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라이벌’ 1등 하던 아디다스가 나이키에게 밀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
오랜만에 운동화 한 켤레를 사볼까 싶은 순간,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는 나이키와 아디아스 두 브랜드 중 하나가 떠올랐을 확률이 높은데요.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스포츠용품 시장의 오랜 양대 산맥으로 꼽힙니다. 사람 취향에 따라 나뉘겠지만 통상 업계에서는 2000년대 이후로부터 나이키가 아디다스를 줄곧 앞서왔다고 말하는데요.
실제로 나이키의 지난해 상반기(3~5월) 매출은 약 7조 3천억 원으로 비슷한 기간인 아디다스의 2~4분기 매출 약 4조 8천억 원보다 1.5배 앞섰습니다. 하지만, 나이키가 원래부터 아디다스보다 앞섰던 것은 아닌데요. 브랜드 런칭 초기부터 유명 스포츠 스타에게 자사 제품 신발을 신기며 인지도를 빠르게 끌어모으는데 성공한 아디다스가 어쩌다 나이키에 왕좌를 내주게 됐는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사진출처_위러브아디다스 |
사진출처_나무위키 |
아디다스는 1920년 독일의 아돌프 디슬러와 루돌프 다슬러 형제가 20㎡ 남짓한 세탁실에 차린 수제 신발 공장에서부터 시작했는데요. 형제의 아버지도 신발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던 데다 이들 형제가 거주하는 동네가 애초에 신발 장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 신발을 만드는 데 있어 기술, 시설, 유통책 관련 다양한 정보를 배우고 익히기에 탁월한 환경이었다고 하죠. 이때 형은 사업가 체질을 타고나 주로 바깥일을 맡고 동생은 개발자 기질이 있어 제품 개선에 몰두했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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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_위러브아디다스 |
예컨대 이들이 창업을 시작했던 당시 독일에는 히틀러가 집권 중이었는데요. 나치 정권은 국민들에게 스포츠를 장려했고,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을 활용해 독일의 부흥과 위상을 전 세계로 알리고자 하는 기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슬러 형제는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크게 주목받는 대회라면 자신의 제품을 홍보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당대 최고의 육상 선수 독일의 아더 요나트 선수와 미국의 빌 헬미나 선수를 찾아가게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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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은 다슬러 형제가 만든 신발을 신고 각각 남자 100m와 여자 100m 달리기에서 메달을 목에 걸게 됩니다. 이외에도 다수의 선수들이 다슬러 형제가 만든 신발을 신고 올림픽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런던 올림픽이 개최됐던 해 이들은 마침내 아디다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선 디자인과 함께 브랜드 상표 등록을 마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큰 성공은 형제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는데요. 사업 주도권을 두고 다툰 끝에 루돌프 다슬러는 1948년 ‘퓨마’라는 독자 브랜드를 내며 회사를 떠났으며 그 다음 해 아돌프 다슬러는 50여 명의 직원과 함께 ‘아디다스’를 창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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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나이키의 첫 시작은 평범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육상 선수 출신인 필립 햄슨 필 나이트와 오리건대 육상 코치 빌 보워먼이 함께 세운 나이키는 본래 신발 제조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 일본 신발을 수입해 파는 일로 스포츠 용품 시장에 발을 들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의 물건이 미국에 다소 저렴하게 들어오는 데다 일본의 장인 정신문화 때문에 제품의 품질도 어느 정도 보장됐다고 하는데요.
필 나이트는 당시 ‘아식스’라는 일본의 운동화를 트럭에 싣고 다니며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사업에 점차 커져 카는 차에 돌연 아식스 측에서 제품 수급을 뚝 끊어버립니다. 이는 곧 필 나이트에게 위기가 아닌 기회로 작용하는데요. 1972년 신발 유통회사에서 신발을 직접 만들기로 결정한 필 나이트와 빌 보워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나이키를 회사 이름으로 정합니다.
사진출처_나무위키 |
이때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형상한 나이키 로고와 관련된 재미난 일화가 있는데요. 빌 보어먼과 필 나이트는 브랜드 로고를 고심하던 끝에 같은 대학 그래픽 디자인 전공 학생들에게 디자인을 의뢰합니다. 여러 후보군 중 그나마 그들이 차선책으로 고른 것이 바로 부메랑처럼 속도감이 느껴지는 형태 때문에 ‘휙’소리를 의미하는 ‘스우시’라는 별명은 얻은 지금의 로고인데요. 이를 디자인한 캐럴라인 데이비슨이 나이키에 청구한 디자인료는 단돈 35달러였다고 하죠.
사진출처_풋셀 커뮤니티 |
이후 나이키가 점차 성장을 거듭하며 로고 디자인료가 너무 낮게 지급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이에 데이비슨은 디자인을 하는데 17.5시간가량이 걸렸고 시간당 요금이 2달러니 35달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하죠.
하지만 이후 1983년에 이르러 나이트 회장은 고위 임원들과 함께한자리에 디이비슨을 초대해 다이아몬드로 이뤄진 스우시 형태의 금반지와 나이키 주식 500만 주를 선물로 줬다고 하는데요. 당시 주당 가치로 따지면 총액이 7만 5천 달러에 달했으며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7억 6천만 원 정도라고 하죠.
사진출처_유튜브 ‘나이키 코리아’ |
사진출처_나무위키/아트스탯 |
업계에서는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비교할 때 마케팅과 경영전략을 빼놓을 수 없다고 입을 모으는데요. 나이키의 경우 시장을 기민하게 읽어 효과적인 마케팅을 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일례로 나이키 창업자 빌 보워만이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운동이라는 책에서 조깅을 소개하며 미국에 조깅 열풍을 불게 했는데요.
사진출처_유튜브 ‘지식한입’/조선일보 |
당시 국민 소득이 높았던 미국 사회는 건강에 관심이 높았던 터라 보워만이 쓴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미국에 조깅 열풍을 불게 했습니다. 이는 곧 나이키 조깅화의 판매 촉진으로 이어져 대박이 났죠. 반면 아디다스는 조깅이 스포츠로 볼 수 없다며 등한시하는 행보를 보였는데요. 이처럼 대중의 수요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면서 이때 아디다스는 업계 1위 지위를 나이키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사진출처_네이버블로그 ‘mind kontrol=mk’ |
이때 아디다스에게는 또 다른 리스크도 존재했는데요. 아돌프 다슬러의 아들인 호르스프 다슬러가 안정적인 경영을 추구했던 아버지와 달리 공격적인 경영방식을 추구해 부자간에 경영이념을 놓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아돌프 다슬러가 사망한 이후 아들 호르스트가 지나치게 마케팅이나 영업에만 집중하는 등 사업을 점점 더 무리하게 확장하는 과정에서 재정 악화도 심해졌다고 하죠.
특히 이 과정에서 각종 스포츠 협회 임원들과 불미스러운 거래를 했다는 비리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는데요. 물론 여러 문제를 일으키긴 했으나 호로스트는 워낙 사업 감각이 탁월한 사업가였기에 아디다스의 히트작 ‘슈퍼스타’를 만들어 성공시켰고 수영 전문 브랜드 아레나를 런칭해 시장의 좋은 반응을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사진출처_나무위키 |
하지만, 이렇게 아디다스가 휘청거릴 즈음 나이키는 아디다스가 꽉 잡고 있던 농구화 시장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구선수로 꼽히는 마이클 조던과 손을 잡고 ‘에어조던’을 앞세워 1위 굳히기에 들어가는데요. 1985년 처음 선을 보인 에어조던 시리즈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선풍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에어조던을 사기 위해 매장에 강도가 들이닥치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에어조던을 사기 위해 학생이 학교를 빼먹는 일이 비일비재 하자 제품 발표일을 주말로 바꿔야 했을 정도라고 하죠.
사진출처_간판클라쓰 |
현재 약 106조 원에 이르는 세계 최대 스포츠 용품 시장 미국에서 나이키가 운동화에서 60, 스포츠 의류에서 31%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아디다스의 점유율은 스포츠 의류 모두 6%에 불과한데요. 현지 언론에 의하면 아디다스가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는 서유럽 시장에서조차 지난 3년간 나이키가 급격히 몸집을 키워 아디다스 시장 점유율과 엇비슷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죠.
사진출처_인스티즈 |
지금까지 글로벌 스포츠 의류시장에서 최대 라이벌로 꼽히는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탄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에 얽힌 비화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두 브랜드 가운데 여러분이 애정을 갖고 있는 브랜드는 어느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