로 일했거든요. 다양한 판매, 영업 분야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었어요. 이후 디자인 회사를 차리고 혼자 사업체를 꾸려나가면서 저를 팔아 살아남아야 했었는데… 어릴 적부터 일해왔던 시간과 경험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요즘 시대에 나를 어떻게 팔고 어필해야 하는지, 그런 걸 말해보고 싶었어요.
출간 3일 만에 중쇄를 찍었다! |
리: 어릴 때 영업은 어땠습니까?
박창선: 잘했어요. 아디다스 신발 팔 때, 막 제가 직접 신어보고 뛰어다녔어요. 형들이 오버하지 말라 했는데, 고객들은 좋아하시더라고요. 콜센터 때는 보험사 교통사고 전담반이었어요. 교통사고 나면 뒷목 잡고 전화하는 곳이죠. 누님들이 절 굉장히 이뻐했는데, 힘든 곳이었어요. 모두가 욕먹는 곳이라, 욕하면 뮤트로 해두고 우리도 같이 시부렁거리고… 한 통화 끝날 때마다 담배 피우러 가고… 콜센터가 그래요.
고졸이라는 딱지에 영업직 외에는 자리가 없었던 20대
리: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박창선: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원서 썼는데 다 떨어졌죠. 이력서에는 그냥 고졸이잖아요. 결국 또 영업직으로 가게 됐어요. 영업직은 스펙을 많이 안 봐요. 애들이 얼마나 절박한지가 더 중요하거든요. 저는 돈 없고 절박하고… 아주 좋은 영업 인재였던 거죠. 그래서 애들 영어를 가르치면서 교육상품을 파는 영업 사원이 됐어요.
리: 고졸이 영어를 가르치다니…
박창선: 그냥 미치도록 외웠어요. 문법책 하나 사서 문제와 해설까지 20번 정도 읽으면 다 외워져요. 그래서 지금도 제가 영문법은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알바를 많이 한 게 도움이 됐어요. 비위 맞추는 걸 굉장히 잘하거든요.
먹고살기 위해서 실제 이런 삶을 살았다. |
리: 기생충의 제시카 선생님이었군요.
박창선: 그렇죠. 그 회사에서 3년 만에 팀장을 달았어요. 영업직이 워낙 힘드니 동기부여를 위해 승진을 빨리 시켜주거든요. 이후에는 잠시 서울시 청소년 기관에서 기획자로 일했어요. 상황이 좋지 않은 위기청소년이 많았고, 그런 아이들에게 동질감도 많이 느꼈어요. 힘든 시간을 겪는 아이들에게는, 내 어린 시절과 비슷하고 친구 같은 선생님이었죠.
사장놀이에 젖었던 1년, 우울증만을 낳다
리: 참 커리어가 다양하네요…
박창선: 막상 관두니 이직이 안 돼요. 커리어가 엉망진창에 영업직을 전전했으니까요. 그래서 취업 준비를 하면서 PPT 알바를 깔짝깔짝하면서 근근이 먹고살았어요. 꼴랑 장당 5,000원에… 그러다 정부 지원 사업으로 창업을 했어요. 서울시기관에서 일할 때 맨날 사업계획서만 썼는데 양식이 똑같더라고요.
하지만 박근혜가 다음 해 이 자리에 서는 일은 없었다, 놀랍게도 다음 해… |
리: 그 사업은 어땠나요?
박창선: 사실 좀 흑역사였어요. 대표라는 직함 달고 직원도 6명 있었어요. 20대 때 구르고 소위 밑바닥 생활을 하며 느낀 열등감과 서글픔을 다 보상받는 것 같았죠. 그런데 지원금 3,000만 원으로 6명 월급을 어떻게 줘요? 전부 열정페이 한 거지… 열심히 꾸려나가려 했으나, 철이 없었고, 대표라는 직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어요. 네트워킹 파티, 인터뷰… 일은 안 하고, 대외활동에만 굉장히 집착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죠. 지원사업이 끝날 때쯤 이미 제 곁엔 아무도 없었죠.
리: ……
박창선: 큰 우울증에 빠졌어요. 공황장애도 오고… 이제야 인생에 빛이 드는구나 했지만,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고 무너지는 느낌은 정말 힘들었어요. 굉장히 많은 상담을 받고 약 먹으면서, 다시 술을 찾기도 하고… 이후 대행사와 1년 정도 기획과 디자인을 하고 독립하게 됐죠.
거지꼴의 박창선 대표… 가 직접 그린 그림이다. |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부터 나를 영업해야 한다
리: 그 과정이 있고 나서 본격적으로 내 사업을 시작했군요.
박창선: 대행사에서 함께 일했을 때는 그것을 평생 업으로 생각한 게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저도 제 사업자를 가진 상태였고, 그냥 세금계산서만 끊는 용도의 사업자로 놔두고 싶진 않았어요. 이제 야생으로 나가 제 본래의 사업체를 키워야겠단 생각이 들었죠.
리: 고객이 없는데 어떻게 사업을 해요?
박창선: 듣보잡이었죠. 그래도 그간 만났던 모든 인맥들에게 일 좀 달라고 전화를 돌렸어요. 제가 좀 힘듭니다, 도와주십시오… 대부분 일로 이런 거 많이 했는데, 잘 안 됐죠. 한두 명 연락이 오긴 하지만 성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그럼에도 정말 기적처럼 “한 번 같이 해봅시다”라고 말해줬던 몇몇 작은 회사 덕에 근근이 먹고살 수 있었어요.
자신을 팔기 위해 전화를 걸고 페이스북에 매일 같이 이런 콘텐츠를 올렸다. |
리: 그때는 얼마 받았어요?
박창선: 그때는 지금처럼 건 바이 건으로 안 받고, 아예 1–3개월 프로젝트 합류 형식으로 했어요. 제안서 하나 만드는 게 아니라, 제안서, 페이스북 카드 뉴스, 행사 진행까지 묶어서 브랜드 전반 일을 도와드린 거죠. 아예 그 회사에 상주했어요. 한 달 동안 직원처럼 있던 거죠.
리: 그러면 여러 회사 일을 못 하잖아요?
박창선: 괜찮습니다. 어차피 여러 일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리: ……
박창선: 그래도 굉장히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소개라도 받을 수 있으니… 그렇게 소개가 조금씩 들어오며 밥벌이는 했죠. 그런데 이래서는 또 불안하니 저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브런치가 처음이 아니에요. 인스타, 블로그, 페이스북 페이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만들고 지우고 반복했죠. 실패가 중요한 경험이 됐어요. 책에도 언급했지만 시행착오는 성공을 계획하는 좋은 발판이 됩니다.
초기 브런치 글의 반응은 그야말로 0이었다. |
리: 콘셉트나 콘텐츠 감이 엄청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박창선: 그런 말 많이 듣는데 동의하지 않아요. 삽질을 계속하며 저에게 안 맞는 게 무엇인지 안 것 같아요. 이거 하면 망하는구나, 이런 실패를 통한 레퍼런스를 쌓아간 거죠. 고민고민하다 무료로 PPT 템플릿을 페북에 뿌렸는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걸로 영업하며, 동시에 전화 계속 돌렸죠. 일 좀 달라고…
리: 우와… 진짜 죽어라 영업하며 살았군요.
박창선: 네. 아웃바운드를 멈춘 지는 얼마 안 됐어요. 가시적 성과는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계속 애걸복걸하니 페이스북에 태그 정도는 걸어주더라고요. 포스터 만들어줄 사람 글이 있으면 댓글에 태그해 주시거나…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죠. 사실 시디과를 나온 전공 디자이너들과 싸우면 제 포트폴리오는 밀릴 수밖에 없거든요. 질도 질이지만 대학교 때부터 10년 이상 한 사람들과 제가 경쟁하기는 너무 벅찼죠.
그 영업의 내공으로 이 책이 등장했다. / 출처: 미라의 책을 통한 세상읽기 |
디자이너든 뭐든 ‘고객의 숨은 목소리’를 찾아야 돈을 번다
리: 나만의 경쟁력을 찾아라!
박창선: 네. 포트폴리오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야 할 텐데, 제가 잘하는 게 무엇인가 생각해봤죠. 그런데 디자이너들의 모임을 갔는데, 다들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거예요. 클라이언트 말 못 알아듣겠다, 피드백이 별로다… 그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저는 클라이언트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좀 샤- 하게 해줘요”란 게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남들에게는 강아지 소리로 들리는 게 저에겐 “배고파”로 들렸던 거죠.
이 정도는 읽어야 진짜 디자이너. / 출처: 박창선의 브런치 |
리: 그런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박창선: 저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일을 해오며, 끊임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그들의 욕망을 읽어내야 돈을 벌 수 있었어요. 항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에 담긴 함의를 읽어야 했죠. 그래서 클라이언트 만났을 때 디자인 이야기보다, 지금 사업하며 뭐가 힘들고 어려운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책에도 이야기했지만 일 잘하는 사람은 좋은 사회자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디자인 실무에 대한 이야기는 한참 뒤에나 겨우 나오지, 대체로 뭘 하고 싶다는 욕구에 대한 말들이 앞서 나오거든요. 문제가 있고 개선하고 싶어서 요청한 거죠. 그런 히스토리를 듣고 그들이 힘들어하는 포인트들을 찾아 솔루션을 내놓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고객의 숨은 목소리를 들으려면 계속해서 경청해야 한다. / 출처: 박창선의 브런치 |
리: 오, 그때부터는 돈이 좀 됐나요?
박창선: 단가가 약간 높아지긴 했죠. 월 프로젝트 했을 때는 300 정도 받고 온갖 잡일 다 해줬죠. 보통 그러면 호구가 돼요. 계약서에 포함되지 않은 일도 하고… 그래도 의리로 일했죠. 많이들 좋아하셨어요.
리: 뭐, 이름값 없을 때는 호구 짓이라도 해서 버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박창선: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좋다고 봐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면 해야죠. 본인이 홍대 시디과 나왔고 레퍼런스 있고 하면 바로 제값 받아야죠.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열등감이 쩔었고, 제가 X밥이라는 마인드가 깔려 있었기에… 돈 주는 분들이 일종의 신, 시혜자… 그런 느낌이었어요.
단가는 내가 아닌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 결정해야 한다
리: 그래도 단가를 서서히 올려야 하지 않나요?
박창선: 수많은 디자이너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 생각해요. ㅍㅍㅅㅅ도 콘텐츠 퀄리티가 점점 좋아지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가격을 올린다?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책에도 팔 만한 가치가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많은 분이 그 파트에서 뼈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개인사업 하는 사람은 나밖에 못 봐요. 내 고생과 과정을 금액으로 책정하고 싶어하죠. 하지만 클라이언트는 인정하지 않아요. 보통 클라이언트는 급으로 생각하죠. 연차가 아니라 주니어, 시니어, 마스터, 이렇게 점프 되는 느낌이에요.
리: 본인은 어떻게 급을 올렸나요?
박창선: 우연이 컸어요. 2017년 변변한 포트폴리오도 없이 나를 알려야 했기에,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나는 이렇게 일한다, 미팅하는 방법, 이런 걸 풀어내기 시작했지만… 사실 일 좀 달라는 영업 글이었어요. 15개 썼는데 조회 수 100도 안 나오더라고요. 술 먹고 한번 미친 척하고 개드립을 썼어요. 클라이언트 용어 정리였죠. 자고 일어났더니 조회 수 20만이 터졌어요. 비슷한 글 몇 개 더 쓰니까 쓰는 글마다 10만씩 터지더라고요. 뭐지 싶었는데, 그 뒤로 2주일이 지나고 인생이 바뀌더라고요.
이 엄청난 공유 수를 보라! |
리: 어떻게요?
박창선: 의뢰가 빗발치기 시작했어요. 생각도 못 했던 대기업 강의 의뢰, 출판사 11군데 미팅 제안, 방송국, 라디오, 신문사에서 인터뷰하자 뭐하자… 장난 아니었죠. 그때 처음으로 포스터 작업이 들어왔어요. 금액을 선제안해주던데, 시안 1개, 배리에이션 2개에 300을 주겠더라고요. 기분이 어땠겠어요? 2주 전까지만 한 달 내내 뺑이 치며 카드 뉴스, 가이드, 음식물 쓰레기까지 버려주며 300 받다가, 갑자기 포스터 한 장에 300…
리: 이때쯤 돼서 단가 올려라?
박창선: 조심스럽지만 단가를 올리는 건 연차가 아니라 본인 네임 밸류라 생각해요. 1년 지났으니 올려달라, 이런 건 위험한 발상이란 거죠.
리: 급이 달라지면 단가도 올라가지만 신뢰감이 달라지죠.
박창선: 굉장히 크죠. 만약에 노동의 양과 금액이 비례한다면, 카피라이터들은 3,000원 받고 일해야죠. 하지만 일류 카피라이터에게 몇천만 원을 쓰는 이유는, 쏟아붓는 노동의 양이 아니라 상대가 인식하는 카피라이터의 중요성이죠. 그 한 줄이 너무 절박하고, 그 카피라이터가 너무 희소한 거예요. 가치를 만드는 것은 클라이언트가 나를 얼마나 절박하게 원하는지예요.
이런 문구를 쓰는 시간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
리: 그렇다고 클라이언트마다 다른 가격 받기도 뭐하고…
박창선: 딜레마죠. 아시다시피 수많은 프리랜서가 다 간 보면서, 이렇게 저렇게 다른 가격을 불러요. 대기업에서 6,000을 선제안 하기도 하고, 스타트업 일이라고 10만 원대에 해주고… 형평성에 안 맞죠. 저도 이 딜레마를 한참 가졌어요. 6,000만 원짜리 대기업 일은 엎어지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로고 하나에 왔다 갔다 하는 그들의 매출과 부가가치가 굉장히 큰 거죠.
리: 하지만 올해 들어 가격을 정하지 않았습니까?
박창선: 네. 이유는 2가지인데, 그래도 2년간 자리를 잘 잡아서 당장 돈이 급하지 않아요. 그리고 일을 받았을 때 책임질 수 있는 제 케파가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됐어요. 대기업이든 뭐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책임감 갖고 하자, 당장 먹고살 걱정이 없으면 돈에 따라 움직이지 말자. 물론 일의 범위에 따라 어느 정도 조절은 가능하겠지만, 무리해서 단가에 집착하고 싶지 않아요.
박창선 대표는 놀랍게도 최근 가격을 공개했다. |
리: 스트레스는 사라지겠군요.
박창선: 네, 사실 문의 메일이 뜸해진 것도 좋아요. 견적 보냈는데 연락 안 오면 의미 없잖아요. 딱 이 돈에 저를 원하는 사람만 연락하는 게 편하죠.
네임 밸류가 오를 때 자기 가치를 올려라
리: 작년 얼마나 벌었나요?
박창선: 2017년 좀 뜨고 7,000만, 2018년 1억, 2019년 1억 정도예요.
리: 어… 솔직히 창선님 네임 밸류면 오히려 돈 별로 못 벌었다는 느낌인데요?
박창선: 작정하고 하려면 2배 이상 벌 수도 있었겠죠. 근데 작정을 못 했어요. 항상 쪼들려 살다가 유명해지니까 무서웠어요. 물이 들어오니까 노를 저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자잘한 일까지 다 받았고, 그러면서 일을 분별하지 못했죠. 큰일에 높은 금액을 불러서 제 가치를 좀 더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놓치지 않으려고 단가를 깎으며 일을 받았죠. 그래서 실제로 작업당 단가가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었어요.
이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
리: 노동시간 엄청 쓰며 자신을 갈아 먹었던 거군요. 사람 늘릴 생각은 안 했나요?
박창선: 시행착오였죠. 사람 늘릴 생각도 해야 했는데, 5년 전 처음 시작할 때 6명 말아 먹은 기억이 너무 아팠어요. 제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있었죠. 누군가를 쥐어짜서 돈을 번다는 것도 맘에 들지 않고… 그래서 제가 받아서 다른 디자인 회사 소개하고 넘길 때도, 중간에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어요. 뭐, 아쉬운 점도 많지만 아무튼 거지 같이 살다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리: 너무 예전에 불행했던 삶의 불안감을 안고 사는 느낌인데요.
박창선: 빠져나가기 힘든 족쇄 같아요. 수많은 분이 일단 돈 벌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사람 뽑아서 미치도록 굴리는 게 정답일까, 돈을 목표로 삼는 게 맞나… 전 돈에 집착하기보다 좀 많은 시도를 하며 배워가고 싶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영업을 해보려 해요.
리: 에? 이제 먹고살 만한데도 또 영업?
박창선: 영업은 끝이 없는 거죠. 그래도 예전에는 ‘도와주십시오’였다면, 지금은 ‘저는 이거 잘하는데, 이런 걸 같이 해보면 어때요?’로 역제안하려 해요. 그러면서 같이 해볼 수 있는 영역을 논의해보자는 거죠.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 덜 비굴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기가 된 거죠.
그 노하우가 집적된 이 책. |
리: 비굴할 타이밍과 아닌 타이밍의 차이는?
박창선: 저는 영업은 비굴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자존심 지키고 싶다는 건 선택이고, 내가 쫄리면 비굴해질 수도 있죠. 사람이 일과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봐요. 나라는 인간 자체가 바닥이 아니라, 일이 안 되니 일 달라고 부탁하는 건 별개죠. 비굴하다고 자존감이 무너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직장인도 사업자도, 평생 나를 파는 시대에 살아야 한다
리: 이 책은 누구를 위해 썼나요?
박창선: 원래는 프리랜서와 갓 사업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 되라고 썼어요. 근데 의외로 직장인들이 꿀팁이 많다고 좋아하시더라고요.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 주시는 건, 다들 사회에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이라 그런 것 같아요. 능력 자체가 안 돼서 적게 돈 받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다른 이유로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건 억울한 일이죠. 결국 제가 하고픈 말은 내 능력 100 있으면 100을 어필해야 한다는 거예요.
리: 책을 통해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있다면?
박창선: 3가지예요. 첫째, 겸손 떨 때가 아니다. 이 시대는 능력 있고 잘할 수 있다고 미친 듯 어필할 때지, 겸손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자신감이 좀 아니꼬워 보이는 부분이 있겠지만, 지금은 그리 녹록한 사회가 아니에요.
그러하다. |
리: 두 번째는?
박창선: 사람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싶다 하잖아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신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이 좀 절박해 보이지 않았어요.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인스타나 페북에 올리고 지인에게 카톡 보내고, 이 정도로 영업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시작하려는 이 일이, 내 평생을 책임질 수 있는 밥벌이가 될 수도 있고, 나를 믿고 따라주는 팀원들 월급을 책임져야 하는 일이고, 설 자리 한 평도 없는 서울 땅에서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일인데요.
리: 세 번째는 뭔가요?
박창선: 어차피 이제 사업자든 조직에 있든, 결국 혼자 먹고살아야 하는 시대에요.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언젠간 나와야 하고, 사업하는 사람도 이 사업만 계속할 수는 없어요. 나이 먹어도 내 가치 증명하고 파는 걸 증명하는 걸, 우리는 유튜브에서 지겹게 보죠. 그래서 내가 가진 능력이 뭔지, 그 능력이 맞는지, 이걸 매력적으로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긴 세월은 아니지만 제가 시행착오 했던 것들을 하지 말라고, 호구 짓 하지 말라고… 그런 거죠.
일을 잘해도 착하게만 굴면 호구로 인정된다. |
리: 가끔 느끼는데 본인 매력은 본인만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박창선: 저는 심플하다고 봐요. 사람들이 돈 주는 영역이 있잖아요. 내가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돈을 준다면 그게 능력이죠. 그런데 보통 그게 좋아하는 것과 일치하진 않아요. 그러면 돈 되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좋아하는 걸 일로 하겠다고 결심하는 게 모순이라 생각해요. 그건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애당초 뭔가에 미쳐 있다 보니 돈이 되고 일이 되는 거라 생각해요.
리: 그렇죠. 막상 좋아하는 일도 일이 되면 힘들죠.
박창선: 네. 저는 그래서 좋아하는 건 지속이라 생각해요. 사실 좋아하는 거 할 때, 즐겁지만은 않고 무표정하잖아요. 돈 받을 때나 기쁘지… 재밌는 건 무표정하게 10년 내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또 하나는 해결의 즐거움이랄까… 일하다 보면 엄청 어려운 난이도의 도전에 부딪혀요. 그때 허들이 굉장히 높다. 이거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죠. 근데 좋아하는 일이면 좀 더 도전 정신이 생겨요. 무척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내놓고 보니 몇몇 분들은 뜨끔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결과 수많은 고객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
리: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창선: 여러 얘길 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 살아남기 위한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이 행복할 수도, 견디는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나’를 위해 살아간단 사실은 변함이 없겠죠. 자칫 나를 상품화시킨다는 말이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팔아야 하는 건 나 자신이 아닌 내 능력입니다. 우린 이것을 잊어선 안 돼요. 능력은 시간의 부산물이에요. 자칫 흘리고 지나칠 수 있는 땅 위에 놓인 아이템 같은 것이죠. 내가 겪어온 경험과 스킬들은 모두 멋진 상품들이에요. 빼놓지 말고 하나하나 다 주워서 팔아봅시다. 지극히 나를 위해 살아봅시다. 살기 위해, 영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