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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차의 새 시대를 열다, 현대 제네시스 BH

제네시스 BH는 한국차의 신기원을 연 기념비적인 모델입니다.

최근 출시되는 신차들을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무시무시해서 불과 몇 년 전에 출시된 차와 비교해도 성능, 디자인, 안전성, 편의사양 등 여러 부분에서 진보했는데요.


특히 한국차에는 괄목상대라는 말 조차 부족할 만큼, 지난 십수 년 사이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한국차는 기껏해야 '싼 맛에 타는 차'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세계 정상급 자동차로 거듭났고, 미래차 시장을 두고 100년 넘는 역사의 글로벌 기업들과 대등한 경쟁을 펼치고 있죠. 기술 자립과 품질 향상을 위한 수십 년 간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제네시스는 어떻게 한국차를 세계 무대에 올려놓았을까요?

한국차, 정확히는 현대차의 위상을 크게 높여준 차가 있었으니 바로 2008년 출시된 1세대 제네시스, 코드명 BH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늘날 독립된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의 시조라 할 수 있는데요. 대중차 회사였던 현대가 프리미엄 시장에 던진 첫 출사표이자, 한국차가 세계 무대에서 상품성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한국 자동차사(史)에서 큰 의의를 지닌 모델입니다.

다이너스티의 후계자가 미국으로 향한 이유​

오래 전 나온 그랜저의 고급 버전, 다이너스티를 기억하시나요?

제네시스라는 차가 개발되는 배경은 제법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6년 출시됐던 현대 다이너스티라는 차를 기억하시나요? 뉴 그랜저(2세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고급형 모델인데요. 1999년 1세대 에쿠스가 출시되기 전까지 짧게나마 현대의 기함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현대는 다이너스티를 그리 오래 팔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내수 시장에 새로 등장한 쌍용 체어맨, 기아 엔터프라이즈 등 쟁쟁한 대형 세단들과 경쟁하기 역부족이었던 뉴 그랜저를 조금 더 화려하게 꾸며 에쿠스가 나올 때까지 버틸 심산이었죠. 당초에는 에쿠스가 뉴 그랜저와 다이너스티를 통합하는 후속 모델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에쿠스가 몸집을 불려 5m급 대형 세단이 되면서, 다이너스티는 뜻밖의 수명 연장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도중에 계획이 바뀌며 다이너스티의 수명이 연장됩니다. 에쿠스는 경쟁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몸집을 불리고, 뉴 그랜저의 후속은 중형 세단과 기함 사이의 '준대형' 차급으로 포지셔닝합니다. 그 사이의 다이너스티는 오너드리븐 성향으로 바뀐 그랜저보다는 고급스럽고, 철저히 쇼퍼드리븐인 에쿠스보다는 부담 없는 차로 남게 되죠.


여하간 다이너스티는 그렇게 밀레니엄을 지나서도 계속 생산되고, 현대차 내부에서는 다이너스티의 후속이자 그랜저와 에쿠스 사이에 위치할 프리미엄 대형 세단, 코드명 GH를 개발합니다. 그랜저 XG의 플랫폼을 공유하면서 오너드리븐과 쇼퍼드리븐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대형 세단으로, 2003년 출시가 계획돼 있었죠.

기아 오피러스는 원래 다이너스티 후속이 될 차였습니다. 그래서 당대 현대차와 비슷한 디자인 요소가 많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 다이너스티의 수명이 연장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였습니다. 인수된 기아차에서는 엔터프라이즈 후속 대형 세단(코드명 SJ)을 개발 중이었는데, 두 회사가 한솥밥을 먹게 되면서 에쿠스와 판매 간섭을 일으킬 수 있는 SJ의 개발이 취소됩니다. 대신 개발이 막바지였던 GH가 기아에 넘어가 2003년 출시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아 오피러스입니다.


원래대로라면 2~3년만 생산됐을 다이너스티는 GH가 기아로 넘겨지면서 두 번째 수명 연장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2004년, 현대는 (원래대로라면 GH의 후속이 됐을)차세대 프리미엄 세단, BH의 개발을 시작합니다. 1세대 제네시스가 다이너스티의 정신적 후속작으로 여겨지는 건 이런 이유입니다.

2002년 시카고 모터쇼에서 공개된 현대 HCD-7 콘셉트카. 현대차는 본격적인 북미 프리미엄 시장 진출을 꿈꿨습니다.

기아를 인수하며 내수 시장에서 과점적 점유율을 확보한 현대차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글로벌 시장 진출을 준비합니다. 90년대 이후 미쓰비시와의 기술 제휴를 넘어 기술 자립을 이뤄낸 만큼, 이제는 고부가가치의 고급차를 만들어 세계 시장에 도전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첫 타겟은 미국. 당시 세계 최대의 자동차 시장이었을 뿐 아니라, 현대차에게도 최대의 수출국이었습니다. 또 렉서스나 인피니티, 어큐라와 같이 일본 브랜드들이 프리미엄 브랜드를 독립시켜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상품성만 갖춘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렇게 현대차의 북미 전략 프리미엄 세단, BH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프리미엄 국산차​

현대에게 후륜구동 고급 승용차는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사진은 2세대 제네시스(DH)의 후륜구동 드라이브트레인.

BH는 여러 면에서 현대차에게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우선은 유럽의 프리미엄 세단들과 경쟁하기 위해 주행 성능과 승차감이 뛰어난 후륜구동을 채택합니다. 이전에도 후륜구동 현대차는 있었지만 모두 기술 제휴로 만들어진 차거나 상용차였고, 현대가 직접 개발한 차들은 모두 가로배치 전륜구동 방식이었습니다. 때문에 후륜구동 방식을 품질과 성능이 중시되는 고급차에 적용하는 건 큰 도전이었습니다.

BH의 심장으로는 람다 V6 엔진과 타우 V8 엔진이 낙점됩니다.

심장은 갓 만들어진 독자개발 V6, 람다 엔진을 채택합니다. 또 브랜드 최초의 독자개발 V8인 타우 엔진의 탑재도 검토됩니다. 고성능 엔진에 대응하는 독자개발 후륜구동 자동변속기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아이신 제 6속 자동변속기(타우 엔진은 ZF 제 6속)를 탑재하기로 합니다.


이전의 현대차는 여러 부서들이 각자 담당하는 파트를 개발한 뒤 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BH는 현대차 최초로 차종 전담 개발 TF를 통해 개발됐습니다. 즉, 설계부터 양산까지 기존의 현대차와는 전혀 결이 다른 차를 만들겠다는 것이었죠.​

BH의 디자인과 콘셉트는 개발 도중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사진은 후일 노출된 BH의 초기 디자인.

물론 개발 과정이 순탄하기만 하진 않았습니다. 특히 초기에는 차량의 디자인이나 콘셉트에 대한 혼선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초창기에는 매우 역동적인 스포츠 세단으로 구상됐다가 이내 방향을 바꿔 운동성과 컴포트성을 고루 갖춘 럭셔리 세단으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디자인도 큰 폭으로 바뀝니다(디자인 변화에는 정몽구 회장의 지시가 있었다는 야사도 있습니다).


차체 크기는 동급인 BMW 5 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 등에 비하자면 다소 크게 만들어졌고, 국산차 최고 수준의 비틀림 강성을 확보해 안전성과 조종성을 높였습니다. 또 국산차 최초의 ACC(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렉시콘 프리미엄 오디오 시스템 적용 등 편의사양 측면에서도 이전의 국산차들과는 결을 달리 했습니다.​

2007년 뉴욕 오토쇼에서 '제네시스 콘셉트'가 공개되며 후륜구동 고급 세단의 등장을 예고했습니다.

당시 국산차의 유행(?)대로 BH는 현대 엠블럼 대신 방패와 날개를 형상화한 독자 로고를 부착했습니다(수출형은 현대 엠블럼). 다이너스티의 차명을 계승하는 것도 고려됐지만, "고급 세단의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의미에서 성경 창세기에서 따 온 '제네시스'로 확정됩니다. 4년 간 개발 비용 5,000억 원, 4,000명 이상의 인력이 투입된 신차에는 회사의 명운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2008년 1월 8일, 새해 첫 신차로 제네시스가 한국 시장에 출시됩니다. 출시 당시 캐치 프레이즈는 '다이내믹 럭셔리'로, 지금껏 국산차에 없던 역동적인 주행 성능과 고급스러움을 모두 담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오랜 노력 끝에 탄생한 신차는 한국차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국산 프리미엄 브랜드의 토대를 마련하다​

제네시스는 등장과 동시에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시장에 처음 등장한 제네시스는 국내·외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습니다. 스타일, 상품성, 주행 성능 등 여러 면에서 기존 한국차의 수준을 크게 뛰어넘었다는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1세대 제네시스의 절대적인 성능이나 완성도가 관록의 독일차와 대등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전까지 '싸구려 차' 취급을 받던 회사가 만든 고급차로선 믿기 어려운 수준의 품질이었습니다.​

제네시스는 국산차 최초로 2009년 북미 올해의 차에 선정됐습니다.

2009년에는 한국차 최초로 북미 올해의 차(NACOTY)에 선정되며 큰 반향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해외 시장에서 현대차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이후 잇달아 출시된 신차들(제네시스 쿠페, YF 쏘나타, 아반떼 MD 등)이 북미 시장에서 줄줄이 좋은 평가를 받으며 현대차가 2류 브랜드에서 북미의 메이저 대중차 브랜드 중 하나로 경쟁에 합류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탄탄한 기본기는 기함 에쿠스를 뛰어넘는다는 평까지 받았습니다.

제네시스는 국내 시장의 소비자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국산차는 수입차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처음으로 동급 수입차와 비교대상으로 거론된 차이기도 합니다. 그랜저보다는 고급스럽고 에쿠스보다는 덜 권위적인, 그러면서 수입차처럼 부담스럽지 않은(당시만 해도 수입차에 대한 시선은 지금보다 훨씬 곱지 않았습니다) 프리미엄 세단을 원했던 고소득 중·장년층과 기업 임원 등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현대차 자신에게도 제네시스를 통해 얻은 개발 노하우는 큰 자산이 됩니다. 제네시스의 후륜구동 드라이브트레인 설계는 이듬해 출시된 2세대 에쿠스(코드명 VI), 제네시스 쿠페(코드명 BK) 등에도 활용됐고, 이를 통해 프리미엄 후륜구동 승용차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좌절됐던 제네시스 브랜드의 출범은 7년 뒤인 2015년에야 이뤄집니다.

물론 모든 계획을 다 달성한 건 아닙니다. 당초 현대차의 계획은 BH의 출시와 동시에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를 출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 졌고, 이로 인해 제네시스 브랜드의 출범은 2015년으로 미뤄집니다. 당시로선 아쉬운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제네시스의 상품성이 충분히 탄탄해 질 시간을 벌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2011년에는 내·외관과 파워트레인, 상품성을 대폭 변경한 부분변경 모델이 출시됩니다.

이렇게 평단에서나 시장에서나 좋은 평가를 받은 제네시스는 2011년 부분변경을 겪습니다. 부분변경 모델에는 디자인 변경 외에 새로운 기술이 대거 탑재됐는데요. 우선 모든 연료 시스템이 멀티포트분사(MPI) 방식에서 가솔린 직분사(GDI) 방식으로 바뀌며 효율과 성능이 소폭 향상됩니다. 수출형의 4.6L V8은 5.0L로 배기량을 늘려 더 성능을 끌어올립니다.


또 변속기의 국산화에 성공해 파워텍 8속 자동변속기가 탑재됐고, 어댑티브 LED 헤드램프와 간접배광식 LED 테일램프가 적용돼 상품성을 높였습니다. 그 밖에도 단종 전까지 꾸준히 연식변경을 통해 신규 사양을 적용하며 글로벌 시장에서의 기함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V8 엔진을 얹은 제네시스 프라다는 당시에는 판매 부진에 시달렸으나, 오늘날 재평가를 받게 됩니다.

2011년 5월에는 국산차 최초로 명품 브랜드 프라다와의 협업을 통해 한정판 '제네시스 프라다'가 출시됩니다. 수출형에 들어가던 5.0L 엔진을 탑재하고, 외장 컬러와 내장 마감에 프라다가 참여했는데요. 당시에는 목표 한정 판매량(1,200대)를 채우지 못하고 단종됐지만, 오늘날에는 희소성과 국산 유일의 V8 비즈니스 세단이라는 요소가 재평가되며 일반 제네시스 대비 높은 가격대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2013년 11월, 2세대 제네시스(코드명 DH)가 출시되며 BH는 단종 수순을 밟습니다. DH는 뉘르부르크링에서 주행 테스트를 거치며 더욱 완성도를 끌어 올렸고, 후일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을 선언하며 브랜드의 첫 차인 G80으로 바뀝니다. 비록 BH는 단종 전에 브랜드 독립을 목도하지 못했지만, BH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제네시스도 없었다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여전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지만, 제네시스가 한국 자동차 역사에 남긴 족적은 생각보다 큽니다.

주변에서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는 차이기에 자주 잊는 사실이지만, 한국 자동차 산업은 제네시스 BH의 전과 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한국 자동차의 품질과 위상을 세계 최정상급 제조사들과 경쟁할 수 있을 만큼 끌어올린 데에는 제네시스의 공이 큽니다.


얼마 전, 제네시스 브랜드는 완전 전기차 브랜드로 탈바꿈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전기차는 기존 내연기관차 시장과는 패러다임이 다른 만큼, 지금껏 다른 브랜드들을 뒤쫓았던 제네시스가 마켓 리더로 등극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전기차 시대에도 다시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제네시스가 등장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국산 프리미엄 브랜드의 창세기를 열었던 제네시스 BH 또한 다시금 조명받을 지 모를 일입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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